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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3일 15시 52분 등록

북리뷰 39 :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궁리

***저자에 대하여

김열규는 1932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그의 반백 년 연구인생의 중심은 ‘한국인’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두루 섭렵한 그는 한국인의 목숨부지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녔다. 특히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끊임없는 탐독耽讀의 결과였다.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어머니의 언문 제문은 그에게 최고의 고전이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당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더미 속에서 그는 헤르만 헤세와 앙드레 지드를 만나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토마스 만을 만났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국 병사들이 버린 책을 통해 영미 문학의 원전을 읽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김열규 교수. 그를 키운 건 전쟁도 이데올로기도 아니었다. 버려진 책더미 속에서 주운 무수한 의미와 상징! 그에게 책은 스승이자 어머니이고, 죽음이자 삶이며 그를 지탱해준 밥이었다. 마지막 『조선어』 교과서에서 소로의 『월든』까지, 해방 전 북키드에서 한국학의 석학이 되기까지, 『독서』는 책과 더불어 칠십 평생을 소요유했던 노학자의 독서 일기다.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 동ㆍ서양의 고전을 한입에 먹어치웠던 김열규 교수. 그의 탐식耽識의 세계에 빠져들다 보면 낯익은 세계 문인의 지도가 그려질 것이다.

지은 책으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한국인의 자서전』,『공부의 즐거움』,『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한국의 문화 코드 열다섯 가지』,『고독한 호모디지털』 외 다수가 있다.

***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목차

프롤로그
한국인의 죽음을 위한 서설 11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29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44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59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64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149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158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165
과잉 상태의 죽음 177
열린 죽음 196
죽음이라는 전역(轉役) 204

제4부 죽음의 문화적, 신화적 형상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217
신화가 일군 죽음들 258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위한 몇 가지 슬픈 사연들 273
죽음의 유머 288
에필로그
죽음아, 이제 네가 말하라 305

프롤로그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11. 죽음을 죽는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 할 얘기도 없기 때문이다.

12. 인간에게는 죽음이 생물학 적인 사실로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과 영혼의 종교학에 짙게 물든 빛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든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명료하게 정신 및 영혼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목적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13.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다름 아닌 인간적 삶의 양상이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14. 인간은 죽음을 문화로 가꾸어 왔다.

죽음을 문화가 되게 가꾸었고 뒤 이어서 죽음을 문화 속에 가꾼 것이다. 우리들은 소극적으로 죽음이 문화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사형제도가 빚는 죽음, 전쟁이 빚는 죽음은 문화가 생산한 죽음의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16. 우리 한국인들의 경우, 조선조 말기를 거쳐 극히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도 확연하게 가족 구성원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죽은 이는 가버린 가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서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호적부에서 삭제될 때, 죽은 이는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서 삭제되는 것이다. 사망신고서는 영원한 퇴거증명서이다.

20. 죽고 난 뒤에도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서, 그것도 보이지 않는 구성원의 하나로서, 삶의 영토, 집안의 울타리 속에 계속 머문 죽음, 그것이야말로 가족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죽음이었다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생전과 변함없이 삶 쪽으로 향해 돌려 세웠던 것이다.

이승을 향해 돌아서 있는 죽음, 이 특이한 죽음을 생산하는 데에 있어 효의 관념이 제 몫을 다한 것이다. 생효에 못잖은 사효라고 하는 게 정확하기는 하겠지만, 굳이 어느 한쪽에 무게를 더 매긴다고 한다면, 피치 못하게 사효 쪽에 기울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23.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을 ‘고애자’라고 부른다. ‘고독한 비애에 젖은 서글픈 자식’ 이란 뜻이다. 자식이 나이가 아무리 많고 살아있는 가족이 아무리 많아도 관계없이 ‘고애자’라고 부른다. 이 자기연민, 자기 비하의 감정이 죄업의식과 짝 지워져서 죄업의식을 돋우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저 깊은 골짝에 걸려있는 소슬한 다리 하나

이럴 때, 죽음은 눈물과 가시가 된다. ‘눈물에 젖은 가시’와 ‘가시 돋친 눈물’이 곧 죽음이다. 눈물에 얼룩진 가시나무가 죽음이다.

