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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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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7일 04시 15분 등록

1. 저자 소개

Will James Durant( 1885~1981)

미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그의 아내와 공동 집필한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lilization)』를 비롯하여『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Transition, The Pleasures of Philosophy,Adventures in Genius』 』,Interpretation of Life,The lessons of History』등의 저술을 남겼다. 듀런트 부부는 역사 저술에 미친 공이 인정되어 1968년 퓰리처상을, 1977년에는 미국자유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라고 역사를 쓰는 철학자 듀런트는 말했다. 나는 듀런트에게 역사는 「인류의 지나온 삶 중에서 역사가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친 정신의 양식」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듀런트는 사건이나 시대적 관점이 아닌 인류의 위대한 영웅을 중심으로 역사를 풀어 나간다. 그렇다. 인류의 역사가 보유한 숱한 이야기 중에서 이 책을 통해 간택된 영웅들은 그의 인생편력과 직ㆍ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인물들이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그의 부모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듀런트를 낳았다. 독실한 예수교 집안의 가풍에서 자라나 청소년 시절에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성직자가 되는 게 그의 운명인 듯 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갈 무렵 사회주의 철학과 권력에의 욕구에 깊이 심취했다가 스피노자의 『기하학적으로 입증된 윤리학(Ethics Geometrically Demonstrated)』 를 알게 되면서 생활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신에 관한 한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로 정의했다. 철학자로서 논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 신을 인정하는데 한계가 있었겠지만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향은 자유주의라는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그의 인생에 현재진행형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심지어 나 자신조차 회의한다는 그에게 신은 논증할 수는 없으나 이성 저 너머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초감각의 존재였다. 성경의 창조론을 진화론과 병립 가능한 하나의 상징체계로 이해한 것도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그는 또한 유럽중심, 엘리트중심, 남성중심의 편협된 역사관을 경계하였고, 상아탑에 함몰된 학자가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 보장, 임금 평등을 위해 현실 개혁에 나서는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오늘의 삶에 영향을 주는 과거를 쓰고자 했던 그의 역사 철학은 대중과의 소통에 있어서도 결실을 맺어 역사가로서는 흔치 않게 높은 지명도를 획득하게 된다. “뜨거운 증오와 피의 어두움으로 얼룩진 미시시피강뿐 아니라 아이들을 기르고, 집을 짓고, 작물을 수확하는 농부들이 보이는 제방 위의 장면 또한 문명의 역사라는 그의 표현에서 대중의 사랑이 그에게 머물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저서로 이 책을 집필하던 듀런트는 198111월 마지막 두 개의 장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그의 아내이자 학문의 동반자였던 아리엘 듀런트에 이어 아흔 여섯의 생애를 마친다.

 

2.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당신을 더욱 이해력 있고 용서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외계 현실의 모든 양상을 물들이고 있는 다양한 과학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공간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방식(과학)은 포기하였다. 그것이 지나치게 외적이고 수학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다른 사물들 안에서 내가 찾아낸 생명의 요소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과학을 통해서는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10

 

니체와 똑같이 <모든 철학은 역사에 (그 힘을) 빼앗겼다>고 느꼈던 듀런트는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이 바로 인류의 본성이 진정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2

 

더욱이 듀런트가 1인칭 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유언이라는 느낌을 준다. 13

 

1장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 농업의 흔적은 기원전 25천 년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 5천 년의 이 세월 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 15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절(친족과 가까워지는 것),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 등이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의 길고도 긴 사냥 단계에서 아주 깊숙이 뿌리를 내린 개인적 본능과, 최근의 정책 생활을 통해 생겨났지만 아직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이다.  17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직도 자연 상태, 즉 사냥꾼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군사적 팽창은 음식, 연료, 혹은 원료를 위한 사냥에 해당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국민의 먹는 방법이다. 국가는 곧 우리 자신이며 조직과 방어를 위해 증진된 우리의 추진력이다. 국가는 우리가 가졌던 욕심과 호전성의 본능을 원시인처럼 드러낸다. 국가는 아직 불안하다. 국가의 탐욕은 미래의 필요와 결핍에 대한 방어다. 오직 외부에 대해 안전을 느낄 경우에만 국가는 내부의 필요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경우에만 아직 불완전한 복지 국가로, 문명에 의해 발전된 사회적 충동을 따르는 단계로 올라선다. 개인은 효율적으로 보호해주는 공동체에 속해 안전해졌을 때 문명화되었다. 국가들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연방 그룹의 충성스런 일원으로 안전해질 때 문명화될 것이다. 18

 

남자들이 물려받은 사냥꾼 천성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어떻게 성장하였나? 문명은 이 천성을 질식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제 체제도 축적 본능에 호소하지 않고는, 그리고 훌륭한 보상을 통해 더 우수한 능력을 이끌어내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명은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도 어떤 국가도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18

 

사냥꾼 단계에서 얻은 본능은 부분적으로는 법과 경찰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도덕성이라 불리는 불확실한 일반적 합의에 의해 통제되었다.(.......) 성적 충동은-굶주림보다는 야간 덜할 정도로 강력한 것-공공연한 자극을 금하고, 또 일찍이 책임이 따르는 결혼을 시켜 이런 충동을 제 길로 유도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질서로 만들었다. 19

 

