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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06시 11분 등록

백범일지 김구, 도진순 주해, 돌베개

 

▣ 저자에 대하여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는데 백범 선생 마지막 비서 선우진 선생 별세였다. 이번 달에 읽게 될 <백범일지>가 있었기에 스크랩해 두었다. 이 때가지 김구 선생이 암살 당했다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 그 경위가 어떻게 되는지는 말 몰랐었는데 이 기사를 읽으며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백범 선생이 마지막 비서 별세 신문기사

<백범 못 지킨 평생의 한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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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을, 중국 충칭 임시정부 시절부터 광복 뒤 서거할 때까지 4 5개월 동안 곁에서 모셨던 애국지사 선우진(오른쪽 사진) 선생이 17정오 별세했다. 향년 88.

선우진 선생은 1948년 4월 19 백범 선생이 단독 정부 수립을 막으려고 남북 협상차 38선을 넘어 방북했을 때 수행했으며, 이듬해 6월 백범이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질 때도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중략-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주석 판공실 비서로 근무한 선생은 지난해 12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최기영 씀·푸른역사 펴냄)이란 회고록을 남겼다.

선우 선생은 1949 6 26 경교장에서 백범을 살해한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이 있던 2층에서 내려오는 장면도 지켜봐야 했다. 백범을 찾아온 포병 소위 안두희 2층 집무실로 안내한 뒤, 점심을 준비하려고 지하 식당 내려갔다 총소리에 놀라 올라온 순간이었다.

회고록에서 선생은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며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던 안두희에게 왜 좀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지 아직도 한스럽다”고 가슴 아파했다.  2009. 5.18. 한겨레 신문. 권혁철 기자.

 

마지막 비서 선우진 선생인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2008년에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후, 그러니까 <백범일지> 내용 이후의 김구 선생의 행적고 사망, 사망 이후의 백범김구선생사업협회 설립 등 김구기념사업 경과 사항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며 김구선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짚어 본다.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1949 6 26. 일요일. 백범선생은 귀국 후 머물렀던 경교장에서 신문을 읽고 손님을 맞았다. 11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뵙기를 청했다. 안두희는 일전에 한국 도립당의 조직부장 김학규 선생의 소개로 경교장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안두희 45구경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지 지금도 죄책감이 든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했다. 백범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다. 평소와 같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때가 12시 40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나는 선생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바로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두국이 다 되어간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정신이 멍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나는 급히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 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푸른역사, p 212~p213

 

1949년 초부터 백범 선생의 암살 소문은 있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암살 계획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나는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일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 했다.”며 일축했다 한다.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신탁통치 문제에 있어 김구선생은 반탁운동에 강하게 나섰으며 이승만 이하 우익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북쪽도 소련에 힘입어 김일성이 장악하게 되자, 김구 선생은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1948 5 10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자,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김규식 등과 함께 최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선거에도 불참한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보았을 때 김구 선생은 암살 계획에 대해 인정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죽음조차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계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7 5일 국민장으로 장례 했으며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960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자 백범선생 기념사업도 가능해졌다 한다.

 

<나의 소원>이 쓰여진 시기는 1947 12월이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한창 신탁통치의 반대 우동을 펼칠 그 때이다. 이 대목 만으로도 김구 선생이 얼마나 통일된 민족 국가를, 완전한 자주 독립을 원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다중지능 이론으로 본 김구 선생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으로 김구 선생을 연구한 자료가 있어 관심 있게 보았다. 김구 선생을 전문 이론으로 잘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라 소개해 본다.