24. ‘열녀’라는 관념은 , 관념을 벗어나 이 땅 가족사나 인간사에서 제도화된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열녀의 얘기는 물론,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때로 비정하기도 한 게 사실이다. 한데 ‘열녀’라는 관념에는 ‘늘’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죽음이 따라붙고 있다. 아니 짙게 엉겨붙어 있다. 죽음의 습진 그늘, 그 안쪽에 열녀는 이끼 낀 바위처럼 웅승크리고 있는 것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었다기 보다, 자신의 실수로 해서 남편을 죽게 만든, 불쌍하고도 몹쓸 지어미의 신세를 마감하는 최선의 길로 죽음이 선택되었다. 그렇다. 이럴 때, 죽음은 뜻밖에 자기방어였던 것이다. 이때 婦(부)道(도)란 죽어서 완성하는 것이었다. 젊은 아내는 적지않은 경우 순사해야 할 존재로 기대되었다. 자신의 죽음이 없고 남편의 죽음의 그늘인 죽음을 죽어야 했던 것이다. 윗사람이나 남편의 죽음이 이토록 위압적이었다. 태산의 무게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25. 혼과 육체, 문화와 자연, 생물과 인간, 현실과 비현실, 탄생과 죽음- 이같은 양분법적 대립은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고 또 실제로 용납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혼과 육신의 대립만큼, 또 이승과 저승의 대립만큼 명쾌하게 가름되지 않는 어정쩡한 언저리가 삶과 죽음 사이에 껴들어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주 가름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름은 하면서도 그 가름을 넘어선 넘나듦이 있게 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 뿐이다.

삶과 죽음의 저 깊은 골짝 사이에는 늘 다리 하나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눈에는 안 보이나 꽤나 소슬하고 질긴 다리 하나가 얹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적인 낱말, 전통적인 뜻을 지닌 낱말인 신이 지닌 특권이라고, 혹은 권능이라고 불러도 좋다.

제 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31.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그래서 실타래같은 것. 그게 죽음에 부치는 우리들 생각과 감정의 굴곡이다. 삶에 허덕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음에 허덕이는지도 모른다.

43. 죽음으로 해서 생은 에누리없이 일회성으로 제약되고 만다. 한데 이 죽음으로 한계지워지는 생의 일회성이야말로 생의 진지함이며 집요함의 혹은 열정의 근거라고 릴케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아! 오직 한번뿐이니까 성실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는 삶, 그건 죽음이 안겨준 선물이다. 이래서 릴케의 죽음은 삶을 향해서 돌아앉아 있다. 타나톨로지의 역전극이 여기에도 있다.

죽음의 거울에 비쳐서 더욱더 확연해질 더더욱 굳건할 삶의 얼굴! 이 책은 그걸 찾고싶다. 아니 갖고 싶다.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45.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지레 내다봄으로써 죽음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항시 죽음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드디어는 죽음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은 있을 수가 없다. 적어도 인간에게 이 말은 진실이다.

삶에 철들면서, 사람은 죽음을 사유하면서 살아간다. 죽음의 문제는 종국적으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으로 곤두서게 되는 셈이다.

어차피 안 풀릴 테니까,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을 테니까, 해결은 미룰 수 있는데까지 미루어보자는 것이다. 대상이 보기 싫으면 사람들은 눈을 감는다. 그렇듯이, 죽음 앞에서 눈을 감는데 까지는 감아보자는 것이다.

46. 죽음은 살아있는 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짙은 그림자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다만 모습을 감춘 것뿐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잠복한 병과 다를 게 없다. 여기서 우리들은 잠복기가 있는 병일수록, 또한 잠복기가 긴 병일수록 위협적이고 피괴적이란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잠복기동안 가성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병균을 위한 병소가 된다. 병의 텃밭이 되어 병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병에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47. 괴테는 그의 저 유명한 <에커만과의 대담>에서 엄청난 신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사람이 죽음에 다다라, 제 자신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아무도 못할 일이 남아 있노라고 확신한다면, 그때 죽음 보고서 물러가라고 하라. 그러면 죽음도 물러가리라

죽음을 일시 그늘에 눌러두는 것이 삶의 단단한 확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백치다운 생각이다. 그늘과 대조가 되지 않고는 빛이 제대로 밝을 수 없듯이, 죽음을 외면한 삶은 온전할 수가 없다. 애써서 죽음을 밀쳐놓았을 때, 삶도 함께 밀쳐놓고 만 것이다.

48. 자신 속에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반응에는 죽음을 삶이 끝난 그다음의 시간의 문제로 다루려 하는 태도가 있다. 이것은 영원한 미래라는 때매김으로 자기 죽음에 취해 보이는 반응이다. 이럴 경우, 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해진다.