이 복잡한 도덕적 규범은-우리 천성에는 맞지 않고 <하지 말라>는 말로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긴 하지만-오늘날 다시 황폐해지고 있는 다섯 가지 특별한 제도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던가? 가족, 교회(종교), 학교, , 대중의 의견(여론) 등이 이 복잡한 도덕 규범의 형성을 도왔다. 19

 

부모와 교사들의 권위는 20세기가 되기 전 까지는 종교와의 연결을 통해 강화되었다. 법은 조직된 힘을 이용해 도덕적 규범 대부분을 뒷받침해 주었다. 대중의 의견은 형용사와 모욕적인 취급을 통해 부도덕을 억제하고, 칭찬과 장려와 권력을 통해 좋은 행실을 격려해 주었다. 19

 

남자와 여자는 천천히 절제, 친절과 예의, 도덕적 양심과 미적 감각 등을 발전시켰다. 이런 것들은 만질 수는 없어도 소중한 우리 유산의 은총이다. 문명이란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 질서다. 만일 질서와 문명을 위해 만들어진 힘일 보존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을 농토에 함께 묶어두던 공동의 노동이 사라지면서 가족의 끈이 약해졌다. 직업과 아들들을 이리저리 흩어지게 만드는 개인주의에 의해, 그리고 정신적 자유와 이상향을 향한 동경과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반항으로 부모의 권외가 사라지면서 가족의 유대는 약화되었다. 부와 도시들이 커지면서 종교가 약해졌다. 과학과 사료 편찬의 놀라운 발전을 통해 그리고 창조적 삶을 선언하는 농토를 떠나 물리학과 화학과 기계의 영광을 설교하는 공장으로 삶이 옮겨가면서 종교는 약해졌다. 이제 하늘에 대한 소망 대신 완전한 국가가 등장하였다. 교육 체계는 계급 투쟁과 종족간의 전쟁을 통해, <타협할 수 없는 요구들>을 내세운 무장한 소수에 의해 약해졌다. 그리고 지나친 부담을 지고 있는 납세자들의 저항에 의해 그리고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 사이에 놓은 교량, 실험과 체험(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놓은 교량들이 무너짐으로써 약해졌다. 법은 지나친 증식과 그 편향성을 통해 그리고 입법자들을 매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그 권위를 잃었다. 또한 도주와 은폐의 수단이 치밀해지면서 그리고 법 집행기관의 통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법은 힘을 잃었다.-대중의 의견(여론)은 분열과 두려움과 무관심 그리고 부에 대한 보편적인 숭배에 의해 그 힘을 잃었다. 20

 

성이 곧 사랑이 되는 이런 성적인 문란 속에서 성은 남자에게는 공짜가 되었고 종족에게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다. 협의 대신 대립이 등장하였다. 법은 소수의 힘에 굴복하였다. 결혼은 위험 분산용 단기 투자가 되었다. 번식은 불상사나 또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로 남겨졌다. 무능한 사람들의 생산성은 밑바닥에서 종족을 번식시키고, 지적인 사람들의 불임은 정상급에 있는 종족을 시들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이교적인 방종이야말로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증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방종은 보통 그 반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연속 장면의 한 가지는 이교적인 방종의 시대에 이어 청교도적인 억제와 도덕적 규율의 시대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21

 

보르지아 가문 사람들(교황 알렉산드로스 6세와 그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이 설치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용병대장들의 폭력과 성적인 문란함은 마지막에 교회의 정화와 도덕성의 회복이라는 결과에 도달하였다. 21

 

그러난 역사에는 방종과 그 반대 사이의 이러한 진자 운동보다 더 즐거운 전망이 있다. 역사는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겠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 말이 맞고 또한 수억 가지의 비극들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생명의 흐름을 이끌어온 것은 평범한 가족의 건강함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노동 그리고 사랑이다. 22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을 향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가르치려 노력해야 한다. 23

 

2장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우리 조상도 그렇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설을 이용한다. 전설은 우리에게 반고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는 1 8천 년 동안이나 일을 해서 기원전 약 222 9천 년에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의 숨결은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고, 핏줄은 강물이, 살은 땅이, 머리카락은 풀과 나무가, 땀은 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벌레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되었다.> 26

 

노자에 따르면 올바른 길이란 지적 활동 및 거짓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나 옛날 관습, 사고와 조화를 이루어 고요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29

 

<늙은이>는 루소가 현대 사상에 메아리를 만들어낸 것만큼이나 자연과 문명을 예리하게 구분하였다. 자연이란 자연의 활동성이며 전통적 사건의 고요한 흐름이고, 계절과 하늘의 웅대한 행진이며 질서다. 그것은 모든 시내와 바위와 별에 새겨져서 드러나는 <길道>이다. 그것은 공평하고 인간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인 사물의 질서다. 우리가 지혜를 지니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행동의 법칙은 바로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스피노자도 주장한 것). 이 사물의 법칙은 바로 우주의 도(), 즉 길이며 행동의 법칙은 삶의 도, 즉 길이다. 노자에서 두 길은 하나가 된다. 탄생, , 죽음의 리듬을 지닌 인간의 삶은 우주 리듬의 일부다. 29

 

철학적인 비활동 상태인 무위(無爲)는 사물이 나아가는 자연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음을 뜻한다. 30

 

이런 가르침은 현자에 대한 노자의 개념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석함을 완화시키려 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몽매함과 같아진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보다는 단순한 사람들과 더 마음이 맞으며 초심자의 모순을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지혜로운 사람은 부나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최소의 수준으로 소망을 줄인다. 31

