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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7일 18시 31분 등록
프롤로그

네 권의 책 중에서 두 번째 책인 르네쌍스·매너리즘·바로끄를 골랐다. 새롭게 탄생하고, 중세의 암흑기를 탈출하는 새로운 빛과 같았던 르네쌍스를 더 알고 싶어서였다. 윌 듀란트의 역사속의 영웅들【?르네상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돈은 문명의 뿌리이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하였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주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웰 듀랸트, 역사속의 영웅들 283p)


일반적인 영웅이 아닌 예술이 변화상을 알고 싶었다. 영웅들의 삶이 길을 가다가 세워놓은 이정표라면 예술의 역사는 그 길가에 꽃을 감상하며 지나온 느낌이 들었다. 우선 르네쌍스가 부르크하르트의 예건대로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암흑의 중세가 아닌 봄날에 냇가에 가보면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듯이 중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 말이 맞는다고 본다.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려면 대중의 힘이 필요하다. 고대 로마의 무수한 유산들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력의 증가가 대중을 움직이게 하였고, 대중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탄생을 낳았다.

제목을 보고 르네상스와 바로크라는 말은 쉽게 연상이 되었는데, 매너리즘을 보고 약간 혼란이 생겼다. 나태하고 게으르고, 과거를 답습하는 것을 보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매너리즘도 하나의 예술 형태로 자리를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세기에 걸쳐 전 유럽을 동요시켰던 하나의 예술적 표현으로 고전주의 형식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예술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고, 매너리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신경질적인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로 본다면 매너리즘이 귀족적이고, 초기 바로끄 양식이 좀 더 민중적이라는 표현도 이해가 되었다.

4. 마끼야벨리에 대하여

중간에 마키야벨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로웠다. 선동적이고 도덕을 고려하지 않은 비정함으로 느껴왔던 것에 비하여 하우저의 평가는 매우 후했다. 시대의 대변자, 혼란하던 시기에 인기를 끌었고, 많은 사람들의 행태에 나타난 것을 단지 대변했다는 식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마끼야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의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의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과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163p)


이런 평가에 대하여 별 할말은 없지만 역사적인 평가는 늘 현 시대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기의 종교가 정치를 앞서고 있을 때 인간의 정치학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에 대한 것은 평가를 해주고 싶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기록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문학과 예술의 기본적인 지식이 전무한 나로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교과서에서 외운 굵직한 단어들만 이해가 되었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예술이 대중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현재 우리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과의 관계가 생각이 났다. 경제적인 변화가 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2.저자에 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데메스바라는 소도시의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문학·미술사를 전공했다. 미술 역사가 마르크스 드보르자크,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등으로부터 배웠다 루카치, 만하임과 함께 20세기 헝가리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예술사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 비엔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예술과 문학사를 전공하였다.

파리에서 베르그송을 만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베르그송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로 프랑스의 유심론과 창조적 진화론으로 철학·문학·예술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우저도 그의 창조적 진화론을 바탕으로 예술과 사회의 문명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창조적 진화론은 생물의 진화는 동물과 식물의 2대 방향으로 진화되어 나아가는데 지성적 인간은 동물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 이러한 진화는 기이 진화는 기계론적도 아니고 목적론적도 아니다. 이 진화는 동적이며 예견 불가능한 내적 충동력인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창조적 진화이다. 이렇게 예술을 발전시키는 사회와 역사의 동인을 창조적 진화로 보았다.

그는 1915~1917년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했던 젊은 지식인 클럽 「일요서클」에서 루카치와 만하임을 만나면서 학문의 새로운 눈을 뜬다. 1차 세계대전 후 중부 유럽을 휩쓸었던 혁명의 소용돌 이속에서 루카치와 함께 헝가리 정치에 관여했지만 1919년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50여년의 긴 망명길에 오른다.
세계 1차 대전 직후에 하우저는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고전문학 역사를 우해 2년을 보냈고, 1921년에는 베를린에서 거주하였다. 이때에 예술과 문학적인 문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이 깊다는 이론을 계속 발전시켰다. 1938년부터 10년동안 런던에서 머물면서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에 하우저는 영화에 대한 수필을 썼다. 1951년에는 미국의 리드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브랜디스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이어 런던 등지에서 망명객으로 지내다가 1977년에야 다시 헝가리로 돌아온다.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과악아카데미의 멤버가 되었으며, 이듬해는 1928년 부다페스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는 예술의 사회 경제적인 결정론을 연구하였다. 예술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사회와 상호 교류하는 것으로 주장되었고, 상업적인 관심의 주제로 예술이 발전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저서로 『예술사의 철학』(1958)『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매너리즘 연구』(1968)『예술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가슴을 치는 구절