51. 삶이 목적이 아니고 과정에 머물 때, 삶은 그저 물살에 섞인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게 되고 만다. 기껏해야 몇 번의 출렁거림에 불과하게 된다. 삶은 언덕에서 바라보는 개울물의 흐름, 그것과 같아지고 만다.

55. 죽음을 삶 다음에서, 삶의 끝자락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숙제를 미루는 것과 같다. 그것도 지금 당장에 해야 할 숙제를 내일에, 모레에 미루는 것과 같다. 죽음은 삶의 한복판에서 생각해야 한다. 네거리 한복판에서 우리의 행방을 결정해야 하듯이 말이다.

56. 죽음에 의해 삶의 한계가 지워진다는 그 엄정한 현실 앞에서 오히려 삶을 향해 돌아 설 수 있어야 한다.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등져서는 안된다. 아니 단연코 그 거꾸로라야 한다. 죽음 때문에 도리어 삶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게 삶이라면 우리들은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하고 사랑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 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61. 한국인들도 물론 그들의 삶만큼 다양한 죽음을 겪어왔고, 죽음의 생각들을 간직해왔다. 삶이 가꾼 죽음을 간직해온 것이다.

62. 곡은 곡성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울음은 울음이되 예사 울음과는 다르다. 울음은 생리이고 곡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65.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 남의 집 부고를 집안에 들여놓지 않는 풍습.

75. 초상에는 초혼 절차가 있다. 넋 부르기 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절차는 넋을 불러서 되돌이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복,복,복”이라고 세 번 소리친다. 숨진 사람의 근친중 한사람이 집안의 비교적 높은 데에 올라가서 숨진 이의 속옷을 흔들면서 소리치는 복이란 소리는 다름아닌 ‘되돌아올 복’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77. 넋이 일시에 육신을 떠났다 되돌아오면 잠이요, 영 떠나서 안 돌아오면 그게 곧 죽음이다. 죽음은 그래서 끝없이 긴 잠이 되고, 잠은 한참동안의 죽음이 된다. 죽음은 넋이 길이 몸을 떠나간 잠이다.

79. 한국인의 죽음을 정의 내려보자. 죽음은 이승의 숨이 끊어지고 넋이 땅 밑 저승으로 또는 저 너머의 저승으로 떠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9. 우리들의 장례식은 남달리 음산하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굴건과 상복의 둔중한 삼베빛, 탁한 향내음, 그리고 곡소리 등이 어울려서 사람들을 내리 누른다.

우리들의 무덤자리, 공동묘지는 또 어떠하였던가. 돌아앉은 외딴 곳, 해가 지면 도깨비며 귓불이 나돌고 한낮에도 여우가 울어대는 그런 곳이다.

남의 집 상가에 다녀오면 부정을 타지 않게 마음을 쓴다. 상가집의 부정을 타서 묻어오는 살이 이른바 ‘상문살’이다. 상가집살이란 뜻이지만 이런 경우, 죽음 그 자체가 아예 살이 된다. 살이란 인간 둘레를 떠돌고 있는 독하고도 매운 기운을 뜻한다.

123. 넋이 영영 육신을 떠나는 것, 그것을 한국인들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 넋이 곧 생명력의 바탕 또는 생명원리를 의미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죽은 사람의 넋은 따로 귀신이라 일컬어왔다. 귀신이란 곧 사령, 말하자면 죽은 넋이다.

귀신이 저승으로 간다는 것은 원칙일 뿐이다. 그것도 예외가 많은 원칙이었을 뿐이다.

저승을 못가는 넋은 이승을 계속 떠돌게 된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떠돌이 넋, 방황하는 넋들이다. 이들을 통틀어 객귀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떠돌이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떠돌이 넋, 객귀들은 삶의 변두리와 죽음의 변두리 두 어름에 어정쩡 걸려 있는 셈이 된다.

124. 죽은 이가 삶에다 남겨놓은 문제, 그것을 한국인은 원한이라 불러왔다.

131. 실제로 옛날 기준으로 따져서 ‘갖춘 삶’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생각해보자. 나이로는 환갑, 진갑을 넘기기까지 살아야 한다. 자식은 적어도 5남매 정도는 슬하에 두었어야 한다. 자산이 많아야 하고 벼슬이 높아야 하고 이름을 세상에 드날려야 한다. 부귀영화가 빠진 인생이란 날개 떨어진 새와 다를게 없었다.

