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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03시 47분 등록

북리뷰 32: 생의 수레바퀴 -퀴블러 로스

 <생의 수레바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강대은 옮김. 황금부엉이 간. 2008.
       원제: The Wheel of Life. Elisabeth Kubler-Ross. 1997.

***저자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2004년 8월 24일 밤 8시 11분에 세상을 떠났다.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 생애를 졸업하는 날, 난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러니 그날은 축하를 받아야 할 날이지요.” 그녀가 늘 노래해 온 것처럼 그렇게 은하수로 갔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쓴 글에 심취되어 밤을 지새울 수 없다면 그 글은 결코 누군가의 밤을 지새우게 할 수 없다.” 그렇게 이 글이 진정 우리를 울게 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그녀는 70세가 되던 해에 이 책을 썼다.

뇌졸증으로 마비된 몸으로 9년을 병상에서 지내며 그녀는 인내와 사랑받는 법을 더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자인 데이비드 케슬러와 함께 두권의 책을 더 써냈다.

<인생 수업 Life Lesson>, <상실 수업 On Grief and Grieving>이다. 그 집필들은 그녀의 감정을 정화시켜 주었고, 데이비드와 함께 작업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슬픔을 표면위로 올라오도록 둠으로써 그의 글을 읽을 독자에게 깊은 통찰과 위로를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1926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900그램( 2파운드)으로 태어났다. 15분후 동생이 태어났고 그 20분후 다시 막내가 태어났다. 막내는 3킬로그램으로 먼저 태어난 두 아기의 3배가 넘었다.

그런 탄생의 조건이 그녀에게 내내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동생들과의 차이를 알 수 없었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다른 두 자매를 바라보며 일찍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그로인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며 평생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놓지않았다. 겨우 900그램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했던 그녀는 남보다 열배의 노력을 하여 열배의 가치, 곧 생존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취리히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하는 동안, 의료진들이 환자의 심박수, 심전도, 폐기능 등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상실과 슬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는다.

우연한 계기에 강의를 대신하게 된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의사, 간호사, 의대생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말기 환자 500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죽음의 순간 On Death and Dying>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녀는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 이후 20여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간했고, 학술 세미나와 위크숍에 가장 많이 초대받는 정신의학자가 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이 되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명으로 선정하였다.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봄 ; 생쥐

생쥐는 닥치는 대로 먹고 배설한다.
생기있고 장난을 좋아하고 늘 앞서간다.

여름 ; 곰

곰은 매우 태평하고 동면을 좋아한다.
청춘을 되돌아보고, 바삐 뛰어 다니는 생쥐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가을 ; 들소

들소는 평원을 배회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유롭게 삶을 되돌아보고 힘든 짐을 내려놓고 독수리가 되는 날을 고대한다.

겨울 ; 독수리

독수리는 세상위로 높이 나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프롤로그

삶이 진정 중요한 이유

8.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연구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라고 믿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자랐던 소녀 시절, 터무니없이 큰 꿈을 품었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죽음의 순간; On Death and Dying> 이라는 책의 저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탐구한 이 책 덕분에 나는 의학과 신학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12. 사람들은 늘 내게 죽음이 뭐냐고 묻는다. 죽음은 정말 멋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죽음만큼 쉬운 일은 없다고.

13. “과제를 다 배우고 나면 고통은 사라져 없어진다.”

PART 1

봄; 생쥐의 장

꿈꾸는 고치

17. 신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자유 의지’이다.

19.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강하게 끌렸다. 두려움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시골의사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아빠 회사에서 일하기 싫다면 평생 가정부 노릇이나 해.”
아버지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난폭한 발걸음으로 서재로 들어 가버렸다.

“그래도 상관 없어요.”
나도 지지않고 응수했다. 진심이었다.

20. “나는 생명의 목적을 찾아내고 싶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작문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의사가 되겠다는 꿈도 써 넣었다.

“언젠가는 꼭 내 힘으로 해낼 것입니다. 언제나 가장 높은 별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전형적인 상류가정의 보수적인 부부였다.

23. 나는 겨우 900그램으로 태어나서 살아갈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그것으로 인해 어린 시절 내내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보냈다. 나는 언제나 남보다 열배의 노력을 하여 남보다 열 배의 가치가, 뭔가 생존의 가치가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매일의 고통이었다.

낯선 여행을 떠나는 천사

사랑스러운 토끼 블래키

33. 아버지는 가족사를 사진에 담는 것을 좋아했고, 앨범에 꼼꼼하게 정리했다. 또 아이들의 자세한 성장 기록도 적곤 하셨다.

36. 나는 언제나 이리저리 뛰어다닌다고 하여 ‘참새’라고 불렸다가 나중에는 ‘생쥐’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시도 얌전히 앉아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37. 두 자매와는 달리 나는 동물을 유난히 좋아했다.

토끼장을 청소하고 빼먹지 않고 먹이를 주고 함께 놀아주는 일은 주로 내가 도맡아 했다. 몇 개월에 한번 씩 어머니가 토끼고기 스튜를 식탁에 올리곤 했지만, 나는 토끼가 스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38. 블래키는 커다란 수토끼로, 통통하고 까만 털이 푹신푹신했다. 나는 블래키를 늘 안고 귀여워했고, 어떤 비밀도 다 털어놓았다. 블래키는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주는 훌륭한 정신과 의사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무조건 나를 사랑해주는 생명체라고 확신했다.

39. 그러나 두려워하던 날이 다가왔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블래키를 정육점에 갖다 주라고 명령했다. 나는 떨면서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다. 블래키를 안아 올리며 아버지에게 명령받은 일을 고백했다. 블래키는 내 눈을 응시했다. 복숭아 빛 코가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었다.

“난 못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블래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망쳐” 하고 간청했다. “빨리.” 토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늦어버렸다. 수업이 막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블래키를 안아들고 정육점으로 달렸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 내렸다. 불쌍한 블래키는 두려운 운명이 기다린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정육점에 건네줄 때 블래키의 심장이 내 심장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작별인사도 없이 학교로 달렸다.

학교가 파하자 나는 느릿느릿 걸어 마을로 들어섰다. 정육점 주인아저씨가 벌써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블래키의 고기가 든 꾸러미를 건네주면서 정육점 주인아저씨는 말했다.

“그나저나 이 토끼를 지금 데려온 건 안됐구나. 하루나 이틀 후면 새끼를 낳았을 텐데.”(나는 블래키기 수컷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블래키의 죽음 이상의 슬픔은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더 극심한 슬픔이 덮쳐왔다. 나는 아직 따뜻한 블래키의 꾸러미를 카운터에 놓은채 도망쳤다.

