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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9일 22시 19분 등록


생일-장영희 쓰고 김점선 그림


● 저자에 대하여

장영희 교수를 말하려면 아무래도 몸에 대하여 먼저 말해야 될 것 같다. 장영희 교수는 한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을 짚고 다닌다. 생의 첫 순간부터 중증장애인이었다. 두 다리와 오른팔이 몹시 불편한 몸이다. 그런 몸으로 일반학교를 다니며 초중고교를 마쳤고 대학교와 석사까지 따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박사과정을 받아주지 않아 미국 뉴욕주립대학으로 전액장학금을 받는 유학을 떠난다.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힘든 유학생활을 견디며 박사학위를 받은뒤 귀국해 서강대에서 강사로 교단생활을 시작했다.
많은 시련을 거쳐 왔지만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1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방문교수로 있던 중 그는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이역만리에서 혼자 입원수속을 밟고 혼자 수술대위에 누웠다. 귀국 후 방사선 치료를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3년 뒤 암은 척추로 전이됐다.

“무서웠어요. 무척 슬프더군요. 마취담당 의사가 주사를 놓더니 ‘이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며 우리말로 숫자를 세줬어요. ‘한나, 뚜울, 쎄엣…’ 근데 그 발음이 너무 웃긴 거예요. 웃음이 터져 나와 혼났다니까. 아주 희극적인 상황이잖아요.”
“그것도 웃기잖아요. 한 번 된통 앓았으면 그 후부턴 조심했어야 하는데 몸 부실하게 놀린 거 하며, 유방암이 뼈로 전이될 확률이 10%라는데 하필이면 거기 걸려든 거 하며. 집에서 병원으로 장정 네 사람이 든 들것에 실려가면서 혼자 킥킥 웃었어요.”
미국에서 혼자 암수술 받던 때와 척추암으로 전이되었을 때를 떠올리며 하는 그의 말이다. 그는 그렇게 웃는다. 삶을 웃으며 산다. 절망에 휩싸인 것 같은 순간에 웃는 사람, 그가 장영희다.

척추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장영희 교수는 다시 교단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친다. 마지막 순간이 온다하더라도 제자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강의를 하면서 책을 번역 하고 책을 쓰는 집필 작업을 하는가하면 교과서 편찬도 맡고 있다.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늘 잊지 않고 살아왔기에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암이 재발하기 전 장영희 교수는 이런 글을 썼다. ‘삶의 요소요소마다 위험과 불행은 잠복해 있게 마련인데, 이에 맞서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그 싸움은 너무나 비장하고 슬프다. …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죄이다.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어둠의 감옥 속에 가두어버리는 자살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장영희 교수는 1952년 9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 대학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여성학사회(AAUW)에서 주는 국제여성지도자 연수자로 뽑혀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 교육부 검정 초·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월간 ‘샘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을 펴냈고 이 책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아버지 장왕록 교수의 추모 10주기를 기리며 기념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냈다. 한국 영어영문학회, 한국 미국소설학회, 한국 마크 트웨인 학회, 한국 헨리 제임스 학회, 번역학회, 세계비교문학학회 등의 학회활동을 했다.
저서로 ‘생일’ ‘축복’ ‘English Readings:Reading Skill Series’ ‘내 생애 단 한번’ ‘교육부 검정 Middle School English’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살아있는 갈대’ ‘슬픈 카페의 노래’ ‘이름 없는 너에게’ ‘큰 물고기’ ‘세상을 다 가져라’ ‘피터팬’ 등이 있다.

 

그림을 그린 김점선은 서양화가다. 그의 그림은 쌀 포대에도, 화장용 종이티슈 상자에도 들어간다. 글과 그림이 어디에 실리는지 따지지도 가리지도 않는다. 돈을 밝혀서가 아니라 권위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티슈 상자 바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수많은 오리를 그리고 수많은 말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더 많은 내면을 그리고... 그렇게 그리면서도 나는 분명 더 많이 그리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단호하게.