132. 그 어려운 것들 다 갖춘 끝에 드디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고통없이 잠시 앓는 듯하다가 편히 잠들 듯이 죽어야 한다. 그것도 안채 안방에서, 혹은 안사랑에서 ‘와석종신’을 해야한다. 평소의 잠자리에서 한평생을 마쳐야 한다. 게다가 그 임종자리를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있어야 한다. 초상이 장중하고 은성해야 하고 무덤이 명당이라야 하고, 삼대에 걸쳐 봉제사할 후손이 끊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으로써 가까스로 한국인의 죽음은 ‘갖추어진 죽음’이 되는 것이다. 이를 ‘호상’이라고 하는데, 참 사치스럽고 욕심 사나운 죽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38. 사람들이 화생을 꿈꾸기 시작한 단서의 하나는 자연이다. 그것들이 다름아닌 푸나무요, 사슴뿔이요, 나방이의 번데기요, 곰과 개구리요, 그리고 달과 대지 및 계절의 순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제 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155.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부정은 정화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어졌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그것의 억압은, 그리고 침묵은 부정과 공포의 반증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억압, 소외, 그리고 이화 등으로 죽음을 밀어내고 드디어는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자 드는 것이다. 무관심은 잔인의 또 다른 표정이다. 그것은 고요한 잔혹이다. 소란한 잔인의 또 다른 단짝이다.

160.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163. memento mori 곧 ‘죽음을 기억하라 ’라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의 뇌리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있던 자는 죽어서 남들의 뇌리 안에 자리 잡을 틈이 없다.

166. 삼일장이 보편화된 것은 상례가 극단적으로 간소화된 대표적인 보기이다. 임종, 고복, 성복, 소렴과 대렴, 우제, 곡, 출상, 소상, 대상, 그리고 상복에 이르기까지 제반 상례의 절차는 상당한 부분이 이미 소실되고 일부는 흔들리고 있다.

171. 임종에 다다른 사람의 코에는 엷은 비단이나 솜이 올려놓아 진다. 숨결을 따라서 부풀고 수축하고 하면서 미동하던 박사가 멈추면 그걸로 ‘숨짐’ 혹은 숨 끊어짐‘이 확인된다.

179. 우리 한국의 경우는 조석곡, 빙시벽곡, 벽용 등, 몇 가지로 곡은 구분되어 있다. 조석곡은 장례기간 동안 문자 그대로 상주가 아침 저녁 제를 올리면서 곡하는 것이고, 빙시벽곡은 시신을 붙들고 몸부림치면서 곡하는 것이다. 벽용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굴리면서 하는 곡중의 곡이다.

187. 한국에서는 전남의 다시래기를 전통으로 하는 여러 가지의 상례놀이로서 울음과 웃음, 비탄과 농탕질이 공존하는 소용돌이를 지적할 수가 있다. 울음으로 감정이 촉발되면, 그래서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면 절로 다른 색조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이다.

191. 이처럼 한국인의 죽음은 달라지고 말았다. 그로써 죽음은 그 자신에게 산자들의 몫 만한 역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죽음도 여기 이곳, 지금 이시간에 국한되어 있다, 그 주어진 짧은 토막 시공이 지나면 더 이상 죽음이 기댈 언덕은 아무데도 없다. 누구에게도 없다. 몇사람의 짤막한 추억이 유일한 언덕이다. 우리들은 이제 죽음에서 시간을 뺏고 공간을 약취하고 말았다.

192. 세부를 들여다볼 때, 무엇보다 상품화되고 짐이 되었다. 장례는 수주로 치러지는 공사 같은 것이다. 죽은 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산 자 위주로 생각해서 짐스런 속신은 여지없이 사라졌다.

202. 죽은 이의 영이 귀신이 된다는 속신은 한국인의 제사에서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한국인에게 돌아가신 조상은 누구나 귀신이다. 죽음을 별리 또는 단절이나 격리로써 겪고난 다음, 한 인간은, 정확하게는 한 인간의 영은 귀신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귀천과 편입은 같은 뜻이다. 그 결과, 한 인간의 죽음은 하늘로 향해서 열리게 되었다. 그것은 아울러서 삶 또한 하늘을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212. 이제 당장 오늘의 우리들은 죽음을 다만 산 자들에게서의 절단, 격리로서만 처치하는 간단한 절차를 상례라고 부르고 있다. 죽음은 오직 끝 일 뿐이다. 덩달아서 삶과 연계되는 것이 거부되었다. 가령, 영혼이 안 믿어지는 상황에서 화장은 다만 소각일 뿐이다. 지우는 일이고 없애는 일이다. 죽음은 산 자들에 의해서 그 미래를 약탈당했다. 현실과의 연계의 고리며 끈도 절단 당했다.

