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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23시 07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사학과를 전공했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이어서 동국대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 수많은 직업을 경험한다. 사회평론지인 ‘길’의 편집위원을 지냈고, EBS 문학기행어, CTN 문화산책, EBS 교양강좌, 방송대학 TV 우리시대 고전이야기 등의 프로그램에서 문화평론과 함께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강서대묘 사신도의 솟구치는 생기, 금동미륵반가상류상의 정겨운 봉안, 고려 수월관음의 휘황한 신비, 겸재 진경산수의 칼칼한 금수강산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 대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 같은 구별과 경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 안아 한국을 피워 올림으로써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였다.  [19]

반드시 백남준이거나 윤이상, 이응노여야 할 이유도 없다. 겸재나 박수근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장사꾼이면 어떻고, 평범한 시민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이 창조적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이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이 필요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25]

세계인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세계인 백남준의 예술이 한국인의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세계인이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인 그가, 동시에 거뜬히 순 한국인이자 전통적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27]

반복하자면,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32]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만일 백남준에게서 순한국인 백남준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토속적인 자기의 뿌리인 기억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이같은 일이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정말로 발생했다. [38]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로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 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42]

이같은 조급함의 한국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나 일본의 팽창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써 더한층 강렬하게 끓어오른, 관념적인 조급함이다. 비등점에 가깝도록 뜨거워진 관념적인 조급함의 열기야말로, ‘기차가 있는 풍경’의 안쪽에 자리잡은 지난 세 기 한국인의 내면 풍경이다. 이같은 조급함 속에는 서구적 근대 또는 일본적 근대의 다른 얼굴인 제국주의야말로 조선 사람을 불행에 빠뜨린 진정한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성찰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하여 ‘기차가 있는 풍경’의 종착역이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제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43]

취향이란 저마다의 몸속에 자리 잡은 나름의 척도인 까닭에 낯익은 취향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척도를 향해 침을 뱉고 낯선 취향 속에 들어 있는 타인의 척도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은 결국 저다움에 대한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이처럼 습득해야 할 낯선 취향과 청산해야 할 낯익은 취향의 쌍들의 들고남으로 온통 분주했다. 여기서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50]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예술을 소중하게 여긴 일본인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그의 ‘사랑’뒤에 숨은 ‘진실’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의 한국 예술론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의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사랑과 진실’이라는 연속극 제목처럼, 중요한 것은 한국 예술에 대한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 같은 사랑 뒤에 숨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59]

멍청하고 순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흙 묻고 지푸라기 묻은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의 산물로서, 제국 일본에 의해 조작된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자화상이다. 인격을 상실하고 ‘사물적인 격’을 지닌 존재에게 미의식 대신 무의식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야나기의 조선 예술론의 핵심이다.  [63]

그렇다면 정작 한국인의 미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야나기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런 것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미의식 대신 지적의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조선 도공들에게 그러한 지적 의식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니, 이러한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그릇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도는 태어난 기물이지 만들어진 기물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은 부여된 것이고, 은총이며 주어진 것이다. 자연에 순종하는 태도가 이러한 은총을 받은 것이다.  (야나기 무데요시.  「 ‘기자에몬 오이도’를 보다」)
한국 예술의 위대한 아름다움은 한국 예술 자체의 오롯한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인 일본인의 은밀한 영광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몫은 어디에도 없으며, 한국인에게는 단지 벌거벗은 임금님과도 같은 자기소외의 무의식이 주어질 따름이다.  [64]

타력의 존재인 조선 도공은 자신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없다. 조선의 도자기는 조선의 도공 앞에서는 아름다운 존재로 빛날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조선의 도자기를 아름다운 존재로 빛나게 해줄 구원의 두레박이 일본인으로부터 드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력의 일본인이 타력의 산물인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보호해 준다는 것. 이것은 제국의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알아보고 보호해 준다는, 저 흉악한 제국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는 가장 낮은 층에서 가장 높은 질을 찾는 이 같은 타력과 자력의 관계가 역사상 유례가 없다는 주장까지 덧붙인다.  [71]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마루야마 사사오.<일본 정치사상사연구>). 야나기식 말투에 따르면 마고코로란 ‘자연스러운 인정’과 같으며 카라고코로란 ‘이지를 위한 이지’라든가 ‘지적 근거’와 같다.
동북아시아 질서에 동참하는 ‘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기만을 고집한 결과, 카라고코로와 대립하는 마고코로를 내세운 일본의 국학. 이들이 카라고코로를 추종한다고 여겨지는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오로지 자민족 중심주의에 따라 재단하거나 폄하한 것은 필연적이다.  [77]