⊙ 백범의 일반적 행동 특성

영역별

특성 또는 능력

인지적 영역

예리한 현실인식능력과 상황판단 능력()

정의적 영역

어진 성품과 강인한 의지, 특출한 담력(, , )

신체적 영역

뛰어난 체력과 기민한 동작()

 

⊙ 백범의 다중지능적 특성

지능별

하위 특성 또는 능력

신체운동지능

체력, 동작 능력(지도자로 만들어 낸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

인간친화지능

타인 인식 능력, 감화 능력(리더십의 핵심)

자기성찰지능

자기인식 능력, 자기통제 능력, 자기 동기화 능력(자기 인식과 향상의 찬란한 힘)

* 자료 출 처: 문용린외 2, 백범 김구의 지적 계발과정 탐색, 집문당

 

올해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0주년

올해 6 26일은 김구 선생 서거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선생에 대한 연구와 업적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독립운동사 자체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이 저조할 수 있으며 아직도 현대사의 자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2년 백범 김구 선생인 유언장이라고 쓴 <백범일지>가 출간 되면서 독립운동과 김구의 생애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 하겠다.

 

나 또한 이번 과제를 하면서 김구백범기념관이 효창공원에 있으며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경교장이 복원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날,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산책 해 봄도 좋을 듯하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14]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알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 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14]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은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민족에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15]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 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15]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 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5]

 

상권

<.신 두 아들에게>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19]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 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알아채고 미리 대비할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어 후문으로 돌입할 계획을 세웠다.[25]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을 피하였다.[27]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29]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30]

 

어느 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31]

 

아버님은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免費學童)이 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34]

 

2. 시련의 사회 친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나.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39]

장수가 될 훌륭한 재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 있게 낭송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나는 1년간 일가 아이들을 모아 훈장질하면서 의미도 잘 모르는 병서만 읽었다.[40]

 

정씨 등이 밀사를 만나 본 결과 안진사는 비밀리에 나를 조사하고 난 뒤, “군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함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별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즉시 참모회의를 열어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앞부분은 불가침 협정이라 할 수 있고 뒷부분은 공동원조계획이다. 동학과 토벌군이 이러한 공수동맹을 맺은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51]

 

이용선은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만일 이용선이 죽을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53]

 

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내가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 내가 눈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호곡하는 것을 본 이웃사람들이 의복을 갖다 주었다.[53]

 

중근은 영기(英氣)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57]

 

특히 안진사의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우이 있었다. 당시 조정 대관들 중에 글로써 항쟁하던자들도 처음에는 안진사를 악평하였지만 얼굴만 대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교만한 및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58]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61]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 아닌가?[62]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63]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63]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백석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을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65]

3. 질풍노도의 청년기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78]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애시당초 일곱 그릇을 더 요구한 것이 거짓말로 알려져서는 재미없는 일이라 큰 양푼 한 개를 청하여 밥과 반찬을 한 군데에다 붓고 숟가락 한 개를 더 청하였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 들고서 밥 한 덩이가 사발통만큼씩 되게 밥을 떠먹었다.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를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97]

이화보에게 필기를 갖고 오게 해서 몇 줄의 포고문(布告文)을 썼다. 먼저 왜놈 죽인 이유를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라고 밝히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金昌洙)”라 써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벽에 붙였다.[98]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法司)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100]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103]

불서(佛書)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106]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107]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臣民)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白日靑天)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蒙白,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국상을 당해 소복을 입음)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108]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布告)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110]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114]

"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115]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도되지 않았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半日)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118]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126]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국법에 범죄행위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행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왜놈에게 죽든지, 충의를 몰라주는 조선 관리들에게 죄인으로 몰려 죽든지 한이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 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脫獄)하기로 결심 하였다.[128]

 

4. 방랑과 모색

볏짚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펴고 하룻밤을 보낼 훌륭한 방을 준비하였다. 볏짚을 깔고 볏짚을 덮고 볏짚을 베고 누우니, ‘인천감옥 특별방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135]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155]

용담도 하은당의 가풍(家風)이 괴상한 것을 알고서 글을 가르치다가 종종 위로를 하였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생각하지 말라. 어떤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참을 인’() 자의 해석을 하여 주었다.[156]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165]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은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179]

. 슬프도다. 이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 슬프고도 애통하도다.[180]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시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 백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181]