 

열아홉 살에 결혼하였고, 스물세 살에 아내와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주로 그의 제자들이 남긴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에 의존해서 알게 된다. 그는 다른 사상가들을 공격하지 않았고, 논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명성과 관직을 열렬히 소망하였으나 번번이 그의 눈에 부도덕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통치자들에게 임명을 받지 못하였다. 32

 

그의 기본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널리 교육을 펼쳐서 도덕성과 사회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33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는 태백성 꿈을 꿨다. 그것은 서쪽 하늘에서 하얗게 빛나는 커다란 별로 오늘날의 이름은 금성(비너스)이다. 아이는 <자두>라는 의미를 지닌 <이李>씨 성을 얻고 커다란 하얀 별을 뜻하는 <태백 太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35

 

군사적 승리도 외국 금융의 폭정도 자원과 생명력이 이토록 풍부한 한 민족을 오래 억압할 수는 없다. 중국의 허리가 그 생명력을 잃기 전에 침략자들이 먼저 자본이나 참을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1백 년이 지나기 전에 중국은 그 정복자들(당시 일본인)을 흡수하고 허망하게 현대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기술을 모두 배울 것이다. 도로와 통신이 중국을 통일시킬 것이고, 경제와 근검은 자본을 가져다 줄 것이며 강력한 정부가 질서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모든 혼란은 일시적일 뿐이다. 마지막에는 무질서가 치유되고 독재 정권과 더불어 균형을 이루고, 낡은 장애물은 거칠게 쓸려나가고 새로운 성장이 나타날 것이다. 죽음과 양식처럼 혁명이 쓰레기를 제거하고 불필요한 것을 도려낼 것이다. 많은 것들이 죽어야 할 순간에 혁명이 나타난다. 중국은 전에도 이미 여러 번이나 죽었다. 그리고 여러 번이나 다시 태어났다. 40

 

3장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인도 철학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 <우파> <가까이>, <샤드> <앉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 혹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구루, 곧 선생님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42

 

그러나 어느 날 고행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런 고행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반대로 혹시 고행을 통해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성스러움을 고행에 대한 자부심이 더럽히고 있었다. 그는 고행을 포기하고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 아래(여행자는 오늘날에도 이 <보리수>를 볼 수 있다) 앉아 깨달음이 오기까지 다시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인간의 근심과 병, 늙음과 죽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탄생과 죽음의 무한한 연속의 환상이 나타났다. 이 모든 탄생과 죽음 하나하나가 고통과 슬픔으로 어두웠다. 그는 탄생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46

 

평화는 열망이 없는 냉정한 평온함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해탈(니르바나)이다. 이렇듯 7년 동안 명상을 한 다음 고타마는 해탈을 설교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46

 

종교에 대한 붓다의 생각은 순수하게 윤리적이었다. 그는 의식이나 숭배나 신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행동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아가 우리의 최근 심리학처럼 그는 정신이 정신적 활동 뒤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정신이란 총체적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이르는 추상적 용어이다. 그러나 붓다는 신체와 개체의 살아있는 힘인 영혼은 그대로 남는다고 가르쳤다. 이 영혼은 다시 태어나 지상의 삶을 새로 시작하고 전생에 지은 죄를 여기서 속죄할 수 있다고 했다. 죄라는 것은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익이나 쾌락을 찾는 일이다. 영혼이 모든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질 때지 영혼은 되풀이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해탈이란 죽음 뒤의 하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심을 극복한 고요한 상태이다. 붓다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에 우리는 도덕적 개인주의와 심리적 개인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욕심에 시달리는 우리의 자아는 실제로는 분리된 존재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강물 위에 이는 순간적인 잔물결이고, 바람에 날리는 운명의 올가미 속에 얽혔다 풀어졌다 하는 작은 매듭일 뿐이다. 48

 

시골 사람들의 친절함이 도시의 군중 사이로 서둘러 지나가는 익명의 존재 사이에 자리잡은 은밀한 불신이나 적대감보다 더 낫다. 간디를 이끌었던 생각은 고대 방식의 단순함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52

 

고대 공화정 시대 로마는 법률로써 위기가 닥쳐올 때 1년 동안 독재관을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만료되고 나서도 독재관이 계속 자리를 고집할 경우 누구라도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합법적이든 아니든 그랬다. 53

 

4장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이집트는 기원전 430년에 헤로도토스가 말했던 것처럼 <나일 강의 선물>이다. 강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나일 강은 강의 양쪽 언덕에 자리잡은 정착지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또한 통신과 상업을 위한 물길이 되어주었다. 나일 강은 해마다 확실하게 범람해서 농부들의 경작지에 관개를 해주었다. 56

 

어째서 파라오들과 다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가?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속에 <>라고 부르는, 자기와 똑같은 영적인 짝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육체가 굶주림, 폭력, 부패를 이기고 보존된다면 원래의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58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59

 

고대 이집트의 산업 기술은 르네상스 이전 유럽의 수준 정도로 다양하고 발전된 것이었다. 60

 

이집트의 도덕 규범은 근친혼을 막지 않았다. 오누이가 혼인한 기록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많은 파라오들은 왕실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아니면 가족의 부를 나누지 않기 위해 이 같은 혼인을 했다. 당시 부는 여성의 혈통으로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61

