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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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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7일 08시 47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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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듀란트 ( William James Durant 1885- 1981), 그는 저명한 미국의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철학자다. 사진을 보기 전에는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듯한 주름 많은 표정의 무거운 철학자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아내 에어리얼이 쓰러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식사를 중지하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행복한 삶의 동반자였고, 나아가 이상적인 동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웃음기 어린 편안한 얼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노후에 나타나는 얼굴은 그의 삶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1885 11 5, 미국 메사추세스 주 노스 아담스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뜻에 따라 성소의 꿈을 꾸기도 했지만, 청년 시절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과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삶은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철학과 사회주의에 천착하게 된다. 뉴저지 주의 저지시에 있는 성 베드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907~1911년의 기간에 뉴저지의 사우스 오렌지 시에 있는 세튼 홀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그 후 1917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강사로 있다가 1935년부터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1911년 맨하탄에 있는 자유 교육 실험학교인 페레르 근대학교(the Ferrer Modern School) 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주의 교육을 현장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 학교에서 그는 13살 연하인 에이리얼(Ariel)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Chaya Kaufman 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에덜을 낳고 루이스는 입양한 아들이다. 듀란트와 에이리얼는 부부로 또한 저술 활동을 같이 한 작가로 아흔 여섯, 여든 셋까지 같이 살다가 13일 차이인 1981 1025, 1981 117 일 둘의 심장은 멈추었다. 그들에게 13의 숫자는 의미 있는 숫자가 되어버렸다.

 

한 교회(Labor Temple)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철학, 문학, 과학, 음악 예술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하였다.1921년 ‘Little Blue Books' 의 시리즈 발행인 인 줄리어스가 우연히 수업을 듣고 그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고자 제안했고, 그 결과 11권의 소책자가 모여 1926년 ’철학 이야기‘ 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후 1929년 인물 중심이 아닌 철학의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한 ’철학의 저택‘ 을 출간하였으며, 이를 재개정하여 1952년 ’철학의 즐거움‘을 출판 하였다. 그는 어려서 꿈꾸던 성소의 신앙을 잃고 철학을 얻은 활동가로 보인다. 신앙에서 철학 그리고 그는 그 후 역사 쪽으로 시선을 돌려 연구를 수행한다. 그 이유는 듀란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철학이 논리와 인식론의 안개와 신기루에 빠져 있다는 불만이 생겨서였는데, 철학 보다는 역사 쪽에서 인간과 국가들의 속성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믿음 때문” 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에이리얼의 역사에 대한 공통 관심사가 거의 두 사람을 40 (1935-1975) 간 역사에 헌신하게 했다. 11권에 이르는 ’문명 이야기‘ 가 세상에 나왔고, 시리즈의 10번째 책으로 그는 매년 미국에서 언론과 문필 분야에서 뛰어난 대중적 공로와 업적을 지닌 사람을 선정해 수여하는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행복한 두 사람의 결합이 함께 오래 살면서 많은 저작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었음은 그가 받은 상이 말해 주고 있다.

 

관심 분야(신앙, 철학, 역사) 의 탐구 이후 듀란트는 ‘문학 이야기’를 저술하게 된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신을 “지난 반세기 동안 철학과 역사에 몰두해 온 여든 네 살의 (문학에 대한) 풋내기”로 자처하면서 하지만“철학과 역사로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문학이야말로 지적 분야에 있어서의 자신의 첫사랑이었다.” 고 고백하고 있다. 윌 듀란트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저서에 대한 구상을 하며 써온 책 ‘역사 속의 영웅들’은 더욱 솔직하고 개인적인 윌 듀런트를 드러내 준다. 자기의 완성을 위해 60년 이상을 바친 결과 얻은 더 커진 자유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는 23개의 장으로 구성하려 했지만 21번째 장까지 썼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책이 되었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 월 듀런트가 남긴 마지막 유언 

나는 죽음의 신이 우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 줄안정한 걸음걸이 그리고 다리에 새로 생긴 경직 등의 형태로 그가 명함을 남기고갔으니 말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예고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았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다.[8]

