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정산
  • 조회 수 274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6월 16일 11시 57분 등록
백범일지 - 김구/도진순 주해/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나의 소원』에 나오는 김구를 대표하는 문장이다. 김구는 빈한한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 독서를 통해 살아가야 할 방도를 깨우친 사람이다. 평생 동안 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면서, 자신이 깨우친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용기를 보여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김구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 분의 큰 스승이 계셨다.
유학자 고능선(高能善) 선생, 어머님, 그리고 독서이다. 그 중에서도 20세, 한창 배울 나이에 고능선 선생을 만난 건 김구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懸崖撤手丈夫兒)

김구가 고선생의 이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그 같은 사건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게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김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인생이 펼쳐지니, 이 가르침은 독립운동가 김구를 만든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김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 고능선 선생이 갖는 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평생 동안 만나는 사람들,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백범일지를 통해 본 김구 선생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솔직함이다. 숨기고 싶을 법한 자신의 실수나 과오를, 당시의 심리 상태까지 세심하게 기술하는 모습에서 후손들에게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교육자,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김구 선생 약력 >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 김씨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1887년(12세) 집안 어른이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아버지가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다가 글방을 차려줘 공부를 시작함.
1892년(17세) 임진년 경과(慶科)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 폐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麻衣相書)로 관상공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1895년(20세)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進士)에게 몸을 의탁함.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가르침을 받음.
1896년(21세)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임.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됨. 옥중에서 장티프스에 걸림. 자살을 기도하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 10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 고종은 판결 보류. 김창수는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
1898년(23세) 양력 3월 백범 탈옥. 대신에 부모님이 투옥됨.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하였으며 늦가을 마곡사(麻谷寺)에서 중이 됨. 법명은 원종(圓宗).

1900년(25세) 11월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감. 도중 고능선 선생 찾아 뵙고 논쟁, 세대가 다른 것을 느낌.
1904년(29세) 12월 최준례와 결혼. 최준례 경신여학교에 입학
1906년(31세) 장련에 광진(光進)학교 세움. 종산의 서명의숙(西明義塾) 교사.
1909년(34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 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을 전개함.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

1911년(36세)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7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1912년(37세) 일왕 명치(明治)가 죽어 15년에서 7년으로 감형. 다시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이름 구(龜)를 구(九)로,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고침.
1914년(39세) 인천 감옥 이감(죄수번호 55번). 매일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됨. 투신자살을 결심하나 곧 마음을 고쳐 열심히 일해 상 까지 받음.

1919년(44세) 3.1운동으로 안악에서 만세운동. 3월 29일 평양, 신의주를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이 됨.
1926년(51세) 백범, 국무령에 선출됨.
1928년(53세)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1년 2개월 만에 탈고(1929년 5월, 54세)
1932년(57세)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일본 히로이토에게 수류탄 던졌으나 실패.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대장 등을 즉사케 함. 윤봉길 의거 직후 신변의 위험을 느껴 피신. 상해에서 항주로 옮김.

1932년(58세) 장개석과 면담 결과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한인 특별반) 설치.
1941년(66세)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임시정부 승인요청,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국 외교총장. 『백범일지』 하권 집필 시작. 12월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5년(70세) 3월 장남 인(28세), 부인과 딸을 남기고 사망. 7월 협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 설치. 미군과 연합작전 추진. 8월 15일 일본 항복. 11월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임시정부 국무위원,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

1946년(71세)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됨.
1947년(72세)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 전개.
1948년(73세)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1949년(74세)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7월 5일 국민장 거행. 효창원에 안장.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14]

「나의 소원」은... 다시 말하면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 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를 성벽으로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15]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 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이월 십오일(1947. 11. 15) 개천절날.[15]

상권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29]

당시 나는 국문을 배워 이야기책 정도는 볼 줄 알았고, 한문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천자문은 배웠다. 하루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몇해 전 집안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는데, 그 집 할아버지가 새 사돈을 만나려고 서울 갔던 길에 사 두었던 총대우(말의 갈기로 만든 갓)를 밤중에 쓰고 나가셨다가 이웃 동네 양반에게 발각되어 관을 찟기고, 다시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힘써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으냐...”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이때 내 나이 열두 살(1887년) 이었다.[30]

나는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해 아버님은 무척 고민하셨다... 아버님은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免費學童)이 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34]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했다.[37]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 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39]

장수가 될 훌륭한 재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 있게 낭송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나는 1년간 일가 아이들을 모아 훈장질하면서 의미도 잘 모르는 병서만 읽었다.[40]