신이 마련한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랄까.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대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에게 있어 거세된 순종을 의미하는 무작위의 자연스러움과 달콤한 비애를 의미하는 모노노아와레는 하나인 것이며, 따라서 조선 예술론의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도 하나인 것이다. 신을 정점으로 해서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로 이어지는 은총과 순종의 함수관계, 이같은 일본 국학의 핵심을 토대로 하여 피어오르는 미가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인데, 야나기는 이같은 위계질서의 끄트머리에 한국인과 한국 예술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85]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90]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그것이 저고리 깃이나 버선 같은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된 것은 이 같은 과학적 노력에 더하여 주변의 산세 특히 뒷산과의 조화를 고려한 미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가운데가 솟아올라가고 양끝이 처진 뒷산을 배경으로 집을 짓는 까닭에 지붕의 양끝이 처져보이지 않도록 양끝을 살짝 들어올린 결과 그 같은 자연곡선이 고안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가옥을 닮아가는 의복 역시 저고리 깃이나 버선의 경우처럼 유사한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98]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서는 야나기의 말맞다나 일본적인 기교에 해당하는 ‘꼼꼼한’무엇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분방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격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한국미의 이상에 해당하는 멋이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느껴진다고 말하는 다음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105]

그렇다면 한국인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인 격을 중시한 반면, 일본인은 ‘넘나듦이 가능하지 않은 세부항목’인 기교를 중시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인의 미의식과 일본인의 미의식이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예의 근본을 발긴 추사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비었다는 것은 그 형태이고 충실하다는 것은 그 정기다. 그 정기라는 것은 제 몸뚱이의 충실한 것이 지극히 빈 가운데에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다. 오직 그 충실한 까닭으로 힘이 종이를 뚫고, 그 빈 까닭으로 정기가 종이에 맑게 배어나온다. (서결.<추사집>)
비어 있는 형태에서 충실한 정기가 배어나오는 것. 육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정신의 격을 가까이 하는것.  이 같은 한국의 미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고 다만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야나기는 그것을 완전하지 못하고 갖추어지지 못한 비어 있는 형태로서 받아들였다.  [110]

그러나 조선의 둥근 달항아리는 그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fp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이다.  [113]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불가사의로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복하자면 그는 정신의 격이 세련된 까닭에 형식의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를 앞세우는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세련됨은 지나쳐버린 채 서투름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기에 볼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는 한국예술의 아름다움에 불가해한 신비주의를 덧칠했다. [119]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저마다의 취향이 성찰의 강을 거슬러 창조의 피안으로 올라간다는 것. 이것은 취향이 단지 미(美)와 관련된 것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성찰의 강에서 피어나는 안개에는 미뿐 아니라 진과 선도 한데 섞여 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미의식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130]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까닭에 무형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32]

음양오행사상의 형이하의 측면에 해당하는 만물의 변화론이 한국인에게 일상의 구체적인 척도로 사용되어 온 것은 상이라는 것이 한국인의 삶에서 차지해온 만만치 않은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음양오행사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렇다고 집어 말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언제든지 곁에 놓아두고 사용되는 일상의 척도였다. [137]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본래 음식과 결부되어 있던 물질에너지 맛은, 어느 순간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정신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미감 또는 미의식을 파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미각이 고도화되고 특히 그것이 자연의 리듬에 공명하여 세시와 절기의 리드미컬한 흐름을 탄 미묘한 것일 경우, 그 미감은 훨씬 명징하고 수준높은 것이 된다). 이같은 사실은 ‘맛’이라는 단어에서 미감을 의미하는 ‘멋’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된다. [156]

하지만 돌아보건대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된장찌개에 구더기를 처넣은 에피소드가 상징하듯이, 발효맛에서 생기의 미감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취향과 결별하는 기억상실의 세월을 살았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발효맛의 취향과 화해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이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163]

발효의 원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이 부패와 관련된 미생물의 활동을 억누르고 발효와 관련된 효모균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금을 첨가하여 음식물을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소금에 견디는 유익한 균들만 활동하도록 하는 식이다. 따라서 발효 원리의 핵심은 부패균을 죽이는 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발효균을 살리는 상생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166]