 

여성들은 로마 제국을 빼고는 20세기 이전 유럽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큰 도덕적, 사회적 자유를 누렸다. 61

 

모성은 여성의 고결함이라고 찬양을 받았다. 61

 

이집트에서는 모든 것 위에 그리고 모든 것 아래 종교가 있었다. 62

 

이집트의 사제들은 왕권에 꼭 필요한 지주이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비밀 경찰이었다. 63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아멘호테프를 버렸다. 이 이름은 태양신 아몬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대신 그는 스스로를 이크나톤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아톤은 만족스럽다>는 의미였다. 66

 

그는 자신의 권력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유물을 남겼다. 그것은 원래 높이가 56피트( 186미터)의 조각상이었다. 지금은 길이가 56피트이다. 세월이 조각성의 아래 부분을 침식시켜 그것을 옆으로 쓰려뜨렸기 때문이다. 72

 

5장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원래 왕의 경비대장이던 다윗, 잘 생기고 음악에 재능이 있던 그가 기원전 1000년경에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은 뒷날 불운을 겪을 때면 <메시아>를 갈망하였다. 메시아란 다윗의 후손 중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말로 그가 다윗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영광과 행복을 다시 만들어낼 것을 소원한다는 뜻이다. 77

 

내면에 많은 야만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한 문명의 모든 약속을 보여주는 남자이다. 77

 

그가 죽기 전에 상인들의 수가 사제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으며, 상인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국가의 부를 통제하였다. 인정적으로 고용되지 못하거나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무산자 계층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의 곤궁은 원래 호전적인 야훼 숭배를 변형시켜 예언자들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복음을 만들어냈다. 78

 

그들은 우연히 미래를 예언하였다. 예루살렘이 외국 세력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들은 원래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기보다는 현재를 고발하는 사람들이었다. 78

 

칼라일은 욥기를 가르켜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다. ...... 성서나 혹은 성서 바깥에 이와 동일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 쓰인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하였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기본서이다. <불의가 그토록 자주 승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질문이다. (......) 마침내 그는 그들이 맹목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유대인들이 다 그랬듯이 그도 또한 저승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는 지상의 존재란, 피할 길 없는 죽음을 매일 연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83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때 새벽별들이 떨쳐나와 노래를 부르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했는데,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그리고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말아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고 누가 말했느냐?...... 네가 북두칠성에게 굴레라도 씌우고 오리온 성좌의 사슬을 풀어주기라도 한단 말이냐? ...... 네가 천상의 운행 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 법칙을 만들었느냐? ....... 누가 내면에 지혜를 주었느냐, 누가 마음에 슬기를 주었느냐?.......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욥기 381-402) 84

 

그렇다면 구약 성서의 시인들에게서 욥기와 전도서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시인들은 두 가지 답변을 내준다. 하느님과 그리고 우주와 화해해라. 또한 사랑으로 너의 삶을 밝게 만들어라. 한 가지 답변은 시편에 들어 있고 다른 답변은 아가서에 들어 있다. 87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에고를 가장 많이 넓혀주고, 살아 있고 평화로운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과 팔을 활짝 여는 일이다. 영혼이 행복하면 그 사랑도 커진다. 91

 

6장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에페소스, 그곳의 아르테미스-디아나 신전은 고대 세계의 일곱 기적의 하나였다. 이 에페소스에서 플라톤보다 300년 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로운 경구를 사용해서 변화의 철학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헤겔, 다윈, 스펜서, 니체 등에게 영감을 준 사상이었다.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편적이라는 것과 에너지가 파괴할 수 없이 영속한다는 것이었다.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의 존재이기를 중지하고 새로운 다른 것으로 된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그리고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쉬지 않고 중지하지 않는 <과정>이다. 여기서 헤겔이 1830년에 상세히 설명한 철학의 절반가량이 한두 문장에 축약되어 나타나 있다.(헤라클레이토스) 95

 

그의 강의는 남녀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가장 열성인 제자들을 모아 공산주의 공동체를 만들고, 고기, 계란, 콩 등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금욕과 자기 수양으로 몸을 깨끗하게 하고, 학문과 음악으로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단체였다. 그는 유클리드가 나오기 200년 전에 기하학의 고전적인 형식을 만들어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원리를 만들기도 했다.(피타고라스) 98

 

미국을 건국한 조상들처럼 아테네도 노예들의 봉사를 받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노예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보통은 전쟁 포로들이 노동을 하였다. 그들은 자유의 기억과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103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가 끝나갈 무렵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부의 격차가 절정에 도달해서 아테네 시는 정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전제 정치 말고는 도시를 소통에서 자유롭게 해줄 어떤 방책도 불가능해 보였다>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력 폭동을 일으켜서 완전한 재분배를 해야 한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저축에 대한 도전을 보고 분노하였다. 그래서 가혹한 드라콘 정권(기원전 620)을 후원해서 옛날 법을 불러왔다. 그리고 모든 부와 기존 질서와 심지어는 문명 자체까지도 뒤집어엎으려는 위기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였다. 103~104

 