3 가슴을 치는 구절

<제1장 르네쌍스>

<1. 르네쌍스의 개념>

(14) 르네쌍스의 괄목할만한 점은 한마디로 예술가가 자연의 관찰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이 하나의 ‘자연연구’가 되었다는 사실임을 간과하고 있다. 고딕의 자연주의는 예술적 묘사가 상징에만 치우치던 것을 그만두고 초경험적인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단지 현세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새로운 의의와 가치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4) 사회와 경제가 교리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해서 예술 또한 점차로 아무런 스스럼없이 직접적인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지만 자연주의는 이윤경제와 마찬가지로 결코 르네쌍스의 소산만은 아니다.

(17) 르네쌍스는 계몽주의와 자연주의가 원했던 만큼 그렇게 권위주의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직자들을 공격하기는 했어도 제도로서의 교회에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고,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는 데 비례해서 그 대신 고대의 권위를 내세웠다.

(18)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쌍스의 개인주의를 관능주의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그에게는 르네쌍스의 인격자율의 이념이 중세적인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을 뜻하는 것이었고 르네쌍스의 자연예찬은 생의 기쁨과 ‘육욕의 해방’을 알리는 복음 같은 것이었다.

(19) 물론 르네라는 실제 역사의 현실은 폭군의 모습에 나타나는 초인적 인간상과 다른 것이었듯이 유미주의자의 꿈과도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르네는 이와 반대로 가혹하고 냉철하였으며, 객관적이고도 비낭만적이었다. 이러한 면에서도 르네쌍스는 중세 후기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20) 이때부터 민족적·종족적 개념이라는 것이 분화적 요소로 두드러지게 전면에 나타나게 되고, 아울러 르네쌍스는 지금까지 단일한 유럽문화에서 이딸리아의 국민정신이 분리되어 부각되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라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22) 고딕예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시선을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아가도록 만들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 묘사에 나타난 개개의 부분들을 하나씩 뜯어볼 수 있도록 만든데 비해, 르네 예술은 절대로 세부적인 묘사에 머물지 않고 한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낼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을 동시에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4) 그 밖에도 이딸리아에서 새로운 예술문화가 싹튼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고대의 문화적 유산이 잘 보존되어 여기 저기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전통과의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르네상스의 설립에 관한 학설들은 바로 이 요인에 아주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26)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들 역시 르네가 중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이 두 시대의 상호 연관관계가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연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즉 헨리토데가 강조하 프란체스꼬회의 정신, 노이만이 강조한 중세적 개인주의, 그리고 꾸라조가 강조한 자연주의 등이 하나같이 중세적 자연경계가 종말을 고하면서 유럽 사회의 모습을 변모시킨 저 사회적 동력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7) 실제로 르네는 자본주의?경제·사회제도로 나아고 있던 중세적 발전경향을 이때부터 전 유럽의 정신적·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합리주의라는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31) 길드의 이러한 정치화는 유럽 근세에서 시민계급 최초의 결정적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 승리는 전제정치에 대한 그리스 민주주의의 승리를 상기시킬 정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2) 14세기는 길드를 장악한 중산층고 길드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임금노동자층은 그 중에서도 단결금지 규정 때문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이시기의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일체의 집단적 행동이 저지되었고, 파업이나 그 비슷한 행동도 혁명적 행위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37) 이 새로운 시대의 경제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정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인데, 이 사고방식은 인간을 그의 성과로, 그의 성과를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이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를 단순히 투자와 수익성, 이익가능성과 손실가능성, 그리고 차변과 대변이라는 복잡한 체계속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38) 르네쌍스의 자본주의적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영리추구를 위한 노력과 이른바 중산층의 미덕 그리고 영리욕과 근면, 절약성과 정직성이다.

(48) 이러한 인물들이 표현하는 것은 힘과 에너지의 위엄과 진지성이며, 그들은 섬세하기 보다는 간결, 견고하고, 우아하기보다는 좀 거친 편이었다. 이 예술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감정 생활감정은 본질적으로 비 고딕 적이었다. 즉 그것은 비형이상학적이고 비상징주의적이며 비 낭만주의적, 비 의식적이었다.

