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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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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3일 10시 43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그는 왜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니체에 꽂힌 것일까? 변경연의 연구원들이 모두 구본형 선생님에게 꽂힌 이유와 같은 것일가? 간단한 자료 검색을 통해서도 그가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니체" 전문가로 알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 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저자소개 중에서>

그의 이력 중 특이한 것이 눈에 띤다. 그는 화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화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는 아마도 그의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에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현실에서 그것들을 몰아내기 위해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다. 그가 학부에서 배운 화학으로는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항상 분노에 가득 차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일상에서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한다. 썰렁한 유머를 즐겨하지만, 다른 이의 썰렁한 유머를 큰 웃음으로 받아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인 듯하다. 이것이 또 그를 사회학자의 길을 걷도록 만든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이 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책머리에

4)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이나 시대 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7)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청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질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8)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잘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21)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제1부.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27)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도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27)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30)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3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31)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36)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를 잡았을 때, 그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실레노스가 마지못해 답했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너는 내게서 무엇을 들으려 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네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죽어 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비극적인 인식인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고, 태어났으면 바로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

37)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39)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은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41)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42)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3) "오, 크리토! 인생은 질병이다."

43)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햇다.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

45)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45) 니체는 플라톤의 동굴에 대해 확실히 비판적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과 차라투스르라의 동굴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냐는 점에서도 그렇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철학자는 동굴 바끝에서 참다운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 동굴로 돌아오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속에서 깨달은 풍요로움 지혜들을 나누기 위해 동굴 바깥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동굴이 무지의 장소이고 철학자의 눈을 멀게한 장소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깨달음의 장소이고, 치료와 회복의 장소이며, 초인으로의 변신이 일어나는 장소다.

47) 관객들은 연출자나 감독들이 적당히 숨겨놓은 구조를 발견하고는 마치 제 것이나 되는 양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더구나 극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47) 극장에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에 놓고 간다.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49)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 삶의 방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50)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할 것이다."

51) 항상 사상가를 뒤쫓는 사상가, 다른 사람에 관한 사상가,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51)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1) "새로운 사싱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3) 광신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53)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55)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56)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7)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60) 도덕은 사물과 행동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61)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63)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3)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64)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68) 화폐란 도덕적 판단처럼 가치의 표시이다.

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70) 볼테르든 루소든 니체가 볼 때 문제는 도덕화 자체다. "인간(과 자연)의 도덕화, 그것이 바로 문제다."

72) 니체는 소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75)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75) 지금 미덕들로 숭상되고 있는 가치들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79) 강자들, 귀족들의 행복한 미소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고통을 정당화해 줄 독특한 해석학

80)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80) 자신이 자신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불합리하다. 억제하는 자신과 억제되는 자신이라는 분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84)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84)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85)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86)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활에 사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생활을 꼼꼼하게 계획하고, 계획표대로만 생활한다. "완전한 자기 망각, 단호히 고정된 생활 양식, 완전히 짜여진 시간, 그리고 그것을 위한 훈련."

86) 도덕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동물원이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90) 악으로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1)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95)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애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103) 하버마스는 우발적이거나 가변적일 수 있는 대중적 욕망이 초래하는 불안정보다는 합리적 대표자들이 권리를 위임받아 토론을 벌일 때 안정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 진리에게 있어 넘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은 왜 동일한가?

104)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105) 활동과 분리되지 않는 활동 주체는 결국 활동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성만큼이나 많아지는 것이다.

107)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전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108) "만약 내가 포유동물의 정의를 하고 나서 낙타 한 마리를 본 뒤에 '봐라, 포유동물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진리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다."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16) 그녀(코프만)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118)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125) '근대 정치 비판'에서 비판이라는 말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정치라기보다는 정치의 상실, 즉 근대성이다.

125) 보편적 진리를 축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127) 국가는 근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128) 국가의 원형이 군사적 수호신을 생산하기 위한 무의식적 활동에 있다는 것을 직관을 통해 간파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132) 니체는 "철학자들이 종래 생각해 온 바의 개인, 즉 '단일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오류이며, 개인은 개별의 실체, 하나의 원자, 사슬 안의 고리, 그냥 과거로부터 내려온 존재 등이 아니며, 개인은 그에게까지 이르는, 그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135) 자유는 체제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강조하는 자유에는 경찰들이 그어놓은 청색 선이 있다.