그의 유명한 <부채(Seisachtheia, 세이사크테이아)>를 통해 솔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개인이나 국가에 진 빚을 모두>없애주었다. 이렇게 해서 한꺼번에 아티카 땅에서 모든 저당이 사라졌다. 노예가 되었거나 빚에 묶인 사람이 모두 풀려났다. 노예가 되어 외국에 팔려나간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 해방시켰다. 앞으로 사람을 노예로 파는 일은 금지되었다. 부자들은 이 법이 공공연한 사유 재산 침해라고 항의하였지만 10년도 지나기 전에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조치가 아테네를 혁명에서 구해 냈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105

 

치안을 방해하는 소동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지키는 사람은 시민권을 잃어버린다는 조항도 있었다. 공공의 일에 무관심한 것은 국가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가를 방어하다가 죽은 사람의 아들은 국가가 양육하고 교육시켜야 한다고 정하였다. 106

 

아테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법을 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을 주었다.>서로 갈등하는 그룹과 이해 단체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좋은 법안이었다. 107

 

7장 아테네의 황금 시대

우선 아티카라 불리는 작은 반도에 살던 31 5천 명의 주민들 중 오직 43천 명만이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었다. 그리고 115천 명이 노예였다. 112

 

매춘부가 직면한 문제는 법이 아니라 소년들이었다. 상인들은 잘생긴 소년들을 수입해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았다. 이들은 잘생긴 소년들을 사서 처음에는 애인으로 이용하고 나중에는 노예로 부려먹었다. 아테네 법은 동성애를 금지하였지만 여론은 그것에 관대하였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사랑을 논하지만 그것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향연>의 토론자들은 동성애를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높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라스토텔레스는 이런 관습을 인구 과다에 대한 공포심 탓으로 돌렸다. 이것은 아마도 유럽이 동방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런 관습은 여성을 발전에서 격리시켰다. (.......) 미술조차도 페리클레스보다 100년 뒤에 오는 프락스텔레스 이전에는 여성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했다. 113~114

 

아테네 사람들에게 있어서 집은 저택이 아니라 숙소였다. 남자는 대부분의 경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내에서 지냈고 그곳에서도 존경할 만한 여성들과 사회적 접촉을 갖는 일은 드물었다. 그리스 사회는 남성만의 단성 사회였다. 그래서 여성의 정신과 매력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프랑스 계몽주의에 주었던 것과 같은 흥분, 우아, 자극 등이 결핍되었다. 114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은 동물에게 친절하고 인간에게 잔인하였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노예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고문을 하였고 고문이 아닌 사람들을 잔뜩 죽이고 나서도 단잠을 잤다. 그러나 다른 도시국가에서 억압받고 쫓기는 사람들은 아테네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전쟁은 헬라스에서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에 맞서 싸웠다. 고대 역사에서 거의 가장 우수했던 이 문명은 마라톤 전투가 끝나고 100년이 지난 다음 27년 동안의 전쟁에서 스스로의 힘을 소진하였다. 그것은 국민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115

 

아테네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서 선량해지기 어려웠다. 그들은 악덕을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성을 멸시하였다. 어떤 민족도 이보다 더 큰 상상력이나 혹은 더 생생한 혀를 가진 적이 없었다. 이떤 민족도 이보다 더 큰 상상력이나 혹은 더 생생한 혀를 가진 적이 없었다. 명료한 사색과 그것의 산물인 명료한 표현이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아테네 사람들은 교육받은 망설임 같은 것을 참지 못하였고, 정보가 풍부하고 지적인 대화를 문명의 최고 스포츠처럼 우러러 보았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테네 사람의 가장 고귀한 정열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일들처럼 너무나 과도하였다. 뒷날 아테네 사람은 이성의 한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원래 그들의 정신의 낙천성과는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풍요 속에서도 가장 심오한 사람들-철학자가 아니라 극작가들-의 사색은 아름다움의 짧음 그리고 죽음의 끈질김에 의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115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스 회화는 선으로 이루어진 논리학이고 그리스 조각은 균형의 숭배이며 그리스 건축은 대리석으로 된 기하학이다. 116

 

그리스 사람들은 예술이란 삶에 종속된 것이며, 삶은 모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117

 

시칠리아 출신의 물리학자 겸 채식주의자 시인이고 신비주의자인 엠페도클레스가 아테네로 찾아와서 인간과 다른 모든 종은 생존 경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가장 적합한 존재가 살아남고 선택되며 내적 붕괴의 방식을 통해 형태와 종들이 삭제된다고 하였다. 야만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북부에 있는 압데라에서는 데모크리토스가 왔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입자일 뿐이라고 설파하였다. 생각이란 특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입자들이라고 하였다. 120

 

사변적 사색의 깊이에 예술적 형식의 탁월함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아테네 황금 시대 문학은 셰익스피어와 몽테뉴가 나타나기 전에는 건드릴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에 도달하였다. 122

 

8장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부의 한가운데서 빈곤이 늘어났다. 영리한 사람들에게 돈을 벌 기회를 준 다양성과 교역의 자유는,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전보다 더 빨리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잃어버릴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아테네는 두 도시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와 부자들의 도시가 되어 서로 전쟁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법령 제정이나 혁명을 통해 부자들을 약탈할 음모를 꾸몄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항해 방어 조직을 만들었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다. 그들 중에는 플라톤처럼 부자고 섞여서 공산주의 사상을 드러냈다. 134~135

 

철학은 시민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지성을 함양해서 신의 계율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독하는 신성에 대신하게 하였다. 136

 