듀런트의 견해로는 <역사는 예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다.[9]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10] 

당신은 적어도   가지 방식으로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있다. 하나는 과학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외계현실의 모든 현실의 모든  양상을 물들이고 있는 다양한 과학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강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공간 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10] 

역사는 시간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10] 

듀런트는 명성보다는  명료성을 위해 싸운 철학자였다. 눈부시고  힘찬 산문으로 글을 썼으며, 또한 인류는  충분한 영감을 받기만 하면 신들과  동일한 위대성의 수준으로 올라갈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다.[12] 

듀런트는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12] 

듀런트가 1인칭 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유언이라는 느낌을 준다.[13]

 듀런트의 모든 저술의 주제는 문명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특정한 사상을 발전시켰다는 것, 그리고 이 사상의 효능에 대한 평결은 이미 역사의 법정에서 내려졌다는 것이다.[13] 

 책은 미래 세대의 도덕적 함양과 이익을 위해 과거의 유산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13] 

1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는  생물학의  단편이다.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15] 

인류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 농업의 흔적은 기원전 2 5천 년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 5천 년의 이 세월 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15] 

1 년의 1  배가 되는 시간 동안 인간은 싸움을  좋아하고,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음식과 짝짓기와 목숨을  위해서였다.[16] 

남자는 대단히  빛나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자궁이며 인간 종족의 주류인  여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존재다.[16]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만  문명화 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절(친족과 가까워지는 것),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 등이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17]

국가는 곧 위리 자신이며 조직과 방어를 위해 증진된 우리의 추진력이다. 국가는 우리가 가졌던 욕심과 호존성의 본능을 원시인처럼 드러낸다.[17] 

사냥꾼 단계에서  얻은 본능은 부분적으로는 법과 경찰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도덕성이라  불리는 불확실한 일반적 합의에 의해  통제되었다.[18] 

가족, 교회(종교), 학교, , 대중의  의견(여론) 등이 이 복잡한 도덕 규범의 형성을 도왔다. 농업시대에 가족은 협동과 상호 협조가 쓸모 있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중략) 도덕적 계율은 모든 것을 굽어보고 보상하거나 벌을 주는 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종교는 그런 계율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부모와 교사들은 종교가 인정한 이러한 규범을 교훈과 예를 통해 전수해 주었다. 부모와 교사들의 권위는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종교와의 연결을 통해 강화되었다. 법은 조직된 힘을 이용해 도덕적 규범 대부분을 뒷받침해 주었다. 대중의 의견은 형용사와 모욕적인 취급을 통해 부도덕을 억제하고, 칭찬과 장려와 권력을 통해 좋은 행실을 격려해 주었다.[19] 

공동체 생활은  이렇게 보호해 주는 사회 질서의 우산 아래에서 확장되었다.[19] 

문명이란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 질서다.[20] 

만일 질서와  문명을 위해 만들어진 힘이 보존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을 농토에 함께 묶어두던 공동의 노동이 사라지면서 가족의 끈이 약해졌다. 부와 도시들이 커지면서 종교가 약해졌다. 법은 지나친 증식과 그 편향성을 통해 그리고 입법자들을 매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그 권위를 잃었다. 대중의 의견(여론)은 분열과 두려움과 무관심 그리고 부에 대한 보편적인 숭배에 의해 그 힘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서 옛날의 본능이 사슬에서 다시 풀려나고 범죄, 도박, 부정부패, 양심 없이 돈만 밝히는 것, 성적인 문란 등이 난장판을 이루게 되었다.[20,21]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이교적인 방종이야말로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증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방종은  보통  반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연속  장면의  가지는 이교적인 방종의  시대에 이어 청교도적인 억제와 도덕적 규율의 시대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21] 

이런 전례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자녀의 손자들이  청교도가 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볼테르와 기본(Gibbon)  비관적 결론,  역사는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겠다.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생명의 흐름을 이끌어온 것은  평범한 가족의 건강함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노동 그리고 사랑이다. 또한 정치가들의 지혜와 용기도 있다.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굴하지 않는 노력도 있다. 예술가와 시인들의 끈질김과 기술도 있다. 예언자들과 성인들의 환상도 있다.[22] 