142) 니체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147) 그리스인들은 동시대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선조들과도 경쟁했다.

152)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 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기(1)

153) "'의지'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자신 안에서' 경험할 수 있고, '권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하여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자명한 것 안에 모든 오해들의 뿌리가 존재하며 이러한 오해들은 '권력의지'라는 합성어 주위에 끊임없이 쌓이게 된다."

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154) '무'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155) 원자론은 신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155)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

163) 과학사를 통해 볼 때 자연학은 항상 자연을 필연적인 '법칙'아래 두려고 했으며, 절대적인 체계, 하나의 이데아를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자연을 차라리 "자연의 바깥에, 즉 영혼이나 주체에 위치시켰던 것이다."

165)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167)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1)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이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171)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173)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 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das Nein)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das Ja)를 가르친다.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기(2)

185)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 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시간 에온(Aeon)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

186) 학자들 중에도 동일한 사건의 반복으로서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대부분 "손실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무한한 시간'의 좌표축에 위치시킨 후 영원회귀를 이해하려는 데서 나오는 오해다.

187) 시간의 무한성과 조합하는 수의 유한성은 결코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니다.

191) 영원회귀를 하나의 과학적인 법칙으로서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영원회귀가 의지의 문제,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문제라는 점이다.

191) 부정의 권력의지는 "의지를 갖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의지나 삶은 형벌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192) 살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하는 것은 부정이다.

제7장. 인간

210) 지구는 반문한다. 내가 인간을 위해 준비된 혹성이라고? 하하! 인간이 지구의 대표라고? 그런 건 "숲 속의 개미가 자신이야말로 숲의 존재 목적이라고 단단히 믿는 것"과 같다. 혹시 인간은 "세계의 희극 배우"로 데뷔할 생각은 없는가?

222)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안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사람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6) 활동의 순간마차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 저자의 이름 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237) 오해와 착각이란 다른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신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름을 쓰는 데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237)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250)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제2부. 베버-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94)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도대체 이게 뭔책이냐, 처음엔 조금 읽을 만 하다가 어디선가 그 맥을 놓쳐버리고나니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억지로 정신을 다시 책안으로 불러다 앉히며 어르고 달래 어찌어찌 끝까지 가긴 했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또 다시 하나의 벽을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중의 하나는 '이번에 북리뷰를 쓸 수 있을까'였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금새 길을 잃고 헤매이기를 반복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머릿속이 텅 빈 듯했고, 내가 줄을 쳐 놓은 곳을 다시 읽어도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북리뷰를 쓰기위해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앞길이 막막했다.

이 책이 니체의 책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니체와의 첫 만남이다. 가끔씩 읽던 책들에서 짧은 인용구로 만나왔던 그였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그의 세계에 대한 통찰과 내공에 적잖이 놀랬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는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면 저자는 확실히 알려주고 있으나, 나의 부족함으로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

예전에 니체를 스치듯이 만났을 때도 느꼈었던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바로 그는 천 개의 논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길들여진 눈과 길들여진 귀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듣는다. 또한 길들여진 두뇌로 생각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매번 같은 길일 뿐이다.
니체를 읽는 것은 관습과 법에 의해 길들여진 두뇌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 첫 번째 싸움에는 나는 완전히 패했음을 인정한다. 그것도 아직 진짜 주인공을 상대로 한 싸움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붙어볼 만한 상대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 고병권의 글은 이상하다. 수많은 인용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읽다보면 그것이 저자의 말인지 니체의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니체가 그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인지 그가 니체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의 의도일까? 아니면 너무나도 니체에 빠진 저자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닮아 버린 것일까?

1부, 2부로 구성된 책에서 2부의 역할을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책의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내용면에서나 분량 면에서 볼 때도 이런 식의 배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가슴 속에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안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책읽기를 마쳤다. 이 책에 대한 몇 편의 리뷰를 읽어보니, 다들 하는 말이 이 책은 난해한 니체를 이해하는데 훌륭한 가이드를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학에 대한 기반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 책 역시 어려운 책일 수 밖에 없다. 어려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오기로 꼭 한번 제대로 독파해보고 싶은 두 가지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 이상하고 묘한 책이다. 그것은 저자 고병권의 매력 때문일까? 니체의 매력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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