기원전 5세기는 알몸의 남자와 옷을 입은 여자를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그 유형을 상화하였다. 이 세기에는 전쟁터에서 지내는 남자의 삶을 감정 없는 산문처럼 주조하거나 끌로 새겼다. 기원전 4세기는 인간의 개성, 감정, 고통을 돌에 새겨보려 하였다. 남성 조각상에서는 머리와 얼굴이 아주 중요했고 몸은 그보다 덜 중요했다. 성격 탐구가 나타나면서 얼굴이 아주 중요했고 몸은 그보다 덜 중요했다. 142

 

 플라톤의 인기 있는 <대화>들은 살아남아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술에 관련된 그의 논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기 있는 작품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기술에 관련된 논문들만 남아서 그 집중된 가르침의 대가로 힘든 주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농담 중 하나이다. 148

 

그가 이렇게 인생의 절정기에 죽은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나이가 더 들었더라면 분명 환멸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패배와 고통을 통해 인생의 깊이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처음에 시작할 때처럼-전쟁보다 정치를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렇게 엄청나게 커진 왕국을 유지하고 감시하려는 노력은 그의 빛나는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온통 정력이었다. 155

 

9장 로마 공화국

로마 사람들의 가장 깊은 경건함과 가장 진지한 숭배는 생명의 어머니이고, 죽은 자들의 고향이며 솟아나는 씨앗 속에 감추어진 마법의 힘인 대지를 향하였다. 161

 

공공 생활의 모든 국면을 종교적 엄숙함으로 덮어주고, 국가를 신들과 친근하게 융합시켜 신앙심과 애국심을 하나로 만들었다. 애국심은 역사상 알려진 다른 어떤 사회보다 더 강한 정열이 되었다. 종교는 가족과 힘을 합쳐 강철 같은 성격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500년 동안 로마가 고대 세계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162

 

10장 로마의 혁명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미신적 습관은 많았다. 또 로마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무자비했다. 그의 상상력과 감정은 언제나 지성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는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는 여우가 사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평이었다. (.......) 이런 남자는 화학적으로 보면 고향에서는 혁명을 억누르고 해외에서는 반란을 억누르는 데 필요한 특질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187

 

그는 로마의 쇠퇴 원인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하였다. 원인이란 경제적 혁명을 위한 수많은 씨앗들이었다. 시골 경작지에서 도시의 산업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생산과 도덕적 규율과 사회 질서의 단위인 가족에서 마을과 도시의 개인들, 그러니까 노동, 무역, 재정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속에 혁명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산업계의 기계주의와 대중의 익명성 속에서 흔들리는 도덕 속에도 혁명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190

 

그가 혁명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하기 위해 제안한 계획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기록>이었다. 즉 모든 빚을 깨끗이 탕감한다는 내용이었다. 193

 

우리는 카이사르가 처음에는 무자비한 선동가이며 거침없는 난봉꾼이었다가 책임감에 의해 천천히 역사상 가장 신중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195

 

로마 병사들이 쓰던 거친 라틴어가 변해 라신느(프랑스 고전주의 작가)와 아나톨 프랑스(프랑스의 작가)가 쓰는 음악적인 프랑스어가 되었다. 최악의 것이 타락해서 최선의 것이 된 것이다. 198

 

11장 로마 제국(기원전 27-180)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제국을 얻기보다 이미 얻은 제국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더욱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211

 

예술은 예술가와 그 수용자의 감정을 전제로 한다. <나를 울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먼저 슬픔을 느껴야 한다.>그러나 예술은 감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평온함 속에서 기억된 감정>인 것이다. 여기서 고전 양식이 낭만주의 양식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호라티우스) 214

 

<나는 내 맡은 역을 다하였으니 여러분이 손뼉을 쳐서 박수로 나를 무대에서 쫓아내 주시오.>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오랜 결혼 생활을 기억하시오. 리비아, 안녕히.>이렇게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그는 세상을 하직하였다.(아우구스투스 황제) 219

 

12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에드워드 기본의 판단을 들어보기로 하자. <누구든 세계 역사에서 인류의 조건이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대를 꼽으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아마도 지체 없이 네르바 황제의 등극(96)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까지의 시대를 꼽을 것이다. 이 황제들의 통치 기간은 아마도 대규모 국민의 행복이 통치의 확고한 목적이 되었던 역사상 유일한 시대일 것이다. 226

 

그 사이 토박이 로마 사람들은 피임과 편안함으로 인해 그 수와 활력을 잃고, 야만인들은 다산과 힘든 생활로 인해 수가 불어났다. 233

 

그는 세계에는 나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들 또한 인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황의 운명에 의해 만들어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결점의 희생자들이다. <어떤 사람이 네게 나쁜 일을 했다면 그 자신이 해를 입는다. ....... 그를 용서하라.>이것이 실천할 수 없는 철학으로 보이는가? 그와는 반대이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기질이란 그것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 정말로 선한 사람은 불행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 어떤 재앙이 덮쳐도 그의 영혼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 234

 

코모두스는 로마 제국의 오랜 추락을 시작한 인물이다. 235

 

13장 인간 그리스도

오랫동안 그는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유대인으로 생각하였다. 예언자들의 사상을 나누어 갖고, 그들의 사업을 계승하고 그들처럼 오로지 유대인들을 향해서만 설교하였다. 자신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할 때 그는 오로지 유대 도시만 선택하였다. 246

 