그는 난소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가락 발가락 마디가 못 견딜 정도로 저리고 아파서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도 노동 이었다. 그렇게 책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소원은 단순하다.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것. 천박해지지 않는 것. 여든까지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사는 것이 그것이다. “항암 결과가 어찌 나오건, 내 갈 길을 바꾸지는 못할 거야.”

그는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영감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영감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영감을 예술가의 영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한다. ‘화가는 영감을 얻은 후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년에 360일 그림을 그린다. 그가 생각하는 화가는 예술가가 아닌 육체노동자다.

김점선은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시청각 교육학과를 거쳐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가 대학원에 입학하던 1972년 여름 한국에서 처음 앙데팡당 전이 열렸다. 제8회 파리 피엔날레 참가자를 뽑기 위한 공모전이었는데, 주제는 극사실주의와 관념 예술이었다. 김점선은 관념 예술에 속하는 작품을 출품해 파리 비엔날레 참가 후보로 뽑혔다. 화려하게 화단에 등단했지만 곧 관념 미술에 염증을 느끼고 미련 없이 그 찬란한 무대에서 내려와 버렸다. 이후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쳐 나간다.
그후 그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아주 전통적인 그림들…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형상이 있는 그림들… 그림 속에 글씨도 썼다. 흑색과 백색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한국 화단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혹독한 비평과 찬사가 함께 쏟아졌다. 그는 한때 선교사 통역일을 하기도 하고 한때 영화도 만들었다. 1975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식에서는 식장 안으로 관을 들고 들어간 행위예술을 하기도 했다. 1987, 88년 연속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뽑혔고, 1983년 첫 개인전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개인전을 열고 있다.
‘나, 김점선’ ‘김점선 스타일’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김점선의 그림이 있는 노트’ ‘기쁨’ ‘숨은 신’ ‘앙괭이가 온다’ ‘큰엄마’ ‘10cm 예술’ 등의 책을 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여기 수록된 시들은 읽으면 단단한 껍질에 꽁꽁 싸여 있던 내 마음이 갑자기 속살을 드러낸 듯 속절없이 진한 아픔과 기쁨을 느끼고, 무채색인 내 세상에 무지개가 뜨듯 생경하면서도 황홀한 느낌이 들고, 잊혀진 꿈처럼 나도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란 게 있었구나 새삼 뻐근한 감동이 오고, 갑자기 이 혼잡하고 험한 세상에서 남에게 해 안 끼치고 꿋꿋이 살아있는 내 존재가 마냥 기특한 느낌이 들고, 문득 ‘이봐요, 여기 내가 있잖아요’ 하고 옆 사람 툭 치고 눈 맞추고 이야기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러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인은 바람에 색깔을 칠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거기에 있는데,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우리 대신 표현해주는 사람입니다. 정제된 감정을 집중하고, 고르고 골라 가장 순수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와 진실된 언어로 우리 대신 말해줍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머리가 완전히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시를 쓴다고 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목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면, 그것은 시를 쓰라는 신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순간적이라도 지독한 사랑을 느낄 때의 감정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말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 한 마디로 뭉뚱그려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정시인 새러 티즈데일은 말합니다. “나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심장입니다.” 즉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시인들의 고뇌와 사랑, 의지, 인내, 희망을 함께 나누며 언어와 정서,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결국 시는 우리 모두의 삶 자체라는 것, 시는 아프고 작은 것도 다 보듬어 안아서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시집 한 권을 읽는 따듯한 여유가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문학자가 아니라 저 역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제 개인적인 감상문을 짤막하게 달았을 뿐입니다.