213. 죽음은 적어도 한 때, 인간에게 주어진,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승화 바로 그것이었다. 승화 자체거나 아니면 하다 못해 승화의 계기 노릇은 해낸것이 다름아닌 죽음이었다.

214. 그러나 오늘날 죽음과 대체될 것도 교환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징성도 없다. 뒤도 속도 심지어 시신 이외의 어떤 객관적 지시물도 없는 허구인 기호로 죽음은 우리 앞에서 지워져가고 있다. 통과의례가 못되고 다만 종지의 처리일 뿐인 그 상례에서 모든 것이 종결되고 아니 소실되고 나면 남는 것은 무, 없음, 그것 하나 뿐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죽음을 죽어가고 있다. 죽음마저 박탈당하고 만 것이다. 죽음이 없는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죽음이다.

제 4부 죽음의 문화적, 신화적 형상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217.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살기위해서 파리로 와서는 죽어가고 있다’ 릴케.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죽음에의 존재’가 아니다. ‘죽음에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다.

자신의 삶의 징후 구석구석에서 인간은 죽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218. 인간은 자신의 종말인 죽음을 지레 넘겨다본다. 종말에 서있는 자신을 미리 넘겨다본다. 삶은 죽음을 앞질러서 비로소 삶이다.

누군가에 의해 내던져진 주사위 때문에만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던지는 주사위 때문에도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스스로 연출하는 창조가이다.

221. 종말로서의 죽음을 삶의 재편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것을 불교식으로 부르게 되면 불퇴전의 용기라고나 할 것이다. 절벽 끝에서 뒤돌아서는 게 아니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엄청난 일을,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죽음을 더불어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이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죽음을 예성하며 삶이 재구성될 때부터 사람들은 죽음조차 살게 된다. 에누리 없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사는 것이다. ‘죽음을 산다’는 것은 결코 우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릴케 말대로 하면 삶과 죽음을 합친 전체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22. ‘죽음을 산다’는 것은 모순어법이다.

234. ‘본풀이’ ‘신풀이’, 이 경우 신의 내력이나 근본에 대해 풀이하는 것, 즉 얘기하는 것이 곧 풀이다. 그것도 신에 관한 얘기, 곧 神(신)記(기)가 다름아닌 ‘풀이’다.

살풀이나 액풀이의 풀이는 망칙한 귀신, 악한 영혼을 물리치는 행위인데 비해 본풀이의 풀이는 얘기다. 신화가 ‘풀이’로 표현되는 곳에 한국 신화의 한 특수한 국면이 있다.

235. 무속 신화 <바리데기>는 죽음의 본풀이, 죽음풀이를 하고 있다. 오구대왕의 본을 밝히는 것으로 그 신화는 시작되고 있다.

236. 바리데기는 버려진 공주다. 일곱 번째(아홉)로 태어난 딸이기에 버려진 바리데기 인 것이다. ‘소박데기’에서 처럼 접미사 ‘~데기’가 이미 이 공주의 불행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마음씨 착한 불운의 바리데기 였던 것이다.

237. 무당은 육신을 이승에 둔 채로 영혼으로 피안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당의 ‘자유혼’은 보통 인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자유혼이란 육신에 매여있는 이른바 ‘육체혼’과는 대조적이다. 육체를 떠나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혼이다.

243. 원통하게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에 머물러 배회하게 된다.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 원혼인 손각씨, 장가를 못간 채 죽었기에 원한을 품고 있는 몽당비 귀신 등이 그 에들이다. 장화와 홍련의 넋이 그렇고, 밀양부사의 딸 아랑의 넋이 또한 그렇다. 니들의 경우는 원한 때문에 주검마저 삭지 못한다. 그 영혼들은 무사히 서천으로 가야한다. 원혼의 원한을 풀어 서천에까지 인도하는 굿이 오구굿이다.

256. 바리데기 신화의 성공담이 전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제어하고 관장할 수 있는 능력에 부쳐서 인간이 공유했을 꿈이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사이를 바람처럼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권능에 대한 꿈, 끝으로 죽음이 떠나감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57. 생명의 꽃이 피고 목숨의 물이 샘솟고 있는 곳이 저승이다. 그곳은 생명있는 곳의 원천이고 본향이다. 거기로 가는 것이 되돌아감이고 복귀, 그나마 원천회귀가 아니라면 말이 안된다. 그것은 불행히도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놓쳐버린 죽음이다. ‘돌아가는 죽음’, ‘복귀하는 죽음’은 ‘떠나가는 죽음’에 떠밀려서 죽고 만 셈이다.