나는 강해지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강해지는 것을.

“이 슬픔을 견딜 수 있다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거야.”

41. 부모님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에서 나를 떼어놓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반응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일찍부터 느꼈다.

42.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수지가 죽었을 때 침실의 커튼이 굳게 닫혀있던 모습이다. 햇빛으로부터도 새와 나무들로부터도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와 경치로부터도 모두 격리된 채 죽어갔다는 것에 슬픔이 사무쳤다. 너무나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되었다.

43. 부모님 친구, 50대 과수원 농부 아저씨는 지금의 내가 ‘좋은 죽음’이라고 부르는 죽음을 맞이했다. 자기 집에서 사랑에 휩싸여 존경과 존엄을 받으며 숨을 거두었다. 가족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했고, ‘미련과 후회 없는 슬픔’에 잠겼다.

믿음, 희망, 사랑

44. 학교에서 나는 제 세상을 만난 듯 빛을 발했다. 수학을 비롯한 모든 수업이 무척 재미있어 학교에 가기를 좋아하는 희한한 아이가 되었다. 다만 매주 의무적으로 정해진 종교 시간은 너무 싫었다. 공포와 죄의식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목사가 설교하는 신에게는 아무래도 공감할 수 없었다.

R목사는 냉혹하고 야비하고 단순한 남자였다. 목사의 다섯 아이는 늘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고 배를 주린 채 학교에 왔다. 그 불쌍한 다섯 아이는 모두 여위어 몸이 홀쭉했고 늘 피곤해 보였다.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몰래 샌드위치를 건네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도 아프지 않도록 엉덩이 밑에 스웨터와 방석을 넣어 주었다. 마침내 목사 가족의 비밀이 학교에 퍼지기 시작했다.

45. 해도 너무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시편집을 목사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당신은 목사가 아니예요. 보살피는 마음도 동정심도 이해심도 사랑도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악을 썼다.

47.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베그만 선생님이 내게도 해명의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48. 내게 있어 자연만큼 신성하고 뭔가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을 고취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51. 정원의 밭에서 키운 채소를 먹고, 자신이 먹을 빵을 굽고, 과일과 야채로 보존 식품을 만들고, 예전같은 사치를 버린 생활에 나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소박한 기여였지만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주어 훗날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52. 짐머만 목사는 내 생각을 바꾸려 하기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숭배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있다는 주장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옹호했다. “ 너는 매일 하느님께서 주신 것 속에서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 목사는 말했다. “ 그 선택에 의해 정말로 하느님 가까이에서 살아가는지가 결정된단다.”

53. 에바는 믿음, 에리카는 희망, 나는 사랑이었다.

전 세계에 사랑이 부족한 것 같던 그 시기에 나는 선물로, 명예로, 무엇보다도 책임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의 첫 실험 가운

54. 1942년 봄 의무교육을 마칠 때쯤, 나는 성숙하고 사려깊은 소녀로 자라있었다.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고, 드디어 진로는 의과대학으로 정해졌다. 의사가 되고 싶은 욕구는 전에 없이 강해졌고, 의사라는 직업에 문자 그대로 소명 의식을 느꼈다.

55. 아버지와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아버지가 정한 내 장래를 거부하고 있었다. 집을 나갈까 생각했다. 분명 가정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장래는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 가정부 일을 하겠어요.” 그렇게 대꾸한 순간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서재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62. 취리히의 주립병원 피부과 연구실에서 보내온, 견습생이 퇴직하여 빨리 충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삐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에 그리움을 느꼈다. 내 집처럼 편안했다.

63.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월요일 아침에 제 가운을 가지고 출근하겠습니다.”라고 젠더 박사에게 말했다.

운명과의 굳은 약속

64. 일을 시작한 지 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젠더 박사가 내게 물었다.

“입원 환자의 혈액 표본을 채취하는 일에 흥미가 있어요?”

채혈 대상 환자들은 성병 말기인 매춘부들이었다.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인 그 시대에 성병 환자들은 1980년대의 에이즈 환자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버려지고 격리되었다.

65. 채혈을 끝낸 후 환자의 침상에 앉아 그들의 삶에 대해, 그들이 보고 경험해온 일에 대해, 살아있는 것에 대해 몇 시간이나 이야기했다. 몸에 대한 치유이상으로 마음의 치유가 시급한 사람들임을 알았다. 환자들은 우정과 공감을 갈망했다. 나는 그것을 제공했고, 그들은 대신 내 눈과 마음을 크게 뜨게 해주었다. 공평한 교환이었다. 그 경험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디데이였다. 피난민이 스위스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한 번에 수 백명의 사람들이 며칠이나 계속해서 몰려왔다.

나는 상사의 허락을 얻을 겨를도 없이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물비누를 칠해 옴을 치료한 다음 부드러운 솔로 문질러주었다. 깨끗이 빤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가장 절실하다고 느낀 포옹과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이제 괜찮아”

1945년 5월 7일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날에 들은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였다. 그보다 더 감동적인 심포니는 없었다.

69. 겨우 생활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국제 평화봉사단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던 바이츠 박사는 기꺼이 휴가를 주었다. 아버지는 내 경솔함을 꾸짖으며 현지에서 부닥칠 것이 틀림없는 위험에 대한 내 무지를 꾸짖었다.

70. 이미 내 운명은 머나먼 저편의 고통 받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황야에 있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도와야할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그 길로 나아가야 했다.

의미 있는 일

72. “자넨 정말 훌륭한 박애 정신을 발휘해 주었어. 내겐 가족이 없기 때문에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네. 어디에서 살든 어디에서 죽든 우린 결코 자네를 잊지 않을거야.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마음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받아주게.”

내가 누구인지,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탐구하는 여정에서 노인의 말은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78. 아흔 세 살의 러시아 이민 노인은 나를 좋아했다. 내 스물 한번째 생일에 노인은 일기장에 이렇게 써 주었다. “당신의 빛나는 눈동자는 태양빛을 연상시킨다오. 다시 만나 함께 태양을 맞이하는 날이 오기를. 안녕!”

그 후 활력을 북돋워야 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나 일기의 이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활기있고 친절한 노인은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돌연 사라져 버렸다. 삶은 늘 그런 우연들로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마음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축성 받은 흙

79. 바르샤바까지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는 도중 농가에서 건초를 베고 우유를 짜는 일로 여비를 벌었다.