흥부의 형상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누리는 대신, 어처구니없는 고통에 빠져 인욕의 세월을 보내는 모습이다. 따라서 대성통곡하며 우는 흥부의 모습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한국인의 자화상에 포함된 눈물이자 한(恨)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자화상은 흥부의 내면적인 형상뿐만 아니라 외면적 형상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전자가 대성통곡하며 우는 눈물이자 한이라면, 후자는 배꼽을 잡으며 웃는 웃음이자 흥이다.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3]

가동적인 정지태. 박수근의 ‘기름장수’ 김기창의 ‘아악’처럼, 움직이고 있으되 멈춰 있으며, 멈춰 있으되 움직이고 있는 것. 그런데 바로 그 멈춰있음 때문에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은 웃고 있으되 울고 있으며, 그 울음 때문에 웃음 이상의 웃음을 머금게 하는 한국인의 미소와 통한다. 이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있는 과거이며, 이같은 그늘을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있는 미래다. [176]

그렇다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하여금 눈물과 한을 넘어 웃음과 흉으로 휘몰아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와 관련해서 박래경은 ‘살아있는 유기적 생명체가 역시 생명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자연 속에서 노닐면서 자신의 생명유지와 생명확장을 우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타넘은 결과 어떤 즐거움과 유희성이 동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자화상이 ‘가동적인 정지태’로 출렁이는 까닭은 그것이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의 느낌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생기의 느낌 또는 가동적인 정지태의 출렁거림이 해학과 신명이라는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를 넘어 사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로 확장 될 경우 그 자리에서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177]

한국인의 자화상를 묘사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한과 울음이다. 하지만 자화상에서는 울음만이 아니라 웃음도 묻어난다. 결국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의 설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8]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186]

풍수사상에 따르면 고지도의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주산이거나 안산 좌청룡이거나 우백호이고 고지도의 하천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명당수이거나 객수이며 고지도의 산줄기는 단순한 산줄기가 아니라 정기가 흐르는 맥이다. 결국 풍수사상이란 한국인의 의식 뒤편에서 후광처럼 빛을 발함으로써 의식의 수면 위를 떠다니는 공간 심상들로 하여금 실용적인 기호의 성격을 넘어 예술적인 도상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도록 만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3]

공간 취향이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당신의 마음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 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200]

미의식을 상징하는 ‘기억 속의 심상’의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가 바로 색이다. 고유색 또는 조선색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짐작되듯이 색이란 보편 너머의 특수가 자신의 ‘저다움’을 드러내는 눈빛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벽돌탑에 대비되는 한국의 석탑, 주희의 주자학에 대비되는 율곡의 성리학이 그렇듯이 조선색이란 좁은 의미의 한국의 색깔을 넘어 넓은 의미의 한국인의 기질을 가리킨다.  [201]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이처럼 자연의 바탕색을 의미하는 소색은 당연히 옷감의 색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닥나무 껍질로 만든 흰색의 종이처럼 염색 따위의 가공을 하지 않고 바탕색을 살려서 만드는 일상용품들 속에 살아 숨쉰다. 소색은 자연스럽게 어느 문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특히 한국인의 일상에서 눈에 뛰게 등장하는 한국문화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206]

한국인이 소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구부러진 나무를 고스란히 대들보로 사용한다든가 굵기가 고르지 않은 나무를 활용하여 배흘림 효과를 낸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연적인 것’ 그대로를 ‘인문적인 것’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흡사하다. 이것들이 형의 질박함을 통해 상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한 것이었듯이, 소색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생기의 미감을 통해 얻어지는 상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이같은 해석은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 ‘나그네’들의 시선에 비친 한국인의 흰옷이 생동감이나 축제같은 분위기, 쾌활함, 발랄함, 매력적인 감흥, 활기참 등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208]

일본인 야나기 말고도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최현배 같은 몇몇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백의가 망국인의 비애를 상징한다고 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망국민의 비애를 한국인의 백의에 감정이입했기 때문인데,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사에 숙명적인 사대주의의 낙인을 찍은 식민사관이야말로 이같은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216]

백의민족의 이미지는 풍요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취향을 빼앗은 대신, 척박한 강박의 틀거리를 덮어씌우는 이데올로기를 떠안겼다. 따라서 취향의 해방을 위해서는, 풍요로운 성찰을 토대로 한 진정한 저다움을 위해서는, 먼저 백의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표상과 결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뼈아픈 이십 세기여 안녕, 이십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히 안녕!’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22]