265. 이 자유혼은 육신의 생사를 초월해 있는 영혼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슬픈 육체적 한계를 넘어 서있다. 숨이 다한 뒤, 육신의 멸각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육신의 멸각을 넘어서서 있을 인간생명을 기원하면서, 그것을 비원하면서 자유혼의 개념은 생겨난 것이다.

266. 죽음이 움직일 수 없는 한계라는 것, 그 한계를 넘어서 간 누구도 되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사실. 죽음이 육신을 기준으로 하는 한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삶의 막다른 장벽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에 대한 통찰이 자유혼을 생각해 낸 것이다.

세가 둥지를 떠나는 것이 어찌 새의 죽음이랴.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떠나는 것이 어찌 병아리의 종언이랴. 어둑어둑한 골짝과 골짝을 벗어나 밝은 하늘로 치솟는 해가 어찌 해의 임종이랴. 그리고는 가볍게 나는 새가, 푸닥거리며 종종걸음을 치는 병아리가 그리고 어둠을 떨치는 빛나는 태양 같은 영혼이 있음 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69. 인간은 한계 앞에서 비로소 인간다워진다고 한다. 인간은 좌절의 덫에 걸려서 흘리는 동통의 피를 머금고 자라는 꽃이다. 인간은 자신이 고양이에게 쫓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쥐라는 의식을 더불어 스스로에 눈뜬다. 한계와 좌절, 그리고 극한은 인간 존재를 비쳐내는 거울이다. 자유혼은 그 거울에 의해서야 비로소 모습이 드러난 인간의 존재성이다.

제 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275. “당신네들이 나가라!” 필자의 칼럼은 혼자서 이렇게 용을 썼다. 공동묘지는 기왕에서부터 거기 의연하게 있어 왔다는 것. 그걸 악당을 내몰듯이 나가라고 악을 쓰면 정말이지 문간방 얻어든 주제에 떠돌이가 난데없이 남의 집 안방 차지하려고 드는 것이나 진배없이 경우도 염치도 없는 짓이란 것 등등 논리를 편 끝에 “산 자들이여. 당장 너희가 나가라!”라고 혼자 기를 쓴 것이다.

277. 죽음은 어차피 우리들 누구나의 것이다. 삶에 따라 붙는 개인적인 차이는 죽음의 경우 아주 현저하게 줄어든다. 죽음은 남의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 타인에 대한 윤리의식은 죽은 이를 향해서도 지켜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죽음을 향한 살아있는 자의 윤리의식이 아쉽다.

280. 죽음은 시신의 부란을 수반한다. 송장이 쉬운 말로 해서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를 풍기는 건 사실이다. 당연히 혐오의 대상일 수 있게 된다. 장례식은 바로 이 혐오감을 사전에 막아내는 방패막이 구실을 한다. 염습이 그렇고 수의 입힘이 그렇지만, 마침내 저 화사한 꽃상여에서 죽음의 미화 작업은 절정에 달한다. 호남지역 같으면 ‘다시래기’로 미화작용은 극화된다. 그럼으로써 장례식은 아름답고도 거룩한 것이 된다.

282. 경건과 엄숙, 그리고 진중함, 그것들은 상례의 분위기고 표정이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정신이다. 그것은 죽음이 그 자체로 경배의 대상일 수 있고 숭배의 염으로 대할 무엇인가 초인적인 것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두려움이 무게를 더한다 해도 그건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외경심을 더한층 다지는 것으로 작용한다. 죽음을 대하는 이같은 마음의 자세야말로 인간적 종교심의 가장 구경의 으뜸일지도 모른다.

286. 첫째,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죽음을 不(부)淨(정) 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 둘째, 세계의 어느 민족이나 다같이 죽음에 공포심을 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경우는 소위, 원령이며 객귀와 맺어지면서 죽음의 공포를 증폭한 것, 셋째, 상례에서 아예 제도화된 울음이 죽음에 대한 비감을 부추긴 것, 넷째 위의 세가지 경향과 맞물려서는 한국인이 죽음에 대한 종교적이고도 철학적인 통찰을 그다지 치러내지 못한 것 등 크게 네가지를 들었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을 붙이지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287. 스펜더가 밝은 빛살로 ‘데드 마스크’를 보듯이 우리도 또한 삶의 해맑은 빛살 속에서 정을 붙여야 한다. 그러면 그 가뜩이나 거룩한 호스피스가 더욱 더 거룩해 질 것이다.