내게 당신이 있습니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당신의 사랑이 쓰러지는 나를 일으킵니다. 내게 용기, 위로 소망을 주는 당신. 내가 나를 버려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당신. 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지, 나는 정말 당신과 함께 할 자격이 없는데, 내 옆에 당신을 두신 신에게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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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크리스티나 로제티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를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누군가 내게 불쑥 내미는 화려한 꽃다발 같은 시입니다. 진정한 생일은 이 지상에서 생명을 얻은 날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노래하는 시 ‘생일’. 글을 쓸 수 있기 이전에 시를 썼다는 크리스티나 로제티가 스물일곱 살 때 쓴 시입니다. 사랑에 빠진 시인의 마음은 환희와 자유의 상징인 새, 결실과 충만의 상징인 사과나무, 평화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고요한 바다와 같이 너무나 행복하고 가슴 벅차서, 스물일곱 나이가 까마득히 먼 꿈이 되어버린 내 마음까지 덩달아 사랑의 기대로 설렙니다.
내 육신의 생일은 9월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라는 ‘생일’을 읽으며, 나도 다시 한 번 태어나고픈 소망을 가져봅니다. 저 눈부신 태양을 사랑하고, 미풍 부는 하늘을 사랑하고, 나무와 꽃과 사람들을 한껏 사랑하고, 로제티처럼 ‘My love is come to me!’라고 온 세상에 고할 수 있는 아름다운 4월의 ‘생일’을 꿈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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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아이-앤 머로 린드버그

일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밥벌이를 하고 내일을 계획하려
근심스럽게 저녁 하늘을 훑어보고
걸을 때 서두르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이웃을 의심하고 가면을 쓰고
갑옷입고 행동하며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노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경이로워하며 울 줄도 알고
가면 없이 솔직하고 변명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아침마다 우리는 가면 쓰고 갑옷 입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갑니다. 내 안의 순수한 마음, 남을 믿는 마음,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억누르고 무관심과 무감각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삶이라는 커다란 용과 싸우러 나갑니다.
밥벌이를 위해 서둘러 걷고, 남을 의심하고 또 미워하고, 내가 한 발짝이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오늘의 싸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내일의 전투 계획을 짭니다.
오늘의 행복은 미래를 위해 접어두고, 가끔씩 왠지 사는 게 서글퍼져 눈물이 날라치면 매몰차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딱딱한 갑옷 입고 총알 쏟아지는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면없이 솔직하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사랑하기 좋아하는 내 안의 아이는 참 살기가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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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미소와 외모와 부드러운 말씨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 연민으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마음으로도 사랑하지 마세요.
당신 위로 오래 받으면 우는 걸 잊고
그래서 당신 사랑까지 잃으면 어떡해요.
그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측은한 마음이나 연민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도 붙지 않는 사랑,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달라는 시인-영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로맨스의 주인공 입니다. 장애인이자 시한부 인생이었던 엘리자베스 배릿이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여섯 살 연하 젊은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이며 쓴 시입니다.
또 다른 유명한 시에서 “신이 허락하신다면 죽은 뒤에 당신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시인, 이승의 시간이 부족해서 죽은 뒤에까지 사랑하겠다는 시인에게 신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허락하셔서, 둘은 15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오직 사랑만을 위한 사랑’의 힘이 생명의 힘까지 북돋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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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늘의 천을 소망한다-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 놓인
하늘의 천이 있다면,
밤과 낮과 어스름으로 물들인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려만.
허나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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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장미-로번트 번스

오, 내 사랑은 6월에 갓 피어난
새빨간 장미 같아라.
오, 내 사랑은 곡조 따라
감미롭게 울리는 가락 같아라.

바다란 바다가 다 마를 때까지, 내 사랑아
바위가 태양에 녹아 없어질 때까지
오, 그대 영원히 사랑하리라, 내 사랑아
내게 생명이 있는 동안은.

“니들이 사랑을 알아?” 서울역에 잠깐 앉아 있는데 뒷좌석에서 부자인 듯한 두 사람이 사랑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여자 집 밖에서 창문 바라보며 열 시간 있어봤어? 찻집에서 오지 않는 그녀를 다섯 시간 기다려봤어?” “치, 그게 스토킹이지 무슨 사랑이에요.” “그녀 앞에선 내가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느껴지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바다가 마를 때까지, 바위가 태양에 녹아 없어질 때까지 그대를 사랑한다’는 시행은 우리 학생들 작문책에 과장법의 예로 나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과장법 아닌가요. 심장이 자꾸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고,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커 보이고, 이 세상이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고, 내 마음이 끝없이 커져 이 세상 모든 게 용서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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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없이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도로시 파커