80. 하지만 운명은 신앙과 같은 것이다. 어느 쪽이나 신의 뜻을 열렬히 믿는 마음이 필요하다. 리치는 오직 직감으로 그날 그 시간에 동료들을 데리고 마중 나온 것이다.

81. 목적지는 남동쪽 비옥한 농업지대인 루시마에 있는 국제 평화봉사단 캠프였다.

89. “파니 닥터에게”
“선생님이 구해주신 열세 번째 아이의 엄마 W로부터. 축성받은 폴란드 흙을 드립니다.”

나치가 성직자를 거의 모두 몰살했으므로 사제를 찾으러 많은 시간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제 그 흙은 신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흙이 되었다. 흙을 내 머리맡에 놓고 그 여자는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자 그 작은 꾸러미에 든 흙은 내가 일찍이 받은 가장 귀중한 선물로 변했다.

PART 2

여름 곰의 장

가족과의 재회

94. 나는 시력 장애 환자를 검사하는 지하에서의 일이 좋았다. 그것은 측정과 검사를 반복하는 몇 시간씩 걸리는 일이었다. 필연적으로 환자와 둘만의 긴 시간을 암실에서 보내게 되어, 그곳은 완벽한 대화의 장소가 되었다. 나는 아직 스물 세살의 검사원이었지만, 노련한 정신과 의사처럼 환자의 말을 듣는 기술을 몸에 익혔다.

98.   이제 안 된다고 생각할 때에도
        언제나, 어디선지 모르게
        한줄기 작은 빛이 비쳐온다.
        그 작은 빛을 바라보면
        다시 용기가 솟구친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힘이 솟구친다.

100. 1950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돌입했다. 낮에는 암슬러 교수 밑에서 일하고 밤에는 마투라를 목표로 예비학교에서 공부했다.

101. 성찬을 앞에 두고 아버지가 합격 축하 건배를 제안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시험합격보다도 다시 가족 모두가 하나된 것을 기뻐했다.

의과대학 시절

102. 죽음과 그 과정에 관한 영구에서 내가 가장 영향 받은 정신과 의사는 C.G. Jung이었다. 의대 1학년 시절, 취리히 시내를 산보하고 있는 이 전설적인 스위스 정신과 의사를 나는 종종 목격했다. 보도와 호숫가를 걷는 융의 모습은 언제나 망아의 상태에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융과의 사이에 불가해한 인연을 느꼈다. 입을 열면 금세 마술적으로 통할 것 같은 기묘한 친근감을 품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쪽에서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보다는 이 위대한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융의 모습을 보면 나는 반사적으로 길을 건너버리든지 걸어가는 방향을 바꿔버렸다.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

105.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중노동에 길들여져 있었다. 밤에는 안과 검사실에서 보내며, 거기에서 정기적인 수입을 얻었다. 매일 아침, 통학할 때 전차 안에서 공부한 것을 빼면 대체로 언제 공부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 시각적 기억력을 타고난 나는 실습과 강의 내용을 잊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루한 강의, 특히 해부학은 밑바닥을 헤맸다.

106. 그런데 내 눈길이 한 학생에게 머물렀다. 짙은 갈색 머리의 잘생긴 남자였다.
“저 남자야.” 나는 말했다. “저 남자로 하겠어.”

우리 둘다 언젠가 그 남자들과 맺어질 운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과 ‘우연’에 맡겨져 있었다.

107. 임마뉴엘 로스. 어깨가 넓고 근육질에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였다. 뉴욕 출신이었다. 말투를 듣고 곧 알아차렸다. “브루클린”

삼남매의 막내인 매니는 매우 힘든 어린시절을 지냈다. 양친은 모두 청각 장애자였다. 매니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가는 숙부의 비좁은 아파트로 옮겼다. 몹시 가난한 생활이었다.

108. 매니는 일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해군 복무를 마치고 뉴욕 대학 의과 예과를 졸업했다. 퇴역 군인의 경쟁률이 치열한 미국의 의과대학을 피해 독일어 강의와 스위스 독일어의 클래스 토론으로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매니는 취리히 대학 의과를 선택했다.

2학년이 되자 실제로 환자를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게는 즉석에서 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는 탐정 같은 후각이 있었다.

삶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113. 의사 고시 위원회는 만 하루 동안 의대생이 7년간 배운 모든 범위에 걸쳐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실시했다. 인성테스트와 임상지식 평가도 실시되었다. 나는 무사하게 통과했지만 내 점수보다도 매니가 합격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115. 의식을 회복한 세플리는 질문 하나 없이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여동생은 그의 마지막 삶을 함께하며 위안과 사랑을 주었다.

1957년 어느 화창한 가을 날 오랜 세월의 노력이 마침내 보상 받았다. “합격했네.” 대학의 주임 시험관이 말했다. “이제 자네는 의사야.”

1958년 2월에 매니와 결혼하며 그 문제도 불문에 붙여졌다. 가족만의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서둘러 식을 올린 것은 세플리에게 신랑 들러리를 맡기기 위해서 였다.

117. 슬프게도, 죽음은 내 사정을 봐줄 만큼 관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플리가 전화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118. 죽어가는 환자의 절박한 심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잇는 가장 큰 도움은 스스로 너그럽고 친절하고 섬세하고 애정어린 인간이 되어주는 것이다.

신의 뜻

119. 매니가 내 도움 없이 의사고시에 합격한 후, 우리는 정식으로 결혼했다. 성대한 예식이 되었다.

120. 결혼식이 끝난 후 가족 모두 브뤼셀에 가서 만국박람회를 구경했다. 그곳에서 가족의 전송을 받으며 거대한 크루즈 선 ‘리베르티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날 밤, 말을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인디언의 꿈을 꾸었다. 그 인디언은 나였다. 꿈은 내게 미지로의 여행이 실제로는 귀향이라고 알리는 듯했다.

121. 인형처럼 치장한, 매니의 어머니는 말로는 표현 못할 기쁨을 그 눈에 나타냈다. 열다섯 개의 슈트케이스, 버들고리, 상자들을 찾고 있을 때 우리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122. 살인적인 스케쥴에다 월말이면 식료품도 살 수 없게 될 정도의 급여밖에 받지 못했지만 일을 시작하며나는 생기가 넘쳤다.

격주마다 주말에는 매니와 단둘이서 250개 침상의 병원 입원환자 모두를 진료했다.

매니는 꼼꼼하고 논리적인 진단에 능하고 병리학과 조직학에 자신 있었다. 나는 직관적이고 침착하며 응급실에서 필요한 순간적 판단력이 뛰어났다.