289. 저 부드러운 어둠 속에 조용히 들어가지는 마소서
         노령은 해질녘에 타올라서는 울부짖어야 할 것이오니
         노하십시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노발대발 하소서

297. 사물을 보는 익을 대로 익은 눈, 사물과 세계를 더불어서 완숙한 시선이라야 비로소 체관이요 달관이다. 달통한, 갈 데까지 간, 더 이상 다다를 때가 없는 인간 시야의 궁극과 정상이 곧 달관이다. 체관의 체는 워낙 ‘살필 체’다. 무엇인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본질 직관이라야 체관이다.

301. “죽음이여, 교만치 말라!” 다함께 이들 일화를 생각하면서 죽음에게 던지고 싶은 심중의 말 한 마디. “죽음이여, 거들먹대지 말라!”

에필로그
죽음아, 이제 네가 말하라

305. 군데군데 옛죽음이 오늘에 끼친 그림자 같은 것도 조금씩 들여다보고자 했다.

306. 오늘의 죽음, 탐탁한 얘깃거리가 아니다. 죽음이 만신창이다. 어디 한 구석 빤한 데가 없는 것 같다. 삶이 찟기고, 할키고 있는 이상으로 죽음이 결단나고 있다. 죽음의 파국, 그게 이 시대의 징표다.

308.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끈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쓴 김열규 선생은 학문적 업적이 매우 알려진 사람이다. 서강대학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에는 고향에 돌아가 밭을 일구며 가끔 빛나는 글을 써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서관에 들러 잠깐씩 그의 책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생각이 독특하고 발상의 전환을 불러오는 해학과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근사하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이 말은 귀에 익어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종교에서도 죽음과 관련해서 언제나 서장에 뜨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화인류학자의 책이니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첫 장을 열게 된다. 이 책의 첫 장에 있는 <책머리에> 라는 글이 매우 인상적이다. 옮겨 적어두어야 겠다.

손이 떨렸다.

‘한국인의 죽음론’이라는 부제를 덧붙여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를 써 나가자니까 손끝이 나도 몰래 떨렸다.

그런 떨림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시종 이 책을 꾸려갔다. 스스로 진중하자고 스스로 숙연하자고 다짐두면서도 드디어는 환하자고, 웃는 웃음이기보다는 머금는 웃음의 은은함을 지켜가자고 다짐두면서 책을 엮었다.

믿기지 않는 얘기이지만, 이 책이 적어도 한국 인문학 영역에서 최초로 간행되는 ‘죽음론’일 법도 하다는 생각 때문에 다짐을 거듭거듭 되새겨야만 했다.

“아마도 죽음론에 관한 첫 책일 겁니다” 라던 궁리출판 이갑수 사장의 말은 그래서 권유나 권장이기 보다는 채찍이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우리는 이것들을 죽음과 더불어서 경험한다. 더 이상 비길 게 없는 엄청난 감정의 복합체다. 그 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어둡고 습지고 침울했다. 공포롭기조차 했다. 하지만 끝내는 밝음과 환함으로 책을 끝맺자고 생각했다. 책에 더러 중복을 저질러가면서까지 염화시중의 미소로 마무리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

삶을 다그치듯 죽음을 잊지 말자.

책장을 덮고나서 다시 이 ‘책머리에’를 읽어보니 저자의 마음이 훨씬 더 와닿는다.

이 책은 주로 고대의 옛죽음을 설명하고 어떻게 이 옛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남아있는지를 밝히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다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현세의 죽음을 돌아보고 죽음의 파국, 결단 난 죽음으로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있으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도 갑자기 슬퍼지면서 옛사람들의 정성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음을 부정한 것으로 보며, 내 집안만은 그 불행이 피해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생각이 자라는 과정에서 있었던 한 단계라고 생각하고 싶다.

상장례 의식으로 본 한국인의 죽음관은 동일한 주제로 책을 쓰려면 꼭 한번은 공부를 해보아야 할 영역이었는데, 다행히 이 책이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귀신의 이야기와 제사의 의미, 바리데기와 오구굿을 다룬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삶의 의미를 찾는 곳까지 끌어올리는 생각은 주로 릴케를 인용했고, 서양의 역사에서 사례를 많이 인용했다. 도교와 유교가 섞인 듯한 우리의 죽음 철학은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긴 역사적 발전과정을 다 설명해 나가자면 한권의 책으로도 어림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책머리에 밝혔지만 이 책은 정말 동일한 이야기가 3-4번씩 반복되고 있다. 몇가지 사례는 책을 읽는 동안 저절로 외워질 만큼 반복 설명되어 있다. 짐작컨대 너무 인류학적 연구의 영역이 넓고 깊어서 어디까지 설명해야할 지 한계를 설정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일의 반이기 때문에 그 방대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대략난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몇 개의 이야기를 주제로 반복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는 한다. 그러나 조금 아쉽다. 기대해 볼 수 있는 학자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191쪽의 문장 하나를 옮겨보겠다.