 소란스럽고  더러운  위에, 부조리함과 고통 한가운데에  진짜 신의 도시가 감추어져 있다.   도시에서는 과거의 창조적 정신이 기억과  전통의 기적에 의해 아직도 살아서  작용하고 모습을 다듬고 형태를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22]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을 향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가르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업적과 우리가 물려받은 장엄한 유산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23]

2장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디데로는 1750년에  중국에 관해 이렇게 썼다. <이들은  고대의 문물, 예술, 지성, 지혜, 정책 그리고  철학적 감각이라는 면에서 어떤 아시아  사람들보다 우수하였다. 아니 어떤 저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그들은 이런 일들을  놓고 오늘날 가장 계몽된 유럽인들과도  우열을 다툰다.> <고대의 현자들>  관해 말하면서 예수보다  5   전에 살았던 공자를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깊은 일인가.[25] 

전설은 우리에게  반고이야기를 전해준다. <그의 숨결은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고, 핏줄은 강물이, 살은 땅이, 머리카락은 풀과 나무가, 땀은 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벌레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되었다.> <사람들은 짐승과 같았다. 몸에 두른 옷이라고는 자신의 가죽뿐이고 날고기를 먹고 어미는 알지만 아비는 알지 못하였다.>[26] 

복희씨는 기원전 2852년경 사람들에게 결혼, 음악, , 그림, 그물로  물고기 잡는 , 짐승  남편 길들이는   그리고 비단을 짜기 위한 누에를 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뒤를 이은 신농씨는 농사를 시작하고 쟁기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약초에서 의약품을 만드는 법을 발전시켰다. 황제는 자석을 발견하고 관측소를 세우고 달력을 정확하게 만들고 땅을 재분배하였다. 부를 재분배하는 통치 행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전설은 이렇듯 역사가 카알라일처럼 역사를 영웅들의 연속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수많은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이루어진 발전을 몇몇 뛰어난 개인의 업적이라고 서술하였다. 이 황제 시대는걸왕의 사악함으로 인해 끝이 났다. 그는 젓가락을 발명하고 사람들에게 방탕과 폭력의 난장판을 허용하였다.[26] 

노자에 따르면  올바른 길이란 지적 활동  거짓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나 옛날  관습, 사고와 조화를 이루어 고요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28,29] 

자연이란 자연의  활동성이며 전통적 사건의 고요한 흐름이고, 계절과 하늘의 웅대한 행진이며 질서다. 그것은 모든 시내와 바위와 별에  새겨져서 드러나는 <>이다. 그것은 공평하고 인간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인 사물의 질서다. 우리가 지혜를 지니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행동의 법칙은 바로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스피노자도 주장한 것). 이 사물의 법칙은 바로 우주의 도, 즉 길이며 행동의 법칙은 삶의 도, 즉 길이다. 노자에서 두 길은 하나가 된다. 탄생, , 죽음의 리듬을 지닌 인간의 삶은 우주 리듬의 일부다.[29] 

자연에서 모든  사물은 소리 없이 작용한다. 이들은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기능을 모두 완수하지만 아무런 요구도 없다. 모든 사물은 똑같이 자기 맡은 바 일을 다하고 물러난다. 사물은 절정에 도달하면 모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원래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휴식, 혹은 사명의 완수를 뜻한다. 이런 귀환은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을 아는 것이 곧 지혜이다.[29] 

철학적인 비활동  상태인 ‘무위는 사물이 나아가는 자연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음을 뜻한다.   무위는 모든 분야에서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마크)이다.[30] 

수동성이 능동적  행위 보다 훨씬  자주 승리를  거둔다.[30]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석함을 완화시키려 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몽매함과 같아진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보다는 단순한 사람들과 더 마음이 맞으며 초심자의 모순을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나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최소의 수준으로 소망을 줄인다.[30,31] 