127. 진정한 위로는 자신의 의식의 힘을 믿는 자신의 마음밖에 없었다.

바라는 것이 주어질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은 항상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

129. 나는 인간에게는 약물이나 과학을 뛰어넘는 치유력이 잇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그러한 경험을 모두 가져와 병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 중에 사랑과 접촉과 교류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죽어가는 환자는 의사와의 안전거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솔직함을 갈망했다.

“어떤 걸 느끼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최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 말기 환자나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에게 최악의 치료가 행해졌다. 그들은 간호사 실에서 제일 먼 방에 갇혀, 스스로 끌 수도 없는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누워 있었다. 규정된 시간 외에는 병문안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이 전염되기라도 하듯 혼자 죽어가도록 내버려졌다.

131. 아버지는 집에서 편히 죽게 놔두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극도로 지치고 동요한 어머니도 아버지를 뒤따라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퇴원시키려면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말했다.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사망할 겁니다.” 라고 의사는 경고했다.

132. 나는 각서에 서명했다. 나의 고집쟁이 아버지는 퇴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축배를 들고 싶어했다. 집이 가까워 지면서 아버지의 표정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틀 동안 아버지는 편안하게 졸며 보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산 사진이나 스키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들을 바라보았다.

133. “창문을 열어주렴.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싶구나.”

그때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어 몹쓸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 일에 대해 사죄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뵈러가겠습니다.”아버지가 분명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하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의식적으로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깊이 감동했다.

새벽녘, 아버지의 자세를 편히 잡아주고 따뜻한 이마에 키스하고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커피 마시러 부엌에 갔다. 2분 후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숨져 있었다. 30분 동안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침상 곁에 앉아 천천히 작별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거기에 없었다. 에너지, 영혼, 마음, 뭐가 되었든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하던 것은 사라졌다. 아버지의 영혼이 육신을 떠났다.

134. 장례식은 사흘 후에 열렸다. 딸들이 결혼식을 올린 예배당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한 동료들, 아버지가 친히 가르친 학생들, 스키클럽 친구들의 정중한 예를 받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진실되게 사셨다.”

첫 강의 시간

138. 마골린 교수는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상사였지만, 정신 신체질환에 관한 연구를 돕는 일은 덴버에서 내가 거둔 최대의 수확이었다. 마골린 교수는 환자의 상념과 감정과 병과의 상관성을 측정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또한 치료에 최면을 활용했고, 윤회를 믿고 있었다.

139. 어느 날 연구소로 나를 부른 교수가 2주간 유럽에 다녀올 거라고 알렸다. 교수는 특유의 아닌 밤중 홍두깨 식으로, 의과대학 수업의 대강을 내게 맡겼다. 명예는 되겠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아직 시간이 2주나 있어.” 교수가 격려하듯 말했다. “나는 대학의 강의 요강 따윈 따르지 않네. 필요하다면 내 파일을 이용해도 좋아. 테마는 자네가 좋아하는 걸 택하게.”

140. 공항상태가 지나자 초조함이 몰려왔다. 다음 날부터 1주 동안은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독창적인 테마를 찾아 이 책 저 책 뒤적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제가 떠올랐다. 죽음. 모든 의사와 환자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언젠가는 모두 그것에 직면해야 한다.

141. 의사들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죽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죽음을 다루기가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142. “열여섯 살에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들에게 가르쳐줘. 화가 나면 화를 내도 좋아. 어떤 말을 해도 좋아. 지금의 진실한 마음을 죄다 털어놓는 거야.”

144. 열여섯에 앞으로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고등학교 졸업 댄스파티를 꿈꿀 수 없다면 어떠할까? 데이트에도 나가지 못하면? 남편이 될 남자도 꿈꿀 수 없다면? 그런 상태로 하루하루 보낼 때 무엇이 도움이 될까? 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을까?

30분 가까이 이야기한 린다는 피곤해져 침대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거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야 여러분은 과학도가 아닌 인간으로 돌아왔군요.”

“여러분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될 거예요. 그뿐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환자를 대할 수 있게 될 거예요.”

145. 한번 그런 일을 경험하면 생각이 영원히 바뀐다.

죽어가는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삶에 대해 무한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모성

147. 1963년 12월 5일 막 강의를 끝냈을 때 양수가 터졌다.

모두 사산아로 태어나리라 생각했던 바바라는 살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몸무게는 1.4킬로그램이 약간 넘었다.

초여름에 우리는 시카고로 이사했다. 매니는 좋은 조건으로 노스웨스턴 대학 메디칼 센터에 들어갔고, 나는 시카고 대학 부속 빌링스 병원의 정신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150. 몇몇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 끝에 헬무트 바움 박사에게 교육 분석을 받기로 결정했다. 분석은 39개월이나 계속 되었다. 결국 정신분석도 조금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 자신이 왜 이토록 고집스럽고 자립심이 강한지, 성격에 대한 약간의 새로운 통찰은 얻을 수 있었다.

151. 내 관심이 의학도 교육에 쏠린 것은 당연했다. 새로운 발상, 견해, 태도, 연구 과제를 논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증례연구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였고, 직접 체험하고 싶어했다. 그들에게는 어머니 역할이 필요했다.

자유로이 환자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의견을 나누며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캠퍼스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내 연구실은 곧 열정적인 학생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거기서 나는 나올 수 있는 모든 의문을 만난 것 같았다.

죽음은 가장 큰 스승

152. 내 인생은 프로이트와 융도 놀라 자빠질 듯한 곡예의 연속이었다. 1965년의 어느 가을날,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시카고 신학교에서 온 네 명의 신학생이었다.

153. 이야기 중에 신학생들은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때 혼란스럽고 무력감에 빠진다고 털어놓았다. 네 학생모두 죽어가는 환자와 이야기해본 적도, 시신을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내 연구에 원동력이 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154. 자신의 환자가 죽어간다는 것조차 인정하려들지 않는 의사들에게 내 제안은 너무 과격했을 것이다. 좀 더 주의 깊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가까스로 한 의사가 자신의 노인 환자를 소개해 주었다.
“부탁해 봐요. 저 할아버지라면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요.”

인공호흡기 튜브를 단 노인은 몹시 쇠약해 보였다.
“지금은 곤란합니다. 내일 데려오겠습니다.”

내 실수는 노인의 말을 무시한 것에 있었다.
노인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때 내게는 열린 귀가 없었다.

다음날 네명의 신학생들을 데리고 병실을 찾았지만, 노인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말할 힘도 없는 상태였다. 노인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쉰 목소리로 “와 줘서 고맙네.” 라고 말했다.