“이용선은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만일 이용선이 죽을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얼마 후 동네 어귀에서 총소리가 났다... 즉각 동네 어귀로 달려가 보니 과연 이용선은 총에 맞아 죽었고, 입은 옷이 전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내가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 내가 눈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호곡하는 것을 본 이웃사람들이 의복을 갖다 주었다.[53]

(안)중근은 영기(英氣)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57]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61]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 아닌가?”<고능선 선생>[62]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懸崖撤手丈夫兒)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64]

함경도의 교육제도는 양서지방(평안․황해도)보다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서 게딱지만한 집을 짓고 살더라도 서재는 반드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그 외 동네에는 도청(都廳)이 있었다. 도청은 동네 공용가옥으로 비교적 크고 화려하게 지어, 그 집에 모여 놀기도 하고, 이야기책도 보고, 짚신도 삼곤 했다. 동네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여 도청에서 자고 쉬게 했고, 무전객(無錢客)이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 도청의 공금(公穀)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규례가 있었다. 또 오락기구로는 북․장구․꽹가리․퉁소 등을 비치하여 두고, 동네사람들이 종종 모여 즐기기도 하고 손님을 위로하기도 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70]

심신이 자못 혼란한 상태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광선이 가슴 속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것은 바로 후조(後凋)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 주신 교훈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과격한 행동을 한 뒤라서 한 두 그릇쯤은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곱 그릇까지 먹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애시당초 일곱 그릇을 더 요구한 것이 거짓말로 알려져서는 재미없는 일이라 큰 양푼 한 개를 청하여 밥과 반찬을 한 군데에다 붓고 숟가락 한 개를 더 청하였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 들고서 밥 한 덩이가 사발통만큼씩 되게 밥을 떠먹었다.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97]ㅎㅎㅎ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法司)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100]

감옥 안이 극히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프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忠)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昌學)이와 놀았다. 고시(古詩)에 “고향이 눈앞에 늘 아른거리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흔히 먼저 가 있도다.”라 하였는데, 실로 헛말이 아니었다.[106]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臣民)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白日靑天)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蒙白,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국상을 당해 소복을 입음)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법정에서, 감리사 이재정에게 말하다>[108]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布告)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그때부터 나는 감옥 안의 왕이 되었다.[110]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공자 논어)” 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신서적을 보고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洋學)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15]

하루는 『황성신문』을 읽어보니, 경성, 대구, 평양, 인천에서 아무 날 강도 누구누구, 살인 누구누구 등과 함께 인천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누구나 그런 기사를 본 다음에는 일부러라도 태연자약한 태도를 가지려고 하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도되지 않았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半日)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그것은 고선생 말씀 중에 박태보(朴泰輔)의 보습 단근질 일화가 있었는데, 그는 보습으로 단근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일화와 더불어 삼학사(三學士)에 관한 이야기를 힘있게 들었는데, 그 효험으로 안다.[118]

그 때 입시(入侍)하였던 승지(承旨) 중 한 사람이 각 죄수의 공건을 뒤적이며 보던 중, ‘국모보수’(國母報讐) 넉자가 눈에 띄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裁可)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꺼내 임금께 보여드렸다. 그 내용을 보신 대군주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아직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하셨다 한다.[120]

동료 죄수들은 나를 보고 참말 이인(異人)이라며 경탄하였다. 사형을 당할 날인데도 평소와 똑같이 말하고 밥 먹고 행동하였으니, 이는 필시 선견지명이 있어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관리들 중에서도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122]

김경득은 서울로 가서 당시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대감이 책임 있게 김창수의 충의를 표창하고, 조속히 방면하도록 하여야 옳지 않겠소? 폐하께 비밀히 주창이라도 하여 장래에 허다한 충의지사가 생기도록 함이 대감의 직책이 아니겠소?”
한규설도 속으로는 그 말에 경복(敬服)하였다.[124]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국법에 범죄행위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행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왜놈에게 죽든지, 충의를 몰라주는 조선 관리들에게 죄인으로 몰려 죽든지 한이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脫獄)하기로 결심 하였다.[128]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그 선생은 사과하고 내력을 물었다.
“나는 경성 사는 누구인데 인천에 볼일이 있어 가던 차, 돌아오는 길에 벼리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장을 다 빼앗겼소. 집으로 가는 길에 날도 저물고 주리기도 하여 예절을 아실 만한 선생을 찾아왔소.” 선생은 함께 있는 것을 승낙하고 토론으로 하룻밤을 지냈다.[137]

