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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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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7일 21시 45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고병권.

의외였다. 고병권은 이제 서른다섯의 젊은이였다.
"코뮌주의다. 공동체로 번역할 수 있지만, 코뮤니즘(공산주의)과는 다르다. 코뮤니즘이 국가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라면, 코뮌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며 문제를 풀어간다."
"연구는 크게 5개 주제로 진행돼 왔다. '한국 근대성', '동아시아 근대성', '서양 탈근대 철학', '문학 비평', '고전 다시쓰기' 등이다."
고병권이 말하는 수유+너머이다. 그는 이곳의 대표(동료들은 그를 추장이라고 부른다.)이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니체 철학 연구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해 에는 박사 학위를 받은 ‘수유+너머’의 창립멤버이다. 수유+너머의 창립자인 이진경(43.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전임강사) 박사의 대학원 후배이자 학문적 동지다.
고병권은 2001년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등의 저서를 발표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수유+너머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공부와 지식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그 무엇, 자신의 삶을 여기서 만든다는 느낌 아닐까. 잘 사는 법을 함께 배워가는 것이다. 자기 변신의 경험이 소중하다. 요즘은 미국, 중국, 일본에도 알려져 해외 연구자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며칠씩 머물다 가기도 한다. 최근 이들을 위한 숙박 공간(게스트하우스)도 만들었다."
수유+너머는 창립 당시인 8년 전엔 박사가 고미숙, 이진경 박사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 공부한 정회원 중 박사 학위자가 15명이다. 교수도 몇 나왔다. 현재는 5명이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다. 석사 학위자는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다.
고병권에게 있어 수유+너머는 학문을 포함한 삶의 터전이다. 그와 그의 학문에 대한 이해는 수유+너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니체는 우리 모두 내면에 천재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천재가 피곤할 것이라 말했지만 니체에게는 피로야말로 가장 큰 적입니다. …니체에게 A에서 A'로 바뀌는 것은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인 채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천재는 반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죠.”
고병권은 철학자를 ‘자연이 인간세계에 박아둔 화살’로 묘사한 니체의 비유를 통해 철학자들의 사상을 받아쓰는 ‘철학적 노동자’가 되지 말고 그 철학자를 화살로 삼아 진리를 향해 쏘는 ‘미래의 철학자’가 되라고 말한다.


니체, 천 개의 눈 , 천개의 길을 읽고.

니체, 그는 젊은 시절 나의 메시아였다. 내가 독문학을 전공하게 된 주요 원인을 제공한 이도 그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어둠속의 내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은 내게 삶의 빛을 던져준 이, 그가 바로 니체였다. 인간이 아닌 초인을 꿈꾸며 나는 다시 나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고병권은 나의 기억 속에서 퇴화해 버린 니체를 다시금 불러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불현듯 손에 들고 나타난 색 바랜 그러나 한 때는 폼 꽤나 있었을 양장의 니체 전집과의 만남.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와 잠만 자던 니체. 고등학교 어느 날 수업시간에 들은 니체의 초인 철학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 그리고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신나게 읽었던 니체 전집.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니체에 흥분하기에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멀리 걸어왔다.
니체, 천 개의 눈, 천개의 길..... 이 책을 손에 든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고병권... 그와 나는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내게 나의 과거를 알려주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철학은 유용한가, 무용한가?
사고(思考), 관념(觀念), 사변(思辨), 분석(分析), 현상(現像)에 대한 해체(解體)....
그럼에도 철학은 인간에게 필요하다.
지적유희(知的遊戱), 지적탐구(知的探究), 진리탐구(眞理探究).


내가 저자라면.