환자의 사정보다 자신의 사정을 우선시한 내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155. 죽음을 이해하려는 사람 앞에 가로놓인 가장 큰 장애는 아마도 자신의 생명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사람들은 고통없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통이 동반하는 유일한 기회인 죽음을 기피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좀처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해야 할 때에는 아이들을 다른 방으로 내몬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다. 뛰어난 의사들도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156.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67년 상반기부터 매주 금요일에 “죽음과 죽어감” 이란 주제의 세미나를 열기 시작했다. 세미나에 병원 의사나 대학교 교직원들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대생과 신학생뿐 아니라 간호사, 목사, 랍비,사회복지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57. “k 부인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다니, 대체 무슨 짓이오. 환자는 병의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다시 퇴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바로 그것이었다. 내 세미나를 못마땅해 하는 의사의 환자들은 불행하게도 대부분 자신의 병에 대처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의사가 자기의 죽음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 이상, 속마음을 이야기 할 기회가 환자에게 있을 리 없었다.

내 목표는 환자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료 종사자의 직업적인 기피감이라는 벽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받은 수많은 저항의 원인에는 여자라는 성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네 번 유산을 경험하고 두 아이를 낳은 여자로서 나는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런 사이클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의사의 대부분은 남자였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죽음을 실패 또는 패배라고 생각했다.

158. 죽음학으로 알려질 학문의 태동기였던 당시, 내 최고의 스승은 한 흑인 청소부였다.

159. 깊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있으면서도 여자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고 분노하는 기색도 없었다. 평화로운 그 태도가 너무 보통사람에게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아직 미숙했던 나는 엉겹결에 말했다.

“왜 그런 얘기를 하죠? 그것과 죽어가는 환자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여자는 온화하고 사려깊은 갈색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마치 내마음을 읽은 듯 이렇게 대답했다.

“죽음은 내게 친숙한 일이예요. 아주 오래된 친구니까요.”

160. 우리가 성장하는데 특별한 스승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의 스승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이로, 말기 환자로, 청소부로...... 세상의 그 어떤 학설과 과학도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힘에는 미치치 못한다.

162. 면담이 끝날 즈음에는 환자의 표정에 평온함이 보였다. 희망을 버리고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던 대부분의 환자가 새롭게 주어진 교사의 역할에서 커다란 기쁨을 찾았다.

그 토론을 통해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들은 내면의 적의와 방어에 직면했다. 그들의 두려움은 분석되고 극복되었다.

뒤돌아보고 삶을 헛되이 보냈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가세요.
해온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또는 다른 삶을 바라지 않도록 살아가세요.
정직하고 충만하게 삶을 살아가세요.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

166. “너는 가족 중 유일한 의사니까, 유사시에는 날 부탁한다.”
유사시라니? 일흔 일곱 살이라고는 해도 어머니는 어려움 없이 우리와 함께 하이킹을 했다.

“만일 내가 식물인간이 된다면 네 손으로 내 삶을 끝내주기를 바란다.”

167. “엄마에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내 환자에게 하는 것과 똑 같이 할 거예요. 죽음이 자연적으로 찾아올 때까지 사시게 할 거예요.”

171.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하는 그 요양원에서 어머니는 편안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듯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하나님은 그런 상태로 어머니를 4년이나 살게 했다.

어머니는 의연하게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 있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머니는 성장을 계속하고 배워야 할 교훈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은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웠을 때 삶을 마감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머니의 요구를 따라 내 손으로 당신의 삶을 끝내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PART 3

가을 들소의 장

죽음 뒤의 삶

175. 1973년까지 라-라비다 소아병원에서 나는 죽어가는 아이들의 삶에서 죽음으로의 여행을 도왔다. 동시에 정신 건강 클리닉인 패밀리 서비스 센터의 원장으로도 일했다.

며칠간 우리는 논의를 계속했다. 환자의 지불 능력이 있든 없든 의사는 진료할 책임이 있다는 내 입장과 클리닉을 경영해야 하는 그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경영자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점심시간에 자선 진료를 해도 좋다는 안이었다. 다만 시간 관리의 필요상 타임카드를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176. 나는 사표를 던져버렸고 마흔 여섯 살에 갑자기 새롭고 흥분된 프로젝트를 시작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이행” 워크숍도 그런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곧 이 워크숍을 열어달라는 요청을 전 세계에서 받게 되었다. 집에는 매주 1000통 가량의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전화벨은 거의 쉬지 않고 울렸다.

사후의 삶에 관한 내 연구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1970년대 전반까지 음왈리므와 나는 약 2 만명의 환자를 인터뷰했다. 모든 사례의 임사체험이 아주 비슷하여 체험의 진실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177. 죽음의 체험에는 전혀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것도 모든 사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이었다. 죽음의 새로운 정의는 육체의 죽음을 초월한 영역까지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고 나는 느꼈다. 육체 이외의 영혼, 단순한 존재와 생존을 뛰어넘는 무엇, 사후에도 연속하는 무엇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주어진 숙제를 다 마치고 나면 이제 몸을 벗어버려도 좋다.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번데기를 품은 고치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다.”

178. 죽음의 경험에는 고통도 두려움도 불안도 슬픔도 없다. 다만 나비로 탈바꿈해 갈 때의 따스함과 평온이 있을 뿐이다.

인터뷰한 자료를 분석하여 나는 사망 선고 후의 경험을 몇 단계로 정리했다.

182. 진정한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섬유이고, 영혼을 뜨겁게 달구는 불길이며, 정신에 에너지를 주는 것이고, 인생에 열정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한다.

183.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고난을 겪는다. 중요한 것도 있지만 무가치해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그것을 배운다.

선택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결국 각자가 선택한다.

요정의 증거

185. 인생은 시간과 함께 전개되지만, 교훈은 그 사람이 필요할 때에 찾아온다.

그 전 해의 부활절 휴가에 나는 하와이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내게는 인색한 사람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인색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긴장하고, 무의식에서는 사랑스러운 토끼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하와이의 구두쇠가 나를 폭발로 몰아갔던 것이다.

물론, 감정을 표출한 나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최고도의 수준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면의 부정성, 못다한 일, 내면의 까만 토끼를 꼭 없애야 한다.

189. 슈워츠 부인의 방문이후, 나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임사체험의 연구도 사람에게 수호령 또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신비체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마음을 열면 우리는 자신만의 영적 만남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191. 사진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정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사진에는 언덕과 숲이 찍혀 있었다. 두 번째 사진도 똑 같은 풍경이었지만, 전경에 키가 크고 근육질에 엄숙한 얼굴의 인디언 남자가 겹쳐 있었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사진을 찍는 순간에 남자는 곧장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고 장난기는 없었다.

