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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5일 20시 59분 등록
신영복 글.그림, 더불어숲, 중앙 M&B, 2003


젊은 날 20년간 영어의 몸으로 지낸 신영복님이 전 세계를 다니며, 문명의 현장에서 보낸 엽서 형식의 글이다.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기보다, 역사와 문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영복님의 애정과 소회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어느 곳을 펼쳐도 노 학자의 세계관이 美文으로 표출되어 있다. 카투만두에서 일반 관광객들은 네팔의 나지막한 삶을 싼 값으로 구경하며 부담없이 지나치지만, 필자는 ‘문화의 원형’을 본다. 오늘날의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하나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터 - 장작더미 위에서 타고 있는 시체나 그 시체를 뒤적여 고루 태우는 사람이나 어느 한 사람 슬퍼하는 이가 없다고 한다. 바로 그 밑의 강가에서 빨래하고 머리를 감는 일상이 태연하게 진행된다고. 여기에서 신영복님은 삶의 찰나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본다.


평원에 그려진 거대한 수수께끼 그림을 보면서, 우리의 문명과 다른 고도의 문명이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문명에 대한 경외심. 한편 그 그림을 본딴 상술 앞에서 현대인이 나스카를 읽는 방법에 대해 한탄한다. 그 어조는 마치 스스로 저지른 일인 양 인간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책 속에 직접 그린 삽화는 물론 파리에서 예술에 대한 사색은 신영복님의 깊은 사고력과 청년의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예술의 토양이 바로 이 다양성과 관용성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습니다. 다양성은 획일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유의 개념이며 관용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는 인<人> 간 <間>의 여백입니다.”


신영복님의 예술론은 그 어떤 것보다 발랄하고 핵심에 닿아 있다. 자유의 반대가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라는 부분, 천재의 영향력조차 거부하는 자유.다양성에의 의지는 님이 영원한 젊은이인 것을 말해준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 300쪽


“인간을 예술화하고 사회를 예술화하는 미래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해방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진부한 틀에서 해방하고 완고한 가치로부터 해방하는 일입니다. --- 뿐만 아니라 미술관에 소중히 전시되고 있는 명작들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우리를 어떤 미적 타성에 가두는 것이라면 이미 예술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술적 천재가 수많은 사람들의 미적 정서를 획일화하는 소위 反美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 혁명은 그 사회의 모든 닫힌 공간을 열어주고 잠긴 목소리를 틔어주는 개벽의 경험을 사회에 안겨 줍니다. ---- 진정한 예술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깊이 있는 관련을 추구하는 것이며, 어떠한 미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소통방향’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303-4쪽


그런가하면 미국에 대한 담론을 일체의 해설없이 역동적인 문답으로만 구성한 것은 님의 독자적인 글쓰기 영역을 돋보이게 하였다. 세계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놀랍거니와, 탄탄한 철학을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달하는 힘이 곳곳에서 빛났다.


그러나 똑같은 형식의 두꺼운 책을 주욱 읽다보니 다소 서운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시작도 끝도 ‘사람’인 분의 저서치고는 의외로 ‘사람’이 배제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엽서 형식을 차용하느라고 그랬겠지만, 길지않은 분량에 방대한 사고를 담다보니, 전적으로 님의 소회에서 그쳤지 현지에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지는 못하였다. 여기에서 강인선 기자의 컬럼 “외국에 제2의 고향을 만들어라”하는 것이 생각났다.
관련부분을 옮겨 본다.


“사람은 낯선 곳에서 낯선 환경에 부딪힐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가장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좀 떼어낼 때 이전에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배낭여행으로 또는 단체관광으로 관광지에 가서, ‘왔노라, 보았노라, 사진 찍었노라’를 외치던 시대가 아니다. 그냥 스쳐 지나갔다 돌아오지 말고 외국에 반년 이상 살면서 내 도시를 하나 만들어두자.

일시적인 방문자는 겉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정말 도시의 속내를 알려면 그 도시의 터줏대감들이 만들어놓은 자기들만의 네트워크에 침투해야 하는데, 그건 웬만한 노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어학연수를 하든 일을 하든 자원봉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정을 푹 들여두면, 세상살이가 고단할 때 다시 찾아가 그 때 그 시절 낯선 곳에서 분투하던 자신의 모습을 되새기며 심기일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곳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에 한번 살아볼 만한 곳이 얼마나 많은가. 두 개의 고향, 두 개의 베이스캠프, 21세기의 mobile족이라면 그 정도의 정신적 기동성은 필요하지 않을까. “
강인선,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 137쪽


전적으로 동감이다. 워싱턴 특파원의 생생한 체험에서 길어올린, 소중한 tip이다.
많은 나라에 대한 짧은 단상 - 그 형식에서 오는 특징이겠지만, 신영복님의 저서에서 보다 깊이있는, 현지와 현지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더불어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름다운 풍광을 스쳐 지나쳐오는 것보다는 강인선 기자 식으로 할 수만 있다면 일 년에 한 계절 정도는 그 곳에 가서 생활할 수 있는 두 번째 고향, 두 번째 베이스캠프에 대한 상념이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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