(55) 자본주의 발달의 끊임없는 리듬을 이루는 것은 사회계층의 변화이다. 부의 포화상태에 이른 사회계층이 적극적인 경제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지금까지 영리경제에 참가하지 못했던 계층이 새로이 생긴 경제적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산계층이 유산계층으로 올라가고, 유산계층은 귀족적인 계층으로 다시 상승하는 것이다.

(62) 이때부터 서서히 미술가와 공예가 가 동일ㄹ인이던 상황은 변화하고 화가는 지금까지 농이나 벽판, 깃대나 안장방석, 접시나 항아리에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른 의식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문자의 희망에 구속되지 않고 고객을 위한 생산에서 상품생산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전환이 예술애호가, 전문 감상자, 수집가의 등장을 위한 예술가 측에서의 선결조건이었다.

(67) 미술수집가, 예술보호자로서의 로렌쪼의 활동은 한마디로 스케일이 큰 영주의 도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의 수집품이 여러 측면에서 아직도 한 영주의 골동품 창고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듯이, 그의 일반적인 예술적 취향 즉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에 대한 취향역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꼬꼬적인 예술취향과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것이었다.

(69) 르네쌍스는 남성들의 시대였다. 네삐 궁정에 군림했던 구끄레찌아보로지아 또는 페라라와 만뚜아에서 궁정의 중심을 이루면서 주위의 시인들을 보호·격려 했을 뿐더러 조형예술의 이해자로서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는 이자벨라 데스떼 같은 여성들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 주도적인 예술보호자, 예술 애호가들은 어디서나 거의가 남성적이었다.

(71) 당시 세간에 퍼져있던 예술가들에 대한 수많은 신변일화가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딘지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러한 인기를 누린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공개경쟁에 참가하여 작품을 전시하고 길드 위원회의 일을 맡고 또한 그들의 천재적인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인물로서 누리는 인기였던 것이다.

(72) 르네쌍스에 관한 교과서적인 지식에 따른다면, 미술품을 소장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미풍양속에 속하고 부유한 시민가정에서는 누구나 적어도 몇 점의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칙이지만, 실제의 양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16세기 후반의 예술이론가 지오반니 바띠스따 아르메니에 의하면 그런대로 볼만한 그름이 한 점도 없는 유족한 집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73) 이대부터 앞으로의 예술발전에서 근간을 이루게 될 교양 있는 소수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대중 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지금까지의 유럽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중세의 문화역시 평준화된 공동체 문화는 결코 아니었고,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문화담당 계층은 그들의 문화가가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76) 나이어린 소년들이었던 이들 도제들은 물론 가?좋은 노동력은 못되었지만, 아무튼 가장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주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좀더 집중적으로 예술가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러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덕분이지 결코 훌륭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장인들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다.

(78) 정신적 공동체로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평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스승과 제자라는 일련의 긴 계보를 이루고 있는데, 예컨대 프라안젤리코→ 베노쪼고쪼리→꼬지모 로쎌리→ 브론찌노로 이어지는 계보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82) 북쪽 나라에서는 완전한 장인이 된 예술가는 한 도시에만 묶여있어야 했던 반면, 이딸리아에서는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러한 발랑 생활이 동시에 지역적인 상황에 제약되어 있고, 또 지역적 테두리 안에서만 지켜질 수 있었던 길드의 규정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85) 길드 당국이 조합원들이 길드의 규칙을 어겨도 눈감아주게 된 것은 주문이 많아져서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실업의 위험이 없어졌다고 느껴지면서부터이다. 예술가들이 독립하게된 것은 이와같이 미술시장에서 예술가들의 실업 위험이 점차 감소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인문주의자들을 동료로 삼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힘을 빌려 길드의 저항을 깨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경제적으로 구축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인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상층계급에 맞서서 정당화하기위한 것이었고, 또 당시 유행했던 신화적·역사적 주제들에 관해 그들의 학문적 조언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88) 다빈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고 한다면, 똑같은 의미에서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인문주의자와 좀더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라면 이런 이단자적인 주장을 감히 입밖 에 낼 수는 없을 것이다.

(90) 예술가들의 새로운 자기의식과 독자거인 창작활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징표중의 하나는, 그들이 이제 직접적인 주문에서 해야 되기 시작하고, 주문받은 일들을 종전처럼 그렇게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술적인 과제의 해결을 일체의 주문 없이 자발적으로 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93) 여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더없이 높은 지위를 달성하는데, 이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예술적 자유라는 일체의 개념은 유명무실해지는데, 예술작품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이 바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유행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술가들의 세상의 영예를 기려야 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로 세상이 예술가들의 영예를 기린다.