나는 무아경에 빠져 마음속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두 장의 사진은 보물로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1994년의 화재로 다른 사진, 일기장, 비망록, 책들과 함께 타버리고 말았다.

미지의 존재와 채널링

196. 그날 밤 늦게 시카고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 세션이 있었다. 암실에 들어간 것은 B와 나뿐이었다. 다시 한 번 체험하여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때에는 B가 영과 교신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지만, 이윽고 세일럼이 나타났다. 세일럼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당신들의 가장 작았던 딸이 당당하게 살아온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세일럼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하며....” 그것이 퀴블러 가족의 애창곡임은 매니를 빼고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날 시카고로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을 매니와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매니는 비판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197. 그 무렵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킬 가능성을 가진 연구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수록 가족에게는 그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워졌다. 과학자로서 매니는 사후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내가 B부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매니의 견해 때문에 우리는 많이 다투었다.

198. 1976년 어느날, 아이들과 나는 매니를 우아한 이탈리아 식당에 초대했다. 매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이혼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 난 떠나겠어. 시카고에 아파트를 빌려 놓았어.”

199. 어느 날 강연여행에서 돌아와 매니가 돌아온 흔적을 발견했다. 파티를 연 듯 풀 주변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매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난잡함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았다. 매니에게 집을 주겠다고 전하고, 옷가지와 책과 침구만을 상자에 담아 에스콘디도로 보냈다.

삶의 커다란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도 나이 오십에 재출발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트레일러 하우스는 너무 비좁아 책을 놓을 곳은 커녕 의자 하나 둘 공간도 없었다. 사막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200. 일에 대한 정열이 돌아오자 힐링센터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세일럼의 도움으로 힐링센터에 딱 맞는 땅을 찾아냈다. 월퍼트 호수위에 있는 40에이커의 대지로 전망이 근사한 곳이었다.

그런데 나의 외곬으로 나아가는 마음과 비즈니스 감각의 결여가 승리를 거두었다. 플로스무어의 집과 가구일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니가 힐링 센터의 땅을 매입하여 내게 임대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윽고 한 달에 한 차례, 일주일간의 워크숍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대생과 간호학생,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이 삶과 죽음을 마주보고 더 건강하고 마음을 연 태도로 이행하는 것을 돕기 위한 워크숍이었다.

센터에 경제적 출자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B부부를 파트너로 대우했다.

마사는 심리극 클래스를 담당하면서 억압한 분노와 두려움을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신체운동을 고안했다. 마사는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변함없이 남편 B의 채널링 세션이었다.

202. 그는 장래에 변화가 일어나 이 그룹도 분열하여 B의 신용에 흠이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는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라고 페트로는 말했다.

미래에 대해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래는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페트로는 다른 누구보다 내게 변화를 준비하라고 충고하는 듯 보였다.

203. 영은 단지 지식을 제공할 뿐이고,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지 정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사용해 왔던 것 같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205. 눈을 감고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영이 빙의하자 남자는 갑자기 100살 노인이 된 듯 보였다. “너를 불러 들여야 했어.”

“중요한 일이야. 더 이상 우물쭈물하면 안돼.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일은 끝났네. 이제 두 번째 과제를 시작할 때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릴 때가 왔네.” 남자는 말했다.

207. 그리고 곧 ‘죽음과 그 후의 삶’이란 제목의 새로운 강연을 시작했다.

212. 몇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내 자신이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213. “분명히 유체이탈을 체험 한 거에요.” 간호사가 말했다.

명상도 하지 않고 두부도 먹지 않고 캘리포니아 출신도 아니며 구루도 바바도 없는 내가? “유체 이탈체험”이 무엇인지 그때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날 밤의 비상체험 같은 것이라면 언제든 날아오를 준비는 되어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

214. 유체 이탈을 체험한 후 나는 도서관에 가 그것에 관한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저자는 로버트 먼로라는 그 방면에서 유명한 연구가였다. 곧 버지니아에 잇는 먼로의 농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먼로는 그곳에 개인 연구소를 두고 있었다.

나는 방음부스로 들어가 물침대에 누웠다. 뇌는 그 펄스의 음에 의해 명상상태로 들어가 다시 의식의 심층을 경험하는 상태-바로 내가 찾는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218. 그것이 교훈이었다. 그 뒤에 오는 환희를 재확인하기 위해 천 번의 죽음이라는 공포를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인생 그 자체처럼, 한창 시련을 통과할 때 갑자기 ‘믿음’의 문제가 찾아왔다.

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지 않는다는 신에 대한 믿음.

신이 준 것이라면 어떤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는 , 나에 대한 믿음.

219. 눈앞에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연꽃 군락이 펼쳐졌다. 서서히 꽃들은 하나의 거대한 연꽃으로 변했다. 그 꽃 뒤에서 빛이 비쳐왔다. 그것은 점점 밝아져서 눈부시도록 영묘한 빛이 되었다. 나와 함께한 환자들이 보았다는 그 빛이었다.

221. 또 그 지복의 체험으로 삼라만상에 깃든 생명에 대한 자각, 즉 우주 의식이 찾아 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확신도 들었다.

222. 명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나에 대해 승려는 명상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죽어가는 환자나 아이 곁에 몇 시간이나 앉아 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가장 높은 형태의 하나입니다.”

산티 닐라야는....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음절 하나하나를 천천히 이어가면서 승려는 말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마지막 평화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 지상에서 여행의 마지막에 찾는 곳입니다.”

산티 닐라야 힐링센터

224. 1978년까지 1년 반 동안, 산티 닐라야는 날로 번창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한 어른과 아이의 심리적, 신체적, 영적 치유의 촉진” 을 내건 삶과 죽음, 그리고 이행 워크숍은 4박 5일이라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등록자가 넘쳐났다.

225. 산티 닐라야에서든 여행지에서든 나와 만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놀라운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소중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227. 삶은 폭풍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것과 비슷했다. 흙에 덮인 씨앗은 햇빛에 따뜻해 진다. 그 햇빛은 우리 모두에게 비치는 신의 사랑이었다. 누구나 배워야 할 교훈이 있고 삶의 목적이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

238. 내 믿음은 집요하게 시험당하고 있었다. 힐링센터를 잃고, B 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일련의 이상한 사건- 독거미, 브레이크 고장, 화재-으로 생명을 위협 받았다. 내 생명을 노릴 가치가 있을까? B와 그의 사악한 에너지로부터 떠나야한다고 생각했다. 남은 길은 오랫동안 꿈 꾸어온 그 농장을 사, 살아가는 속도를 늦추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믿음의 위기에서 또다시 새로운 임무에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에이즈였다. 그것이 내 여생을 바꾸었다.