서양철학, 특히 독일 철학자들의 문체가 물씬 풍기는 문장들... 이런 문체들이 철학적이고 고상해 보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일반대중을 독자로 쓴 문체라면 독일어, 독일 사람들만큼 딱딱하다.
주어와 형용사구, 부사구가 철학자들 이름들 속에 마구 뒤섞여 있는 문장들. 너무 사념적이고 관념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책이 상당히 많이 팔렸으니 이제 우리나라에도 니체 철학에 대한 매니아가 상당한 것 같아서 반갑다.
쉬운 얘기들을 너무 어렵게 고상하게 하고 있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에서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31)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41)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공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56)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57)
놀랍게도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신호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계’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95)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게는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110)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거 없다고 설득한다.(112)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써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161)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173)
우리는 부정의 권력의지가 왜 반동적 힘과 공모하고 긍정의 권력의지가 왜 능동적인 힘과 공모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행위에 대한 금지나 부정, 단념을 조장한다. 그러나 긍정의 권력의지는 행위자체를 촉진시키며, 더욱이 지속적 행동을 강조한다.(176)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문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196)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니체의 신체도 긍정을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 변화했다. 그의 금욕은 괴로운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겁게 향유되는 과정이다. 긍정의 정신은 병에서조차도 건강을 발견한다.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202)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209)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꾸짖는다. 그에게 인간중심주의는 한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211)
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212)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215)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222)
신의 죽음과 초인의 출연에 대해 차라투스트라가 말한다. “이제 인간의 미래라는 상이 진통을 겪고 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원한다. 초인이 살게 되기를.”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229)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디오니소스를 만나면서 변신을 경험한다. 그는 ‘불평하는 곰’에서 ‘춤추는 곰’으로 바뀐다. 그의 춤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옮겨가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주고, 주사위 놀이는 “낮음에서 높음”으로 변이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233)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떠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불량증을 가져서도 안 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239)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인들이 허무주의를 이겨내는데 비극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는 디오니소스라고 하는 긍정의 신이 드러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생의 즐거움과 명랑성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이 숨쉬고 있으며, 공포와 연민을 초월한 생성이라는 테마가 은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242)
병균 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니체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247)
반그리스도에서 기독교로부터 예수를 구원한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사랑은 실천”이라는 예수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자, 그때부터 니체는 자신의 필명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쓰기 시작했다.(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251)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내부이지만 잡히지 않는 내부, 그것이 “내재하는 외부”이다.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252)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253)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근대의 자연과학은 신앙들을 추방함으로써만 자신에 대한 신앙을 확보해 나갔다.(259)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서양의 수사들은 아침에는 마당을 쓸고 오전에는 성경을 읽고 점심에는 밭을 돌보고 하는 식으로 삶의 시간을 순서대로 분할해서 사악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프로테스탄트들을 통해 숲속 외진 곳에서 도시 한복판으로, 그리고 각자의 가정으로 퍼져나갔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 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266)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베버의 종교학이 끝나고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근대가 도달한 허무주의와의 대결!(268)
베버는 근대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연이 낳은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뿐이었다.(280)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반성하는지’ 그리고 ‘누가 반성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284)
모든 반성의 기준인 초월적 존재나 신성한 가치가 확보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거리는 다른 모든 가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들(차이들)을 소멸시켜 버리는 거리(차이)이다.
니체는 ‘내적인 거리’가 ‘거리의 열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를 ‘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낸다.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거리(차이)만이 유의미했던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가치 생산자들에게 있어 거리는 다양화된다.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286~287)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는 어떤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이’의 고유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차이는 회피되어야 하거나 해소되어야 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이 인정되고 보존될 때조차 ‘문제’다. 그것은 생산되기 보다는 관리되어야 한다.
이들은 차이로 정의되는 엔트로피를 ‘0’으로 끌고 가는 니아프노프 함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의 결말이 ‘열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316)
생태학은 다양성과 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공공영역은 차이를 생산함으로써 유지되고, 생산된 차이가 만들어낸 다양성에서 그 힘을 얻는다.(317)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퀼트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혀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든지 기계의 부품들처럼 다른 것과 접촉하여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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