(94) 천재란 신의 선물이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타고난 창조력이라는 이념, 천재가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만 하는 독자적이고도 일회적인 예술의 법칙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천재적 예술가의 특성과 고집에 대한 합리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자유경쟁에 입각한 동적인 사회의 본질 때문에 중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보다 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지배ㅏ들이 그들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과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급규모로써는 도저히 예술시장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예술의 수요가 급증했던 르네쌍스의 사회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95) 이러한 에너지와 자발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천재는 르네쌍스의 이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르네쌍스 사람들은 인간정신의 본질과 현실을 지배하는 그것의 위대한 힘을 인식하였다.

(98) 중세에는 예술품이 하나의 대상적인 가치만 가지고 있었다면, 르네쌍스에 와서는 예술품에 인격적인 가치를 아울러 부여했다. 르네쌍스에서는 소묘가 예술적 창조의 공식처럼 되었는데, 왜냐하면 소묘는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작품에 따르게 마련인 단편적인 것, 미완성적인 것, 완성할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적 자체보다도 업적을 이루는 능력을 중시한다는 천재 개념의 기본특징은 또한 천재성이란 남김없이 실현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뜻하는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르네쌍스 인들이 왜 불완전한 소묘에서 예술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았는가를 해명해주는 것이다.

(100) 중세의 예술이 현실을 해석하고 인간을 도덕적으로 향상시키려 했다면 르네쌍스의 예술은 현실을 풍부하게 하고 인간을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중세의 세계가 인간존재의 경험적·초현실적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면, 르네쌍스의 예술은 이러한 두 영역에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의 영역을 첨가하는데, 이 새로운 영역에서는 존재의 현세적인 형식들과 형이상학적 원상 모두가 하나의 독자적이고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103) 예술은 15세기에 처음으로 과학적 훈련을 받았고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오늘날까지도 이 시기에 투자해놓은 자본금으로 사아가고 있다. 수학과 기하학, 광학과 기계학, 광선론과 색채론, 해부학과 생리학은 당시 예술의 기본 도구였고, 공간의 성질과 인체의 구조, 운동과 비례의 계산, 의복 주름의 묘사법에 대한 연구나 색채에 대한 실험 등은 당시 예술의 주된 관심사였다


(111) 르네쌍스의 예술가들은 인문주의자들만큼 그렇게 멀리 동시대인과 유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정신생활은 이미 밑바닥부터 뒤흔들렸고, 중세적 사회질서 속에 통합됨으로써 예술가가 누리던 균형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행동주의와 유미주의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들은 행동주의와 유미주의의 갈림길에 있었다. 아니면 그들은 이미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예술 형식과 예술 이오의 목적의 결합이라는, 중세에는 소박하고 자망하며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던 사실이 르네쌍스의 예술가들에게는 상실되고 만 것이다.

<친구에첸또의 고전주의>

(117) 고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모든 부분의 조화’라는 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알베르띠에게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전체의 미를 손상하지 않고서는 전체 작품에서 어떤 한 부분도 떼어낼 수도 없고 무엇을 첨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21) 전성기 르네쌍스의 예술은 당시의 사회를 그들 자신이 그렇게 보기를 원했고 또 남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던 바대로 묘사했다. 그들 예술의 특징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거의 하나같이 자신들의 현상유지에 주안점을 둔 귀족적·보수적 생활이상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127) 르네쌍스 이후 우리들은 하나의 회화나 조각품을 단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한 현실의 집약적 표현, 다시 말하면 광범위한 세계와 여기에 맞서 대항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형식구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대극성은 때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쌍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2장 매너리즘>