새삼 내가 퍽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먼저 탈옥해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의 애걸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중의 험지로 다시 들어가 위험지대를 다 면케 해준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빈손으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금전상 해를 입게 될까 봐 거절하는구나. 그 사람의 그 행실인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돌아와서 다시 그 집에 가지 않았다.[139]

대개의 노동자들에게 조직이 있어, 논 주인이 일꾼을 고용할 때는 그 지방 조직의 우두머리(有司 : 廳首)와 교섭하여 일꾼을 결정하게 된다. 일꾼을 결정할 때, 미리 의복, 품삯, 휴식, 질병 등에 대한 조건을 정하고, 실제 감독은 그 우두머리가 맡아 한다. 만일 일꾼이 태만하여도 논 주인이 마음대로 책벌하지 못하고 우두머리에게 고발하여 징계한다.<삼남 견문록>[149]

은사 하은당이 내 승명(僧名)을 원종(圓宗)이라 명명하여 불전에 고하였다.[154]

용담도 하은당의 가풍(家風)이 괴상한 것을 알고서 글을 가르치다가 종종 위로를 하였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생각하지 말라. 어떤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참을 인’(忍) 자의 해석을 하여 주었다.[156]

나는 매일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 올랐다. 승복을 입은 채 드러내 놓고 고기를 먹었고, 염불하는 대신 시(時)를 외웠다.... 불가에서 소위 말하는,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왼다”는 구절과 가깝게 되었으니, 평양성에서는 시쳇말로 걸시승(乞詩僧)이라 하였다.[161]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165]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맹자> 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71]

고선생은 제천(堤川) 동문의 집에서 객사 하였다 한다.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口傳心授)하시던 훈육(訓育)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180]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斷指)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터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살을 썰어만 놓고 떼어내지도 못해 다리는 고통이 심했지만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었다.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살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182]

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184]

호가호위(狐假虎威) :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말로,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리는 것을 비유한 것. 출전은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
구우일모(九牛一毛) :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한 가닥의 털. 매우 발견하기 드물고 귀한 경우를 말한다.
목불식정(目不識丁) : 일자무식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192]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196]

나는 깜짝 놀랐다. 이(재명)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214]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우면서 이면에서는... 당시 400여 명 정수분자로 조직된 단체, 즉 신민회를 훈련․지도하였다.[215]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高後凋, 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세번째 투옥과 고문>[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김구를 심문하는 자)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亡國奴)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의 제자로서 형사가 된 김홍식(金弘植)과, 같은 학교 직원으로 있던 원인상(元仁常) 등부터 밀고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탐정까지도 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17년전 살인사건, 일경 와타나베의 X광선 시험 통과 후>[225]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酷刑)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그 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228]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 들여주랴?”...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246, 247]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뭉우리돌’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 호적을 말함)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267]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출옥 후>[273]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 하였더냐?” 나는 무조건 대죄(待罪)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275]

“이미 준비가 완성되었으니 함께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 고 하였다.
“선생님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선창합니까?”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하고 돌려보냈다.[283]

나는 안씨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종전에 본국에 있을 때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순사 시험과목을 혼자 시험쳐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스스로의 경험과,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85]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290]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1929년, 54세)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임시정부 청사에서.[291]

하권(임시정부 청사에서 67세(1942년) 때 집필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弱冠)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耳順)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녀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己未年: 1919)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孤城落日)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鐵血男兒)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29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 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 공사를 할 때 -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98]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정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이다.
이승만을 총리로 임명하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법무, 교통 등의 부서가 조직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상해에 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301]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307]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309]

다른 위원들은 거의 식구들과 함께 거처하였다. 그러나 나는 민국 6년(1924년)에 처를 잃었고, 7년에는 모친께서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그후 상해에서 나 혼자 인을 데리고 지냈는데, 모친의 명령에 의하여 인이 마저 본국으로 보냈다.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形影相從) 살면서, 잠은 정청(政廳)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317]

원년(1919년)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열렬하던 독립운동자 가운데 하나 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자들은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독립신문사 주필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을 위시하여, 점차 그 수가 늘어났다.
또한 처음에는 열성으로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청년들도, 점점 경제난으로 인하여 취직하거나 행상에 종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때 상해 우리 독립운동자의 수가 천여 명이었던 것이, 차차 줄어들어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최고기관인 임시정부의 현상을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318]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시무할 때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푸르고 코큰 영․불․미 친구들도 더러 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제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공무국의 불란서 경찰이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 외에는 없었다.[319]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 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이봉창 의사>[325]