공자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던 서른 다섯의 나이로 노자를 찾아가 역사의 몇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 충고를 구하였다. <늙은이>는 거칠고도 신비롭고 짤막한 말로 대꾸하였다. “네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뼈까지 진흙이 되고 말았다.…… 너의 자부심과 야망을 없애라, 애착과 극단적인 목적들을 다 없애라. 네 품성은 이것들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31] 

공자의 기본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널리 교육을 펼쳐서 도덕성과 사회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이라 불리는 책에 있는 이 두 구절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제국( 세상)  최고의 미덕을 펼치기 원했던 옛사람들은 먼저 자기 나라의 질서를 잘 잡았다. 나라의 질서를 잘잡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가족을 단속하였다. 가족을 단속하기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하였다. 생각을 신중히 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먼저 지식을 최대한 넓혔다. 지식을 넓힌다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을 탐구하자 지식이 완전해졌다. 지식이 완전해지자 생각이 신중해졌다. 그들의 생각이 신중해지자 마음이 바르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게 되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다스리게 되자 가족을 단속할 수 있었다. 가족을 단속하게 되자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었다. 나라가 바르게 통치되자 온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었다.”[33] 

책이 든 봇짐 하나 등에 짊어지고/ 당신은 천리만리 먼길을 떠도네.

소매 속엔  단검 하나/ 주머니엔 시를 모은 책 한 권.” – 이태백 [36] 

이렇듯 드문  천재에게 내린 평범한 죽음을 못마땅히  여긴 전설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물에 비친  달의 영상을 끌어안으려다 그만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39] 

중국은 전에도  이미 여러 번이나 죽었다. 그리고 여러  번이나 다시 태어났다.[40] 

3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이루어진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기원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인도철학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42] 

<우파> <가까이>, <샤드> <앉다>라는 뜻이다.  말은  하나 혹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구루,  선생님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가르침은  이해와 깨달음의  단계를 보여준다.

 번째  단계는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내면을  관찰하는 일이다. 어떤 형태나 내용이나  개체성을 가진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면을 들여다보라. 마침내  그런 조작들 뒤에 숨어 있는 마음  자체를 느낄 때까지 그리고 의식  자체의 의식을 느낄 때까지 계속해라.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들모든 지각과 따라서 모든 사물들이 토대로 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실체다. 구루들은 이러한 근원적인 실체를 아트만(자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영어의 <>, <영감(>등과 마찬가지로 <숨결>을 뜻했던 말로 보인다.

 번째로  모든 사물에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마찬가지로 내적이고 생명이 있고 비물질적인  힘의 숨결이 있다. 이들 살아 있는  모든 힘의 총합이 브라마(범천)이다. 브라마는  삼라만상 모두에 스며들어 있는 정수로 비물질적이고 성의 구별이 없고, 비개인적이며 만질 수 없는 것이다.

 번째로  아트만과 브라마는 원래 하나다.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혹은 나무나   안에도 들어 있는 비개체적 영혼  혹은 힘은 세계의 비인격적 영혼과  동일한 것이다.[42,43]  

붓다는 자신에게 물었다. <인간의 근심과 병, 늙음과 죽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탄생과 죽음의 무한한 연속의 환상이 나타났다. 그는 탄생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46] 

어째서 탄생은  그치지 않는가? 카르마() 법칙이 새로운  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새로  얻은 삶에서 전생의 악행을 보상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완전한  정의와 지치지 않는 인내와 모두에게  친절한 삶을  수가 있다면,   영원한 일에 생각을 결부시키고, 시작되고  소멸되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어쩌면 재탄생을 면제 받을 수도 있다. 즉 악의 원천 자체가 말라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소망을 접고 오직 모두에게 좋은 일만 할 수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망상인 개체성(나 자신이라는 의식)은 극복되고 영혼은 마침내 의식이 없는 무한성과 합쳐질 수 있게 된다.[46] 

행복이란 이교도들이  믿듯이 이승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저승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평화는 열망이 없는 냉정한 평온함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해탈(니르바나)이다.[46] 

<화난 사람을  친절함으로 이기도록 해라.> 그는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 미움으로 미움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미움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중단된다.>[47] 

종교에 대한  붓다의 생각은 순수하게 윤리적이었다. 그는 의식이나 숭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행동에만 관심이 있었다.[48] 