<1. 매너리즘의 개념>

(140) 매너리즘의 이러한 경향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체험의 심화 및 내면화이자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비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의식적·의도적으로 변형시키고 때로는 괴상하고 난해한 것에 심취하는 주지주의였으며, 또 어떤 때는 이를 테면 까다로운 식도락가의 향락적 취향처럼 모든 것을 섬세하고 고상한 것으로 번역해서 생각하는 예술취향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고전주의 형식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41)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예술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고, 매너리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신경질적인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 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45) 매너리즘이 당시의 정신주의적 예술방향과 육감적 예술방향의 갈들의 한 표현으로 생겨났다면, 바로끄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위에서 이와 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로마약탈이후 바로끄적인 양식 경향은 점차 매너리즘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고, 그 후부터 60여 년간은 매너리즘이 예술발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2.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148) 매너리즘은 16세기의 전 유럽을 동요시켰고, 정치, 경제, 정신생활의 모든 영역에 파급되었던 위기의 예술적 표현이다. 정치적 변혁은 근대 최초의 제국주의적 강대국인 프랑스와 에스빠냐가 이딸리아를 침범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58) 씨스띠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은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최초의 근대 작품이며 (중략) 이 작품은 보띠첼리나 뻬루지노가 같은 장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이상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껠란젤로 자신이 일찍이 그곳 천장그림을 그릴 때 추구했던 목적도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예배당 전체의 존재이유이자 르네쌍스의 모든 조형 예술의 근원이었던 바로 그 미의 이념들까지도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162) 그러니까 마끼야벨리는 그가 살던 시대의 대표자이자 대변자였을 따름이다. 만약 그의 이론이 영리하고 비정한 한 철학자의 기발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모든 도덕적 인간의 양심을 그처럼 뒤흔들 만큼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딸리아의 군소 독재자들의 정치적 방법에만 관계되는 일이었다면 그의 저서는 이러한 폭군들의 비도덕적 작태에 대한 당시의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들 이상의 흥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164) 마끼야 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의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의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과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품?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170) 매너리즘은 뜨렌또 종교회의 시기에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가장 활발한 예술형식이기는 했지만, 반종교 개혁운동의 예술적 임무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방향은 결코 되지 못했다. 매너리즘이 바로끄에 배턴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매너리즘이 반종교 개혁운동이 제시한 교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낼 능력이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3. 기사도의 두 번째 패배>

(197) 세르반데스에게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확연이 그어지지 않는 점 등 말고도 매너리즘의 다른 여러 특징들, 예컨대 비극의 바닥에 깔린 희극, 희극적인 것에 담긴 비극적인 것,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고상하게 보이는 주인공의 이중성격 등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8) 세르반떼스와 셰익스피어는 거의 동시대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나이는 같지 않지만 같은 해에 죽었다. 이 두 작가의 세계관이나 예술의욕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두 사람 모두가 기사도는 시대착오적어며 퇴폐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8)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문학적 소양은 귀족이면 누가나 따라야할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문학이 대유행과 같은 것이어서 문학에 관해 이야기 하고 문학적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것이 점잖은 체면에 맞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일상 대화에서도 우행하고 있는 문학의 기교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212) 아무튼 셰익스피어는 거의 모든 사회계층을 망라하는 각양각색의 광범위한 관객을 대상으로 해서 그들로부터 완전한 호응을 얻은 연극 사상 유일한 극작가까지는 아닐지는 몰라도 최초의 위대한 극작가였다. 그리스 비극은 너무 복잡한 현상이요 그에 대한 관객의 관심도 너무 복합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객에게 미친 본래의 미적 양향을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다.

(222) 지난날의 셰익스피어 연구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모든 표현수단을 충분한 고려와 신중한 검토 끝에 예술적으로 규정된 해결책으로 간주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작중인물들의 모든 성격적 특성을 내적인 심리적 동기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인물들은 셰익스피어가 근거로 삼은 원전에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작가가 더 이상 붙들고 씨름 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가장 간단하고 편리하며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원용한 이었다.

<제 3장 바로끄>

<1. 바로끄의 개념>

(233) 하나의 미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 유럽에 골고루 퍼져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끄는 본질적으로 좀 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234) 고딕 이래로 예술적 양식의 구조는 점차 더 복잡해져왔다.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사이에 점점 더 긴장이 커지고 이에 따라 예술의 상이한 요소들도 점점 더 이질적인 형식을 띠게 되었다. 바로끄 이전까지는 그래도 한 세대의 예술적 의지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 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 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정할 수 있었지만, 바로끄 시대에 와서는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통일적 성격을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적이고, 분석적이자 종합적인 것이다.

(238) 바꾸어 말하면 바로크 예술은 ‘영화적’이다. 즉 여기 묘사된 과정들은 슬쩍 엿듣고 몰래 엿본 것처럼 보이고, 보는 사람을 고려했을 성싶은 일체의 흔적은 지워져 있으며, 모든 것은 마치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제시되어 있다. 묘사가 비교적 명확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즉흥성과 관련되어 있다

(241)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 즉 사회적·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정점’이 되고 여기서 새로운 전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양식의 변화는 오로지 외부적인 사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체 내의 시한을 지닌 것은 아닌 것이다.