십자가형은 유대의 형벌이 아니라 로마의 처형 방식이었다. 250

 

그리스도가 혁명가였든 아니든 그는 로마에 의해 명백하게 혁명가로서 처형당하였다. 타키투스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였다. 251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인은 몸과 생명을 그대로 지니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생각은 친숙한 것이었다. 모세, 에녹, 엘리야, 이사야 등도 이미 그랬다. 주는 내려올 때처럼 신비롭게 갔지만 사도들 대부분은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다음 실제로 자기들과 함께 살았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253

 

 

14장 기독교의 성장

베드로가 교회를 세웠다면 바울로는 신앙을 세웠다. 256

 

다양한 기독교 종파들 중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신앙이 살아남아 전파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300년이 될 때까지 중동 지역에서 기독교도는 인구의 4분의 1일을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기독교도의 수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엄격한 신학은 이 집단의 도덕성을 뒷받침해 주었고 이런 도덕성은 세속 철학자들의 관심과 칭찬을 받았다. 258

 

음유 시인들은 새벽의 사랑 노래와 저녁의 사랑 노래에 뛰어났다. 그들은 낮엔 유혹하고 밤밤엔 비탄에 빠졌다. 266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모든 것을 걸었다. 로마 문명은 그 신들의 죽음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274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두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두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 그들을 통해 문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세의 역사적 업적은 완성되었다.

그 죽음이 곧 그 완성이었다. 275

 

15장 르네상스 1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네상스는 발생 초기부터 이미 죽은 다음 천국의 불확실한 즐거움 대신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모험을 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학만을 복원시킨 것이 아니라 그 쾌락주의적 자유로움도 똑같이 복원시켰다. 1천 년 동안이나 초자연적인 신앙에 기초한 도덕적 규율의 시간을 보낸 다음 부분적으로는 이교적인 방식으로 감각이 자유롭게 되 었다. 281

 

그러나 르네상스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대의 부활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냄새나는 부르주아의 돈 말이다. 281

 

그는 일생의 절반 가량을 인간의 비행에 대해 생각하였다. 톨스토이처럼 그는, 새들이 많은 점에서 인간보다 우수하다고 여겨 부러워하였다. 새들의 날개와 꼬리의 작동법을 탐구하고, 그들이 떠오를 때, 활주, 회전, 내려앉을 때의 역학을 상세히 연구하였다. 그의 예리한 눈길은 이런 동작들을 열정적인 호기심으로 살펴보고, 그의 매끄러운 펜은 그것을 스케치하고 기록하였다. 그는 새들이 공기의 흐름과 압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관찰하였다. 인간이 발 동작으로 어쩌면 빠르게 날개를 쳐서 자신을 공중에 띄워 올릴 수도 있게 고안된 나선형 기계의 드로잉을 여러 번이나 만들었다. 316

 

어떤 화가도 뉘앙스의 섬세함이나 감정과 사상과 생각에 잠긴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미묘한 초상화 분야에서 레오나르도와 겨룰 수 없다. 그 시대의 어떤 조각성도 레오나르도가 만든 석고 모형<스포르차>만큼 높이 평가왼 것은 없었다. 어떤 드로잉도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능가하지 못한다. 르네상스 철학에서 어떤 것도 자연법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322

 

16장 르네상스 2

로마

소년은 일곱 살에 머리를 밀고 수도사가 되었다. 여덟 살에는 교황청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열네 살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사제가 되지 않고도 추기경이 될 수 있었다. 추기경들은 종교적 열성보다는 정치적 능력과 가문의 배경에 따라 선출되곤 했다.) 메디치 추기경을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는 상냥하고 온건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너그러웠다. 그의 넉넉한 수입조차도 시인, 미술가, 음악가, 학자들을 돕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337

 

라파엘로는 기질과 성향이 레오 10세와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기독교를 쾌락으로 만들고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상냥한 쾌락주의자들이었다. 두 사람 다 일에도 놀기에도 열심이었다. 339

 

언어를 그토록 당당한 경제로 사용하는 이 젊은이 앞에서 말이란 얼마나 허약하게 보이는 것인가! 이 순간부터 체사레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의 사색에서 영웅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니체 사색의 주인공이 된 것과 비슷하였다. 이겨 <권력의 의지>의 화신에게서 도덕성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초인의 한 모델이었다. 346

 

17장 르네상스 3

베네치아의 일몰

베네치아 문화는 피렌체와 비교하면 섬세함과 깊이가 없다. 밀라노와 로도비코 공작과 비교하면 정교함과 우아함이 없다. 그러나 베네치아 문화는 역사상 알려진 것 중에서 가장 색채가 화려하고, 값 비싸고, 감각적으로 매혹하는 문화이다. 362

 

19장 종교개혁 2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1517 515 교황 레오 10세는 모든 형벌 면제 칙령(면죄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공표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그리고 베드로는 모든 후계자 교황들에게-참회하는 고해자의 죄를 없애줄 권한을 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죄악은 없애 주었지만 죄악에 붙어 있는 고난(형벌)을 면제해 줄 권한은 없었다. 405

 

그가 배운 하느님은 사랑보다는 공포의 하느님이었다. 예수도 팔복을 내리는 <온화하고 다정한 예수>가 아니라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불로 위협하는 최후 심판의 그리스도였다. 어느 날 그는 천둥 번개가 치는 폭풍우 속에서 은신처를 갈망하는 가운데 성 안나에게 자신이 구원을 받으면 수도사가 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409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도록 선택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토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공덕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루터 신학과 그 추종자들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410