정신이란 총체적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이르는 추상적 용어이다.[48] 

죄라는 것은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익이나 쾌락을 찾는  일이다. 영혼이 모든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영혼은 되풀이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해탈이란 이기심을 극복한 고요한  상태이다. 붓다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에 우리는 도덕적 개인주의와 심리적 개이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욕심에 시달리는 우리의 자아는 실제로는 분리된 존재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강물 위에 이는 순간적인 잔물결이고, 바람에 날리는 운명의 올가미 속에 얽혔다 풀어졌다 하는 작은 매듭일 뿐이다. 우리 자신의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실망과 패배, 비탄과 고통,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이 더는 이전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한성의 넓이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의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면 마지막에 우리는 해탈, 곧 이기적이지 않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48,49] 

모한다스(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복음에도  마음이 끌려 열렬한 붓다 숭상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덧붙였다.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51] 

간디를 이끌었던  생각은 고대 방식의 단순함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그것이었다.[52] 

4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세계 미술사가인  엘리 포르는 이렇게 썼다. <이집트는   예술품의 견고함과 통일성과 훈련된  다양성 그리고  성과물의 엄청난  지속성과 보존 능력으로 지구상에 나타났던  문명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문명의  장관을 제공하고 있다.>[55] 

파라오들은  부자가 되자 궁전과 무덤을 위해  부를 쏟아 부었다. 헤로도토스는 쿠푸(기원전 약 2590년경)가 카이로 교외 기자 근처의 사막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를 세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이것은 인간이 세운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큰 것이다.l 그것은 넓이가 13 에이커에 달하고, 높이가 448 피트( 134미터)에 이른다. 그 공간 안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성 파울 교회 그리고 피렌체 성당과 밀라노 성당을 모조리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다.[57] 

어째서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가?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속에 <>라고 부르는, 자기와   같은 영적인 짝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육체가 굶주림, 폭력, 부패를 이기고 보존된다면 원래의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었다.[58]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역사에 부풀려진  이들 건축물을  위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구경꾼의 추억과 상상력일 것이다. 분명  사진은 이집트 건축물을 지나치게 고상한  것으로 만들었다. 사진은 흙먼지 말고는  무엇이든  잡아낼 수 있고, 대지와 하늘의 고귀한 원경을 이용해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웅장하게 만들 수 있다. 기자의 일몰이 피라미드보다 더 위대하다.[59] 

이집트의 도덕  규범은 근친혼을 막지 않았다. 오누이가  혼인한 기록을 얼마든지   있다. 많은 파라오들은 왕실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아니면 가족의 부를 나누지  않기 위해  같은 혼인을 했다. 당시 부는 여성의 혈통으로 상속되었기  때문이다.[61] 

아톤은 지상의  모든 종족을 먹이고 통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신성(神性)의 개념으로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만드는 창조적인 힘이다. 태양신의 열기는 생명의 따뜻함이고 사랑의 열정이다. 그것은 모든 식물을 먹이고 열매 맺게 하고 모든 동물에게 힘을 주고 <여자 속에서 남자아이를 만드는> 존재다. 태양신은 모든 종족과 모든 형태의 성장을 위한 신이다.[70] 

5  구약성서의 철학과   

 책의  의도는 문명의 역사를 한정된 지면에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남겨진 사상과 표현의 걸작을  탐구하고 그 예를 살펴보는 것이다.[73] 

기독교 이전  시대 근동과 중동은 정말로 사람들의  가마솥이었다. 사람들은 기질과 자부심이  뜨겁고 정착지에서는 참을성이 없어  쉬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73] 

메시아란 다윗의  후손 중에 <기름 부음을 받은 >  뜻하는 말로 다윗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영광과 행복을 다시 만들어낼  것을 소원한다는 뜻이었다.[77] 

다윗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요소들을 지닌 놀랍고도 확실한  남자이며, 내면에 많은 야만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한 문명의 모든 약속을 보여주는 남자이다.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솔로몬이었다. <평화>를 뜻하는 <샬롬>이란 말에서 온 이름이다.[77] 