5.
식민의 시련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 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196]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203]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사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204]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214]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의무를 다하였다.[215]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高後凋, 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나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잇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225]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246]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247]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 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254]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264]

 

온 산의 마른 나무 가운데 잎사귀 하나만 푸르다.”는 기개를 누가 흠모하고 감탄하지 않으리오. 불서(佛書)"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걸어감에 누가 나를 따르랴"는 구절을 도군을 위해 암소하였다.[265]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몽우리돌이다. ‘몽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몽우리돌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사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 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267]

 

6. 망명의 길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27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하고 돌려보냈다.[283]

 

나는 안씨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종전에 본국에 있을 때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순사 시험과목을 혼자 시험 쳐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스스로의 경험과,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85]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289]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290]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임시정부 청사에서 67(1942) 때 집필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弱冠)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耳順)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295]

 

1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己未年: 1919)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孤城落日)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鐵血男兒)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296]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296]

 

어떤 사람이 나에게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정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이다.[301]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307]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310]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시무할 때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푸르고 코 큰 영미 친구들도 더러 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제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공무국의 불란서 경찰이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 외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적어도 몇 백 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 그전의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어떠한 곤란 중이라도 14년 동안 연중 행사로 실행한 것은 우리 임시정주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319]

 

2. 이봉창윤봉길의 의거

과연 이씨는 의기남자로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맞본 방랑생활을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323]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 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325]

 

이에 윤군은 쾌히 응낙하며 말하기를저는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하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331]

 
때마침 7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336]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朱憙)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老朽)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352]

 

정주(程朱)의 방귀를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달다’ 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類似夫婦)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362]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 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경과 사실의 모년 모일을 기입한 것은 본국에 계신 모친께 편지를 올려 답장을 받아 기입하였으나, 지금 하편을 쓰는 때에도 어머님이 곧 생존하셨더라면 도움이 많았을 터이건만, 슬프도다![365]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라는 말을 고쳐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367]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獻壽) 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367]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上帝)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韓奸)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종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뿐이었다.[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그들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의 형편을 알고, 자신들이 어머님 시중을 들겠으니 나는 마음 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런 성심을 품고 남안에 도착하였을 때, 어머님은 이미 인제의원에서도 손을 놓고 퇴원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377]

 "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378]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遂安)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387]

 

6. 해방 전후의 대륙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395]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고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 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 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399]

7. 조국에 돌아와서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를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409]

 

친척과 헤어지고 묘소를 버리고 고향을 떠난 지 27. 고국에 돌아왔으나 그리운 출생지인 고향은 소위 38선 장벽 때문에 돌아가 보지도 못하고, 다만 재종형제들과 사촌누이 가족들이 상경하여 기쁘게 만나보았을 뿐이다. [410]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주련)도 변치 않고 나를 맞아준다.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라고 되어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412]

 

그 옛날 나를 따라 오시던 어머니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하시던 어머니 최후의 말씀을 생각하니, 그것이 이날 이 자리에 모자가 같이 옛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예측하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 지금, 사람과 땅이 생소한 서촉 화상산 남쪽 자락에 손자와 같이 누어 계신 것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이 몸과 같이 환영을 받으신다면 다소 위안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만감(萬感)이 교차하였다.[421]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423]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424]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425]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426]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426]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은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427]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과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는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427]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428]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428]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430]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431]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431]

 

홍익인가(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431]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433]

 

 

▣ 내가 저자라면

2007 10만원 고액권 초상 인물에 백범 선생이 선정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국민여론조사 결과 김구 선생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김구선생에 대해 독립운동가였으며 암살당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잘 몰랐다.