이같은 변화는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인 우리들의 죽음이 전체적으로 경박해지고 세속화되고 심지어 물질화의 도가 지나친 나머지, 비속화되어 버렸노라고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게 유도하고 있다.

밤늦은 시간에 이 글을 읽으면서 혼자서 많이 웃었다. “아니 김열규선생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인지요?”

저자는 구어체 문장이 더 좋은 것 같다. 열이 나서 열 받았다고 할 때가 가장 이해가 잘된다. 그리고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을 텐데....이중의 의미를 보이는 곳도 많다. 아마 저자 자신도 일반적인 죽음을 일반적으로, 일반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고, 독자들도 저마다의 사생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책과 관련해서 생각을 해보면 어떤 생각의 조율에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는 “나는 이렇게 보고 느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는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글을 써나가야 할 것 같다. 동의는 천천히 다가오든지 아니면 반대 받는 표적이 될지,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상처받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러면 혹시 이상한 글이 되고 말까?

이 책의 끝 또한 흥미로웠다. 그래서 옮겨 놓는다.

이제 유머로 우리들 마음을 펴면서 죽음 얘기를 끝내고자 한다.

한 뛰어난 스님이 있었다.
그는 ‘물구 참선’, 그러니깐 광대이듯이 물구를 선 참선으로 그의 죽음을 맞았다. 열반하고 며칠이 지나도 시신은 거꾸로 곤두서 있기만 했다. 밀어도 넘어뜨려도 까딱도 하지 않고는 송곳처럼 꼬장꼬장했다.

소문을 듣고는 누이가 달려왔다.
“너, 또 그 장난질이구나!”

누이가 살짝 밀쳤다. 그제서야 송장은 바로 누웠다.

독자들께서는 다들 낄낄대지는 않고 환히 웃으실 줄 믿는다. 저 ‘염화시중’의 미소로 죽음의 얘기를 끝내게 된 것을 여간 다행하게 여기지 않는다.

웃음을 들이키소서. 죽음 앞에서, 부디부디.

IP *.67.2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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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2.03 15:58:56 *.67.223.154
어젯밤 늦게 작업을 하다가
그만 잘못해서 <북리뷰 39 - 메멘토 모리>를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복구가 되지않는다는 대답을 듣고 다시 올립니다. 2010년 1월 15일 자로 올라간 글입니다.

이미 다 읽으셨을텐데 .... 혼돈을 불러 일으키겠지만  이해해 주십시요.
자료보존 차원에서 다시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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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2.06 17:37:42 *.34.156.43
다시 올려서 처음 읽습니다.ㅎㅎ
좌샘의 리뷰를 읽자니 저자 김열규 교수님의 강의를 듣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뿔테 안경에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면서 쉬지 않고 잡학을 쏟아내시던 교양국어 수업시간...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의견과 같이 합니다.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좌샘의 리뷰를 보고 몇 가지 도움이 될까 해서 책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임사 또는 근사체험이라는 게 있더군요. 죽음 가까이 가 본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최준식 교수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
읽어본 책은 아니고 책을 보니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소개합니다.
그리고
메멘토 모리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생각나네요.ㅎ
죽음은 중년세대 이후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유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알렌 치넨의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도 추천합니다.
좌샘만의 맛깔스런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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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2.08 03:08:30 *.67.223.154
우와,
북리뷰를 읽어주고  게다가 댓글 달아주시는 선배가 있는 이 공간은
참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곳입니다.  그~쵸~

추천해주신 책 중 아직 읽지못한 책은 곧 찾아 읽어볼게요.
임사체험이나, 사후생에 관한 것은 이번 책에서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게 체험이 없기도 하거니와
너무 어려운 주제여서 따로 긴 공부가 필요할 것 같기 때문이예요.

알렌 치넨은 많은 사람들이 강추하는 책이네요.
죽음을 잠시 밀어놓고 ...두번째 여행을  읽어야겠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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