 

1211일 루터는 교황의 통치를 부인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것이다. 417

 

농민들은 루터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종교가 자신들의 이유를 정당화시켜 주고 또 희망을 주고 행동하도록 부추기고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들을 버렸다고 느꼈다. 그들 중 일부는 절망적인 분노 속에서 시니컬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 혹은 그 자녀들은 가톨릭으로 되돌아갔다. 일부 사람들은 루터가 비난한 과격분자들을 추종하였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서 공산주의의 권고를 들었다. 433

 

20장 가톨릭 종교 개혁(1517-1563)

르네상스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주요 산업이었던 매춘은 그 머리를 감추었다. 순결은 유행이 되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즐거운 특성은 사라졌다. 이탈리아 여성들은 초기 종교 개혁의 자유에서 온 매력과 유쾌한 기분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다. 양심적인 도덕성은 이탈리아에서 거의 청교도적인 시대를 만들었다. 수도원 생활이 다시 살아났다. 461

 

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그는 교황이 생각한 것처럼 <인류의 가장 지혜롭고 가장 명철하고 가장 비열한 사람>은 아니었다. 몽테뉴가 그보다 더 지혜로웠고, 볼테르가 그보다 더 명철하였으며 헨리 8세가 그보다 더 비열하였다. 베이컨의 적들은 그가 친철하고 잘 도와주며 빨리 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494

 

홉스에서 스펜서에 이르는 영국 사상의 진로와 사유는-버클리와 흄과 영국 헤결파를 제외하면-베이컨의 노선을 따른 것이다. 498

 

옮긴이의 글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경구를 지닌 힘차고 간결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이 거대한 내용을 담아낸다. 어차피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발전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절대로 짧지 않은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따라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으면서 몇 마디 말로 예리하게 각 시대의 핵심을 찌른다. 이미 역사의 수많은 흥망성쇠를 관찰했던 이 눈길은 인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절망을 넘어 담담한 관찰자의 냉정함을 보인다. 500

 

어마어마한 학문의 역사를 포함하는 서양사를 단순히 정치, 사회의 역사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유연하고 매력적이다. 바로 문화사를 읽는 눈길이다. 문화사를 읽는 이 눈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몇 가지 원칙적인 통찰이 재미있다.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라는 듀런트의 태연자역한 고백은 우리를 멈칫 놀라게 한다. 501

 

이 모든 영웅들은 한결같이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다. 듀런트는 이들의 위대성을 깎아 내리지는 않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띤 채 약점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501

 

3. 내가 저자라면

『역사속의 영웅들』의 목차는 듀런트의 인생 여정과 철학을 압축해 놓은 축소판이다. 1장은 역사는 개인적 본능이 사회적 본능에 순치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듀런트의 역사관이 드러나는 장이다. 저자는 개인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의 갈등을 사회 변동의 주요한 원동력으로 판단하고, 문명은 사회적 본능의 기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는 역사발전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쉬운 건 듀런트가 사회체제 유지의 버팀목이 되었던 가족, 교회(종교), 학교, , 대중의 의견(여론) 등이 무너지고 있다고 서술하며, 여전히 평범한 가족의 건강함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노동 그리고 사랑이 생명의 파수꾼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진단하는 근거가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서의 터닝포인트를 염두해 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있었어야 했다.

 

2장에서 6장까지는 그의 균형감각과 자유주의 의식이 돋보이는 장이다. 유럽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난 자기 성찰이 공자와 노자, 붓다와 우파니샤드에 대한 깊은 안목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뼛속까지 각인한 아흔 여섯 노 학자의 아우라가 빛나는 대목이다. 다만 이태백의 한시 번역은 서양인이 시도한 번역이라는 의미는 있으나 속 깊은 여백의 맛을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7장에서 21장까지는 듀런트 개인의 삶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삼아 신과 인간, 권력과 예속, 삶과 예술 등을 정반합이라는 사물의 통합과정으로 그렸다. 모순되는 듯 하면서 공존하는 이질적 요소들이 좌충우돌하며 교차점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그는 인생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특히 르네상스에 3개 장, 종교 개혁에 4개 장을 할애한 것은 사춘기까지를 지배했던 예수회 신앙과 그 위에 덧입혀진 철학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그의 번민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성 저 너머의 세계에 경외의 눈빛을 보내면서 불안 속의 자유- 초인의 삶 또한 버릴 수 없었던 그의 딜레마는 곧 인류가 짊어진 삶의 화두이기도 했다.

 

이 책은 아흔을 넘긴 노학자가 쓴 책답게 핵심을 찌르는 경구 한마디로 몇 장에 해당하는 설명을 대신하는 게 큰 장점이다.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스 회화는 선으로 이루어진 논리학이고 그리스 조각은 균형의 숭배이며 그리스 건축은 대리석으로 된 기하학이다.”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온통 정력이었다.”

 

예를 들면 위와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하지만 수 천 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를 몇몇의 영웅을 중심으로 풀어 가려니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 저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된 인물과 사건이다 보니 通史적인 관점에서 균형 있게 역사를 바라보는 데 분명한 한계점을 보여줬다. 저자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면 다윈이 예수 이상의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했을 지도 모르겠다(23장까지 완성된 걸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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