<백범일지>이 책은 어떤 책이지 탐색하려고 펼쳐보는 순간부터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었다. 범해 선생님과의 통화 도중 이 책이 너무 재미있고 백범선생의 기개가 느껴지고 그 열정이 와 닿는다며 이순신의 <난중일기>보다 재미있다 했더니 열정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어 있으며 난중일기 같은 잔잔함 속의 흐르는 기백도 있다고 일러주셨지만 이 책에 더 매료됨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고액권 인물 선정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책을 읽고 기사를 읽으니 내용의 이해 차원이 다르다.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선정 이유는 근대사에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뛰어난 실천력과 포용력과 갖추고 통일의 길을 모색한 지도자로서 국민에게 바람직한 인물상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김구선생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인듯하다.

 

유서적 자서전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백범 김구 선생은 자신이 암살로 갑자기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책을 읽는 동안은 유서라는 생각은 없이 읽었지만 그의 죽음을 살펴 보면서 이 책의 내용들이 가슴저리게 다가왔다. 유서를 남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지, 이 자서전을 쓰면서 유서라고 생각해선지 느낀 바를 당부하는 부분도 많다.

 

비통하고 슬프도다! 하느님이 진정 무심하신가. 어린 아들, 어린 딸도 왜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래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백 몇 천 집이랴만, 기미 3.1운동 이래 상해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서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遂安)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387]

 

 특히, <나의 소원>은 그이 정신적 철학과 사상을 보여주며 오직 나라를 위한 삶이었음을,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그가 남긴 대표적인 유서라고 보여진다. 어느 한 구절 놓치고 싶지 않으며 읽으면 저절로 이 나라 국민임이 자랑스럽고 애국심이 생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426]

 

백범 김구를 존경하게 되는 이유

그가 회고하듯이 70평생을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존경하고도 남지만 <백범일지>를 읽으면 진솔하고 인간적인 그의 마음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동지들을 보살피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데 정성을 다한다. 강인한 어머니가 있어 김구선생은 더 자신을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효심도 깊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산 그도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했으리라.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다음의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289]

 

김구가 존경 받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가 미국식 민주주의나 소련의 사회주의 하나를 지향하는 이념적 사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독립된 조국, 하나로 통일된 우리민족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운동이, 우리나라의 주권이 어는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민족 독자적으로 이루어 져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구조를 살펴 보면

일반인과 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려운 한자 보다 한글로, 국한문 혼용이 어려운 것은 쉬운 현대문으로 풀어 쓰여져서 읽기에 매우 편리했다. 앞 부분에 독립운동시의 사진 및 김구 선생의 활동 사진을 실어 자서전을 읽는데 참조 자료가 되었다. 일러두기에 적힌 것처럼 연대 및 백범의 나이도 기입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꼼꼼한 각주가 역사적 사건을 짚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교감 원칙을 상세히 밝혀 독자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해 준다. 뒤에 실린 백범 연보도 자서전 전체를 년대 별로 정리해 놓은 듯 꼼꼼히 기록하고 김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당시의 주요 사건들을 같이 기록하여 이해를 돕는다. 이에 백범 김구선생이 자서전을 기록한 1942년 이후의 내용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서전이 이 정도의 구성이면 매우 훌륭하다 생각되어 별도의 추가사항이나 보완점을 찾기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며 드는 단상들

나의 애국심은 어느 정도인가? 나라가 어려우면 철공장에 다니던 이봉창처럼,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처럼 살신성인의 큰 뜻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죽은 논개의 충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특정한 부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시대에 나의 애국심을 발현할 방법은 세금을 잘 내는 일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김구 선생의 간절한 소망, 하나밖에 없던 소원인 통일된 민족, 우리나라는 과연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주 국방은 묘연한 것인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가입으로 북한을 견제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북한과 심하게 대치하는 뉴스를 보면서, 한층 긴밀해지는 한.미 관계를 보면서 더욱 드는 생각이다.

아마 오늘이 현충일이기에 더욱 그러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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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09:53:38 *.204.150.138
선우진 선생님... 그 분은 또 얼마나 평생 회한을 갖고 사셨을지...
어쩐지 그대라면 독립운동에 꿋꿋이 참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그 역할은 충실히 이행할거야. 그대라면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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