241. 나는 처음으로 에이즈 환자만의 워크숍을 열게 되었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였다. 나중에 몇 번이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때도 나는 줄지어 고백하는 젊은이들의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참혹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기만, 거절, 고립, 차별, 고독등 인간의 온갖 부정적 행동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에이즈 환자들은 아주 훌륭한 스승이었다. 청년은 죽기전에 부모님과 꼭 화해하고 싶었다. 부모님과는 몇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워크숍 마지막 날에 청년이 말했다. “ 이 무서운 병에 걸릴 때까지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242. 약값과 입원비로 곤궁해진 에이즈 환자가 경제적 이유로 고립하는 일이 없도록 나는 털실 목도리를 짜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경매에 붙여 그 수익금으로 에이즈 환자를 지원했다. 에이즈는 전후의 폴란드 이래로 내게, 그리고 세계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싸움이었다.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미덕이 숨겨져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다는 미덕, 판단하지 않고 귀 기울인다는 미덕,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미덕이......

힐링 워터스 센터

245. 나는 자유로워졌지만 그 대가는 컸다. 많은 사람이 B의 채널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B가 그 타고난 재능을 악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의 고통과 번뇌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 쓰라린 경험을 겪는 것이 진정한 신뢰, 그리고 진짜와 가짜의 식별에 관한 교훈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든 것을 용서했지만 잊지는 않았다.

247. 드디어 차에서 내려 완만하게 이어진 구릉을 걸어 목장과 숲이 있는 300에이커의 땅을 바라보니 운전기사의 예언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인 1983년 7월 1일, 농장은 내 소유가 되었다.

249. 농장을 사고 꼭 1년후의 여름인 1984년 7월 1일, 나는 에스콘디도에 작별을 고하고 버지니아의 헤드 워터스로 이주했다.

252. 그 무렵부터 나는 보살핌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에이즈에 감염된 아기의 악몽을 꾸게 되었다.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된 것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농장에 에이즈 감염 아동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을 세우라는 소리를 듣고 부터였다.

255. 1986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내 동료 봅 알렉산더와 낸시 제익스가 배커빌 교도소의 에이즈 감염 재소자에 대한 정기적인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교도소라는 엄격한 환경에서 에이즈라는 비극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자비심 넘치는 극진한 간호를 받을 수 잇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회의적인 사람 모두에게 중요한 교훈이었다.

PART 4

겨울 독수리의 장

가시밭 길

“에이즈 아이들과 다른 데로 꺼져라. 우리에게 에이즈를 옮기지 말라.”

262. 집회가 끝난 것은 자정 조금 전이었다. 성과는 전혀 없었다. 남은 것은 견디기 힘든 좌절과 분노뿐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증오했다.

263. 1년 후 나는 싸움을 포기했다. 주위의 압력이 너무나도 강했다.

하지만 나는 곧 다음 계획으로 옮겼다.

최종적으로, 에이즈 아동을 입양하겠다고 나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미국 전역에서 350가정이나 되었다.

265. 의학은 언젠가 이 무서운 병의 치료법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전에 에이즈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우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오늘 하루 자신을 사랑했는가

267. “가족은 이래야 하는거야.” 내가 말했다. “모두가 살아있는 동안 축하해야 해.”

“맞아.” 에바가 말했다.

268. “에바, 나 죽으려나 봐.” 나는 말했다. “작별 선물을 하고 싶어. 지금부터 환자의 시점에서 죽을때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실황 중계할 게. 마음을 다한 선물이야.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기 시작했다.

“먼저 발가락 끝부터 시작되었어. 발가락 끝이 뜨거운 물에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야. 마비되었다가 풀어졌어.”

269. “몸 밖으로 나왔어. 후회는 없어. 케네스와 바버라에게 안녕이라고 전해 줘.” 남은 시간은 1,2초 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앞쪽에 눈부신 빛이 보였다. “드디어 졸업이야.”

빛에 확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 팔을 더 활짝 벌렸다. “갑니다!” 나는 크게 외쳤다.

271. 매우 유쾌하고 지적인 일흔 한 살의 룸메이트와 나는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장난꾸러기 십대 소녀 같았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내가 얼른 신호를 보내고 담뱃불을 비벼껐다.

272. “환자에게도 권리가 있어요. 퇴원서류에 서명하겠어요.”

농장에 돌아오자 나는 급속히 회복했다. 회복속도는 내가 입원해 있을 때보다도 더 빨랐다. 밤에는 푹 자고 식사도 좋은 것을 먹었다. 내 나름의 재활 운동 계획을 세웠다.

274. 가장 좋은 의학은 가장 단순한 의학이다.

“모두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웁시다.” 워크숍 끝머리에 나는 늘 그렇게 호소했다. 그것은 내 모든 경험의 요약이었다.

“ 그렇게 하면 그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치유함으로써 우리는 어머니 지구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감동어린 편지

7년간의 노동과 고투와 눈물 끝에 마침내 축제의 자리를 마련 할 수 있었다. 1990년 7월의 화창한 어느 오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센터 개원 축제가 열렸다.

278. 딸아이의 생명이 끝나야 해 끝났다는 것을 , 딸아이는 내게 와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을 모두 다 가르쳤다는 것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딸아이가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죽을 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지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내 삶에는 사명, 즉 손을 내밀어 생명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있다는 메시지가 나를 꽉 채웠습니다. “ 우리 모두 그렇듯이 케이티도 영원히 살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것의 본질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 사랑하고, 함께 나누고, 다른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접촉을 주고 받는 것, 이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있을까?”

죽은 매니가 꽃피운 장미

283. 오랫동안 나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워크숍 개최요청을 정중히 거절 해왔다. 흑인과 백인 모두가 참가해야 한다는 조건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지 2년 후인 1992년, 마침내 한 지붕아래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하는 것을 보증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워크숍을 열기로 했다.

나는 예순 여섯살로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 워크숍을 개최하게 되었다.

285. 시카고에서 거행된 매니의 장례식 때까지 나는 그 장미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매니와 화해하고 매니가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묘지에 모였을 때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묘석 주변의 땅에 열두 송이의 장미가 흩어져 있었다.