(244) 심지어 일상생활을 그린 홀란드의 화가의 평정 뒤에서도 우리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무한성과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유한한 것의 위태로운 조화를 느낀다. 이러한 것이 바로끄 예술의 한 통일적 특징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하나의 공통된 특징만으로 바로끄 양식의 통일성을 말할 수 있을까? 고딕을 단순히 중세의 정신주의에서 추출하려는 시도가 그러하였듯이, 바로끄를 이러한 무한성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정의하려는 노력 역시 부질없는 일은 아닐는지?

<2. 궁정적·카톨릭적 바로끄>

(250) 매너리즘이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현세 부정적이어야만 했던 데 비해, 바로끄는 좀더 자유롭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경쟁은 이제 끝 났다. 카톨릭 교회는 이미 잃어버린 영역은 포기했고, 남은 영역 내에서는 그런대로 안정감을 누렸다. 이 때부터 로마에서는 극도로 풍부하고 사치스러우며 낭비적인 예술생산의 한 시기가 시작된다.

(251) 1620년경에는 바로끄가 로마에 완전히 지배적인 양식이 된다.

(261) 정부는 예술가와 감상자층이 개인적 관계를 해체하고 이를 직접 국가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정부는 개인적인 패트런 제도나 예술가와 작가의 개인적 관심 및 노력을 장려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예술가와 시인은 오로지 국가에만 봉사해야 했고, 아카데미는 이를 위해 교육하고 감독했다.

(268) 이 두 파의 상호대립, 아카데믹하고 공식적인 예술과 비공식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의대립, 추상적이고 계획적으로 제시된 예술이론과 생동적이고 실 천속에서 발전하는 예술이론 사이의 대립이야말로 바로끄와 그 후의 예술양식에 독자적인 현대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275) 쌀롱은 상이한 계층의 예술전문가나 예술애호가들을 그들 써클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예술감상자층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쌀롱에는 아직도 물론 다수를 차지하였던 세습귀족 이외에도 관료귀족 그리고 이때 이미 예술계에서 한 몫을 하게 되는 부르즈와지들이 그 구성원으로 함께 모여들었다.

<3. 시민적·개신교적 바로끄>

(278) 예술사의 어느 시기를 두고 보더라도 발전의 사회학적 분석이 여기에서만큼 많은 시사점을 던져두는 시기도 없는데, 그 까닭은 이곳에서는 본질적으로 상아한 두 개의 예술경향, 즉 플랑드르의 바로끄와 네덜란드의 바로끄가 시간적으로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지리적으로도 완전히 인접한 상태에서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상황만 빼고는 매우 비슷한 조건하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비 사회학적인 현실요인들을 배제하고 분석할 수 있는 양식분화 현상은 그러니까 예술사회학의 교과서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300) 권위주의적 사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완전히 편안한 것이 못된다. 전자가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아무튼 17세기는 자유와 안전의 결합이라는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세기였다.

4. 내가 작가라면

페이지가 적은 책이라고 쉽게 넘어갈줄 알았다. 막상 첫장을 넘기자 마자 첩첩산중이다. 문학과 예술의 기본 밑바탕 없이 얄팍한 지식 몇개 가지고 사회사까지 보아야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두번째는 웰 듀란트의 역사속의 영웅들에서 읽었던 중세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 보았다. 다시 읽는 책도 생소한 부분이 많이 나왔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많이 답답하였고, 그리에 대한 설명 부분도 벽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미학에서 잠깐 훔쳐본 내용도 다시 생각이 났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길어서 흐름을 자주 놓치게 되었다. 컬처코드와는 완전 대비되는 내용이었고, 사례없는 설명이 많아 힘들게 읽었다. 장파가 동양과 서양의 미학에서 말한대로 감상자와 작품의 쌍방향 교류가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질 못하다. 편협하고 큰 줄기만 배운 교육탓도 있지만, 예술 자체를 보는 중요도가 한참 떨어지는 것도 문제인것 같다. 몇년전에 루브르 박물관에 가본 적이있다. 거대한 박물관을 걸어다니는 것도 피곤이지만, 각양각색의 그림들 속에서 교과서나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그림도 많은 감흥을 갖지 못하였다. 감상자인 내가 그만큼 덜 감성적이 되어서 그런가.

문장은 길었지만 세개의 소주제를 가지고 한권을 구성하고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의 관점으로 돌아본 중세 이후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어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또한 중간 중간에 나오는 거장들의 그림과 사회적인 배경 설명도 어느정도 이해가 쉽게 되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있다면 나머지 3권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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