그렇다면 한국의 도시들에 깃들어 삶을 꾸려가는 한국인은 어떤 존재들인가. 적어도 오늘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은 비관적이다. 개성적인 컬러가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형광색을 비롯한 끔찍한 색들이 난데없이 얼굴을 내미는 부조화의 난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톤과 개성적인 컬러가 없는 도시  이것은 오늘의 한국 도시들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 잡고 있다.  [225]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한국인이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색동옷을 즐겨 입으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취향에 대한 담론들은 사실상 된장찌개나 색동옷, 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이끌리는 한국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담론은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232]

선비란 누구인가. 한자말로 사(士)라고 불리는 그들은 유학을 공부한 조선의 지식인 계층이다. 이들은 벼슬을 하여 조정에 나아가면 사모관대를 한 선비가 되며,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히면 포의(布衣)를 입은 선비가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염치를 대절로 알고 정직한 기풍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어서, 심지어는 선비를 국가의 원기로까지 높이기도 했다. 특히 유교를 나라의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 초기에는 왕(태종)이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유학을 닦은 선비’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조선에서 선비가 지졌던 정신적인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이란 무엇보다 ‘선비의 나라’였다.  [247]

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순간’의 주체가 체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의 주체로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성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277]


● 내가 저자라면

책은 출발점을 알기 어렵다. 의당 책을 처음 펴는 곳이 출발점이겠지만, 책은 펴자마자 이미 분위기가 달아오른 중간부분을 펼친 듯한 기분이다. 시종일관 그러한 분위기를 유지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착륙을 한다. 착륙도 출발할 때처럼 갑작스럽다. 책을 펴자마자 붕 떠서 날아가는 기분은 당황스럽다. 일반적인 이륙과정을 거치는 비행기가 아니라 수직이착륙 비행기 같은 구성이 저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의도적이라면 그렇게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붕 떠서 급하게 날아가는 듯한 책은 마음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책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 그대로, 독자의 머리 속에서 침잠하지 않고 떠다니다 흩어진다.

도착 시간에 늦은 버스처럼 조급함도 엿보인다. 왜 그렇게 급하게 달려야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렇게 급하게 내달리는 와중에도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 이어진다. 조급해서 들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곳곳에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의 반복이 보인다. 급하게 달리는 버스는 아무래도 승차감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내용의 초점을 잡기 어렵고 산만하다. 내용의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너무 많이 늘어놓은 저자의 욕심 때문으로 보인다. 너무 많은 것을 알리고자 하다보니 이것저것에 관해서 조금씩 많이 말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깊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급하게 달리는 말 위에서 강산을 보려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한국인이 미의식’이라는 전문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을, 그렇게 급하게 그렇게 많은 분야를 한번에 말하려 하는 시도는 무리하게 보인다.

저자가 책에 펼쳐놓은 내용들은 곳곳에서 받아들이기에 편하지 않다. 일부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아서 선뜻 고개를 주억거리기가 힘든 것이다. 마치 웅변처럼 쏟아내는 이론들은 그것이 저자의 주장인지 이론으로 정립된 것들인지 알 수가 없다. 저자의 주장이라면 독자들에게 펼쳐내는 방식이 너무 거칠다. 마치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책의 전반에 걸쳐서 이어진다. 격하고 거칠게 끌어가는 책의 구성은 읽는 사람들을 그리 기분 좋게 만들지 못한다. 책은 ‘한권으로 읽는 또는 하룻밤에 읽는 한국인이 미의식’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나마 매끄럽지도 착 달라붙지도 않는다. ‘내가 공부해봤더니 이건 이렇더라. 그러니 그렇게 알아라.’ 하고 툭 던지듯 하는 느낌은 한편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래저래 책은 만족스럽지 않다.

문장들은 감정이 많이 채색되어 보인다. 그러한 감정의 드러냄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하여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는 무리수를 불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가 큰 목소리로 외치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자화상 벗어나기’ ‘식민사관의 극복’ ‘백의민족 이데올로기 청산’등은 감정의 드러냄으로 인해서 되레 빛을 잃는다. 합리성의 의심을 받는 외침은 그리 마음에 들어와 감기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들은 새롭고 독특한 부분이 있지만, 책의 내용들은 그리 새롭지는 않다. 지나간 과거에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어 바로 잡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과거의 족쇄에 연연하기 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한국인의 미의식’을 그려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과거의 ‘어두운 부분’들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미의식을 반증의 형태로 사용하고 있다. 반증의 형태가 아닌 순증의 형태로 풀어갔다면 더 나은 책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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