우리 처음 만난 뒤 그가 보내준 한 송이 꽃
그인 참 알뜰하게도 사랑의 메신저 골랐네.
속 깊고, 순수하고,
향기롭게 이슬 머금은
정말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한데 왜일까요? 왜 내겐 아직 아무도
정말 아름다운 리무진 보내는 이 없을까요?
아, 아녜요. 고작 장미나 받는 게 내 운이죠.
정말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시인은 사랑이 감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사랑의 정표로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보다는 아름다운 리무진 한 대를 받고 싶다고 투정합니다. 독일 시인 릴케가 파리에서 지낼 때 이야기입니다. 산책길에 매일 동전을 구걸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릴케가 동전 대신 갖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건네자, 할머니는 릴케의 뺨에 키스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다시 나오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돈이 없어 할머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그러자 릴케가 답했습니다. “장미의 힘으로!” 제가 살아보니까 삶은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이지 결코 ‘둘 다’가 아닙니다. 사랑 담긴 장미 한 송이가 나을까요. 사랑 없는 리무진 한 대가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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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조지 고든 바이런

딱 한 번, 감히 내 눈을 들어,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어요.
그날 이후, 내 눈은 이 하늘아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요.

밤이 되어 잠을 자도 헛된 일
내게는 밤도 한낮이 되어
꿈일 수밖에 없는 일을 내 눈앞에
짓궂게 펼쳐 보이죠.

그 꿈은 비운의 꿈-수많은 창살이
당신과 나의 운명을 갈라놓지요.
내 열정은 깨어나 격렬하게 싸우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군요.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비가 입니다. 감히 이름조차 입에 올릴 수 없는 연인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멀어버린 시인의 절박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전쟁터같이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평화롭기만 해 보이니 시인의 좌절이 사랑하는 이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런 연시를 읽으면 불현듯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너무 보고 싶어 잠 못 이루고 무언가를 미칠 듯이 원했던 적이 언제였나요. 어쩔 수 없이 생활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버릇처럼 살아가다보니 사랑, 열정, 낭만은 이제 사치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도 오늘같이 하늘 파란 오후에는 마치 까마득히 먼 옛날 떠나온 고향처럼 마음소게 문득 그리움이 머리를 쳐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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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로버트 프로스트

이 숲이 누구 숲인지 알 것도 같다.
허나 그의 집은 마을에 있으니
내가 자기 숲에 눈 쌓이는 걸 보려고
여기 서 있음을 알지 못하리.
다른 소리라곤 스치고 지나는
바람소리와 솜털 같은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깜깜한 밤에 어딘가 다녀오던 시인은 문득 썰매를 멈춥니다. 눈 내리는 고요한 숲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눈송이들은 마치 부드러운 깃털처럼 내려와 쌓이고, 모든 것을 잊고 가만히 그 안에 드러누워 잠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을에는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로 살며 늘 숨이 턱에 차서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지만, 가끔씩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허전한 느낌입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남이 안 보는 데서 실컷 울고 싶습니다. 아니, 아예 영원히 잠들어버리면 너무나 편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귀한 생명 받고 태어남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용기있게 살아가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꽤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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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켄트 M. 키스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을 베풀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하다 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마더 테레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를 이의 글입니다. 하지만 누가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누가 뭐래도 꿋꿋이 내 갈 길을 가며 내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내놓아도 세상은 묵묵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세상도 내게 최상의 것을 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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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A. E. 하우스먼

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가 지금
가지마다 주렁주렁 꽃 매달고
숲속 승마도로 주변에 서 있네,
부활절 맞아 하얀 옷으로 단장하고.

이제 내 칠십 인생에서
스무 해는 다시 오지 않으리.
일흔 봄에서 스물을 빼면
고작해야 쉰 번이 남는구나.

만발한 꽃들을 바라보기에
쉰 번의 봄은 많은 게 아니니
나는 숲속으로 가리라
눈같이 활짝 핀 벚나무 보러.