이 거사로 인하여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이 대단하였다. 동경 사건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민족혼을 떨친 터에, 이번 홍구 사건(윤봉길 투척 사건)이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나에 대한 후원은 급격하게 증가하여, 점차 사업이 확장되는 단계로 나가게 되었다.[341]

농가에 묵으면서 농기구를 자세히 조사하고 사용법을 보니 우리나라 농기구에 비하여 비록 구식이라도 퍽 진보된 것같이 보였다....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당․송․원․명․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冠蓋使節)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 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幻想)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朱憙)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老朽)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정주(程朱)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52, 353]

장소는 낙양분교(洛陽分校)로 하고, 학교 발전에 따라 자금을 지원한다는 약속하에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356]
낙양군교 한인 학생은 겨우 1기를 졸업한 후 다시 수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한인 군관 양성은 이로써 종막을 고하였다.[359]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類似夫婦)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362]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영업자들을 제외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363]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년 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경과 사실의 모년 모일을 기입한 것은 본국에 계신 모친께 편지를 올려 답장을 받아 기입하였으나, 지금 하편을 쓰는 때에도 어머님이 곧 생존하셨더라면 도움이 많았을 터이건만, 슬프도다![365]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獻壽) 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367]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上帝)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韓奸)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종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뿐이었다.[371]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遂安)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387]

우리는 미주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금액 중 비상준비의 목적으로 저축한 4만 원을 전부 내어 제일 화려한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때 중국 중앙정부 요인들, 각 사회단체 간부들, 각국 대사․공사들을 전부 초청하였다.... 중국에서 개최한 외국인 연회로서는 굴지의 대성황을 이루어 내외의 인기가 비등하였다. 또한 연합국의 신문기자들이 참석하여 광복군 소식은 각국에 널리 선전되었다.[393]

제 2지대장 이범석... 제1지대는 중경 남안에 설치하니 대원이 50명 미만이고, 제2지대는 섬서성 서안 남부 두곡(杜曲)에 설치하니 대원이 200여 명이요, 제3지대는 안휘성 부양에 설치하니 대원이 300여 명이었다.[394]

그중 중요한 일화는 한 청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장준하, 탈출 청년 환영회>[395]

“왜적이 항복한답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399]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 안중근의 아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408]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를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409]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주련)도 변치 않고 나를 맞아준다. 48년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却來觀世間)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猶如夢中事) 라고 되어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412]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423]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425]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 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426]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은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427]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427]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428]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428]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더 많다.[429]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囂囂)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429]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430]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남의 나라에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430]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431]

홍익인가(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431]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433]



3.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를 읽으며 인상 깊은 점은 김구 선생의 『실행력』과 그를 받쳐주는 『용기』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懸崖撤手丈夫兒)』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64]

김구의 『실행력』이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은 김구에게 큰 행운이었다. 제자의 장단점을 잘 간파한 고능선 선생은 제자에게 일생의 지표가 되는 가르침을 준다. 이 가르침으로 김구의 인생이 변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가 변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변한 것이다.

훌륭한 가르침은 이렇듯 성공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그런데 훌륭한 가르침을 준 스승이 고능선 선생 뿐이었겠나? 세상에 훌륭한 가르침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는 훌륭한 가르침을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승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의 마음가짐과 자세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얼마나 소중히 마음에 품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그 가르침이 살아 숨쉬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가르침이 될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는 책 속의 얘기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용기』는 유교의 인의(仁義) 사상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부분도 역시 고능선 선생으로부터 영향 받은 바 크다. 그리고 김구는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강화해 나간다. 그래서 갖추게 된 "자신이 바르고 떳떳하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는 철학은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원천이 된다.

김구 선생은 머리가 뛰어난 인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배운 바를 가슴으로 새기고 자신에 체화(體化) 함으로써 나타나는 실행력과 용기를 가지고 험난했던 우리나라 근세사를 살아오신 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선생이 제시하신 우리나라의 비전은 문화 강국이다.
인류가 앞으로 잘 살아가는 방법은 문화의 힘을 배양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라 가르치신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431]

백범일지를 쓴지 60년이 지났지만, 김구 선생의 비전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가 김구 선생의 가르침대로 남에게, 다른 나라에 행복을 주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고능선 선생>[62]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法司)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100]

신서적을 보고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洋學)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15]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살을 썰어만 놓고 떼어내지도 못해 다리는 고통이 심했지만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었다.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살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182]

홍익인가(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431]
IP *.97.37.24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