문득 바버라가 열 살 가량이었을 때 매니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는 내 사후의 삶에 관한 이론을 놓고 논의를 벌리고 있었다. 논의 도중에 매니가 바버라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좋아, 엄마 말이 맞는다면 아빠가 죽은 다음 첫눈이 오는 날 눈 속에서 빨간 장미가 피어날 거다.” 오랫동안 그 내기의 말은 가족만이 통하는 조크가 되었지만 , 지금 그것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확인해줘서 고마워요.”

다시 날아오르는 나비

287. 상실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나는 뭔가를 상실한 사람이 경험하는 심리상태의 변화를 연구하여 각각의 단계를 정의했다. 분노, 부정, 거래, 우울, 수용의 다섯단계다.

1994년 10월, 그 지독하게 추운 밤에 볼티모어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우리 집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을 목격한 나도 그 다섯 단계를 순서대로 경험했다.

289. 나는 고통을 그냥 긍정했다. 그러자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 올랐다.

“눈물의 강에서, 시간을 친구 삼아라.”

290. 1995년 5월 13일 밤, 나는 내 저서의 독일어판을 내는 일로 방문한 독일 출판사 사장에게 사막이 얼마나 사색에 적합한 환경인지 이야기 했다.

또 “뇌졸중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심해.”

295. 죽음 자체는 훌륭하고 긍정적인 경험이지만, 나처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연장되는 것은 실로 악몽이다. 그것은 인간의 온갖 능력, 특히 인내하는 능력과 평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소모시킨다. 1996년 내내 나는 끈임없는 고통과 마비에 의한 운동제한으로 시달렸다. 24시간 누군가의 간호에 의존하게 되었다. 프라이버시? 그것은 이미 옛일이었다.

296. 나는 지금 인내와 순종을 배우고 있다. 그 교훈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창조주에게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나 날아 오르듯이 내가 몸에서 떠날 때를 정해놓은 것은 창조주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에 있다. 우연은 없다.

에필로그

300. 모든 사람은 같은 근원에서 왔고 같은 근원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악몽, 신이 내린 벌처럼 보이는 모든 시련은 실제로는 신의 선물이다. 그것들은 성장의 기회이며, 성장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먼저 자신을 치유하지 않고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다.

준비가 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

301. 사랑이 있다면 어떤 일도 견딜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내 바람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에......



*** 내가 만일 저자라면

금토일 3일을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10층 건물에 둥둥 떠서 지냈다. 힘들다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며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배워나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이름일 만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책을 쓴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다섯 단계를 설명하고나면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옮기지 못한다. 그렇게 그의 처음 이론이 강렬했었고, 그만큼 우리 문화가 죽음을 공개토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처음 맞이할 때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들,
부정-분노-타협-우울-순응

사실 이 다섯 단계는 꼭 틀에 맞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정도와 속도에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나 사실과 현장 인터뷰에 근거를 둔 이 감정들은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솔직하게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풀어내면 치유에 다달을 수 있다.

최근에 <인생 수업> 과 <상실 수업>이 발간되면서 죽음 묵상이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 시켰다. 작가 자신이 반신불수가 되어 그의 긴 인생을 회상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진정성이 구절 구절에 함께 있기에 함께 울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공부이다.

퀴블러 로스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명상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20살 때부터 국제 평화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전후의 어려운 상황을 돕고 재건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누구든 그녀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손과 발을 다 담궜다. 이런 사랑의 힘은 분명 천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알프스 산기슭에서 대자연을 벗하며 키운 호연지기와 가족의 사랑이 고운 심성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매우 솔직하고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 분명했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매우 성실했고, 뛰어난 직관력으로 결정을 했다. 의학을 선택한 동기도 시골의사가 되고 싶어서 였고 의사가 되고 난 후에는 인도로 가서 봉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염원만으로 안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직관이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정신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고 죽음의 여의사가 된 것도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나가며 인생의 수레의 바퀴를 주체적으로 끌어나갔다.

어린아이와 에이즈 환자에 대한 그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정말 놀랍다. 그녀의 또다른 뛰어난 책 <어린이와 죽음>은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른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아이들 속에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놀라운 용기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녀가 암에 걸린 아이에게 그림까지 그려서 보내준 편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야. ”

죽음에 관한 책을 쓰고 죽음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퀴블러 로스는 현장성을 활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자신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그녀의 독특한 감정이입이 이 모든 일을 치유의 장면으로 이끌어서 화자와 청중이 서로 깊이 공감하게 하는 것이 그녀의 업적인 듯하다. 매순간, 필요한 이야기가 대중 속에서 항상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따르기보다 경영마인드를 앞세우는 병원장면을 떠나 그녀가 힐링센타를 세웠을 때 그녀는 사후의 생에 관한 연구를 더 깊이하게 된다.

임종을 지키고, 또 근사체험을 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된 사실들을 그녀 자신도 체험에까지 도달한다. 뛰어난 직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든지, 직관을 강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녀의 후반 생애는 이 사후생에 관한 연구가 많고 이런 일을 믿지 않는 과학자 남편은 그녀를 떠나고 만다.

이 사후생에 관한 이론은 우선 기본을 공부한 다음에 더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명상과 영성과정에 꼭 뒤따라 나오는 문제이기에 그냥 덮어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므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퀴블러 로스의 결론은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생의 완성이며, 졸업이며, 또 다른 출발을 하기전의 작별인사이며 새로운 시작전의 종결이다. 죽음은 위대한 변환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우리에게 권유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들은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줄 거예요. 그것은 쉽게 놓쳐버리기 쉬운 것들이죠.”

그녀의 인생은 명예만큼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눈물의 강에서 시간을 친구로 삼는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역경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허물을 벗은 나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찾아와 나아갈 곳을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섬세하게 깨어 유심히 관찰하며 그녀의 사랑에 닿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같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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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근께
2009.12.01 20:46:40 *.131.127.100

^^
'나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임사체험에 관한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죠.
우에... 나 한테 이런 일이... 믿어지지 않는 황당함,
 어느 날,  간뎅이가 부어서 선무당이 될지도... ^^
프로필 이미지
무릇 범
2009.12.02 23:08:57 *.248.91.49
 다녀온 사람들은요,
얼굴이 환히 빛나고요,
되돌아오고 싶지 않지만 아직 때가 아니어서 다시 세상으로 와야하는 거래요.

그렇기때문에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거나, 정신병리학적 설명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퀴블러 로스가 말하고 있어요.

늘 마음을 열어놓고 그 체험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답니다.

그러니 자세히 설명을 좀 더 해줘봐요. 근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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