피천득 선생님이 수필에 새색시가 시집와서 김장 서른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강단에 서서 신입생 서른 번만 맞이하면 학교를 떠나야 하는 노교수가 됩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갈수록 1년이 정말 눈 깜짝할 새입니다. 시 속의 화자는 그래서 칠십 평생에 이제 쉰 번의 봄만 볼 수 있다고 아쉬워합니다. 쉰 번의 봄이 많지 않다니, 그러면 채 스무 번도 안 남은 저는 어쩌란 말인지요.
꽃 피는 아름다운 봄을 영원히 볼 수는 없을진대, 너무 늦게, 이제야 그걸 깨닫습니다. 문득 이런 화창한 날에 내가 숨쉬며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감사합니다. 올 봄에 정말 꼭 꽃구경 한번 나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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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새러 티즈데일

나 죽어갈 때 말해주소서.
채찍처럼 살 속을 파고들어도
나 휘날리는 눈 사랑했다고.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노라고.
그 아픔을 기쁘고 착한
미소로 받아들이려 애썼다고.
심장이 찢어진다 해도
내 영혼 닿는 데까지 깊숙이
혼신을 다 바쳐 사랑했노라고.
삶을 삶 자체로 사랑하며
모든 것에 곡조 붙여
아이들처럼 노래했노라고.

시인은 기도합니다.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죽을 때 혼신을 다 바쳐 사랑하고 떠난다고 말할 수 있게 해달락.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삶 그 자체로 사랑하며 기쁘게 살다 간다고 깨닫게 해달라고.
나도 시인처럼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새삼 생각해봅니다. 때로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겁나는 일입니다. 휘날리는 눈은 맞으면 차가울까봐 사랑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장미는 가시에 찔릴까봐 사랑하지 못합니다. 버림받을까봐 사랑하지 못하고, 상처받을까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영부영 살아가다가 정작 떠나야 할 날이 올 때 사랑 한번 제대로 못하고 떠난다는 회한으로 너무 마음이 아프면 어떡하지요?


● 내가 저자라면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 ‘생일’은 세상에 흔하디흔하게 널려있는,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귀해진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2004년 저자 장영희 교수는 어느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끝내면서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빨리 입원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이상하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말처럼 마치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투병 시작을 알리는 글을 통해서도 다시 일어날 것을 담담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 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저자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긴 시간을 겪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그 지나온 삶이 평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뿐인가. 저자는 두 번의 암투병까지 하고 있다. 자신의 말처럼 ‘인생에서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하였고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더 자주 넘어졌’다. 그래도 그는 말한다.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거기에 덧붙여 그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그러한 마음 씀씀이의 결과로 이 책 ‘생일’이 나왔는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저자가 사랑을 말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저자는 보란 듯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외친다. 그 외침은 반항의 몸짓도 아니고, 서러움의 역설도 아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가득 찬 외침이다. 그래서 책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읽는 이들은 이 시집에서 긍정의 힘을 배우고 사랑의 메시지를 가슴에 채운다.

저자는 “고통을 겪으면서 삶의 가치를 더 느끼게 된다는 새러 티즈데일의 ‘연금술’이라는 시가 항상 마음의 위로가 됐다”고 말한다. 그 시는 이렇다.

I lift heart as spring lifts up
A yellow daisy to the rain;
My heart will be a lovely cup
Altho` it holds but pain.

For I shall learn from flower and leaf
That color every drop they hold,
To change the lifeless wine of grief
To living gold.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 자체로도 아름다운 책 ‘생일’을 한번 읽어보자. 오랜만에 웅얼거리면서 시 몇 편 읽어보고, 오랜만에 고개 들어 하늘도 한번 올려 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짊어진 짐이 정말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그래서 정말 내가 그토록 불행한 것인지.

- 저자는 ‘생일’에 이어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두 번째 권인 ‘축복’도 펴냈다. 희망에 관한 시와 글 50편이 실려 있는 책은 화가 김점선의 따뜻한 그림을 함께 담아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가을에 누가 나에게 시집 ‘축복’을 선물해주지 않으려는가. 내 그대에게 작은 가을과 따뜻한 밥 한 끼를 선물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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