예언자들은  우연히 미래를 예언하였다. 그들은 원래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기 보다는  현재를 고발하는 사람들이었다.[78] 

레위기에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간결하게 기독교 윤리가 표현되어 있다. < 이웃을  몸처럼 아껴라>(19 18) [82] 

칼라일은 욥기를  가리켜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다. >…… 성서나 혹은 성서 바깥에 이와 동일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 쓰인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였다.[83] 

<불의가 그토록  자주 승리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있단 말인가?>[83] 

그는 지상의  존재란, 피할  없는 죽음을 매일  연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83] 

철학은 전체의   속에서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이 그 최초의 교훈이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라는 것은 아마도 건강, 아름다움, 진실, 지혜, 도덕성, 행복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것이다.[85] 

시인들은 두 가지 답변을 내준다. 하느님과 그리고 우주와 화해하라. 또한 사랑으로 너의 삶을 밝게 만들어라.[86] 

<진실한 사랑에서는  영혼이 육체를 감싸 안는다>-모파상[90] 

모든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에고를  가장 많이 넓혀주고, 살아 있고 평화로운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과 팔을 활짝 여는 일이다. 영혼이 행복하면 그 사랑도 커진다.[91] 

6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가지  생각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편적이라는 것과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이 영속한다는 생각이었다. 지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의 존재이기를 중지하고 새로운 다른 것으로 된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그리고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쉬지 않고 중지하지 않는 <과정>이다.[95] 

이런 흐름  속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그가 <>이라고  부른 것이다. 개별적인 영혼은 생명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의 일시적인 혀일 뿐이다. 인간은 이 불꽃 속에 변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불을 붙여 밤에 내놓은 촛불과 같다>. 신은 영원한 불이고, 유동적인 세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이런 보편적인 변화 속에서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정반대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선은 악이 될 수 잇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다.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된다. 이러한 대립은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측면이다. 힘은 대립하는 두 요소의 긴장이다. <싸움(경쟁)>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두의 동족이다. 싸움이 만들어낸 일부는 신이 되고, 또 일부는 인간이 된다. 그것은 어떤 존재를 노예로, 또 어떤 존재를 자유롭게 만든다.> 마지막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싸움은 정의다.>[95,96] 

활동적인 삶을 바라던 그녀(프사파)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거기서 시,음악,춤 등을 가르쳤다. 그것은 분명 역사상 알려진 최초의 <여성 교양 학교>였다. [96] 

피타고라스는 처음으로 <세계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부여한> 인물이다. <코스모스>란 질서라는 뜻이고, 이것이 피타고라스의 핵심적인 단어이다. 우리의 소망이 질서를 이룬 것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질서를 이룬 것이 곧 미덕이다. 그리고 국가 안의 질서가 유지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정부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말할 때는 바로 피타고라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99] 

기원전 450년경  소피스트들이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종교심의 토대를 없애기 시작하기 전까지  종교는 사람들과 가까웠고 그들의 도덕적  생활의 바탕이었다. 집집마다 신상을 갖추었고, 신이 지켜주는 가운데 가족은 서로  결속하였다.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다. 아테네의  수호신은 아테나 여신이었다. 여신을 숭배하느라  시민들은 일시적으로 가혹한 경쟁을  잊어버리고,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을 짓기 위해 파산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102] 

아티카의 중심지인  아테네는 특히 정부 형태의 실험과  정신의 일들에 대한 탁월함으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102] 

 사람이  나타나 말이나 행동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타협하게  만들었다. 솔론의 평화로운 혁명은 역사상 용기를 주는 하나의 기적이었다.[104] 

아테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법을 주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있는 가장 좋은  법을 주었다.> 서로 갈등하는 그룹과  이해 단체들에게 납득시킬  있는  한에서 가장 좋은 법안이었다.[107] 

7  아테네의 황금 시대 

1820년경 셸리는  이렇게 썼다. <페리클레스의 탄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에 들어 있는 시대는……세계  역사상 가장 기억할만한 시대이다.>[109] 

아테네는   국민의 역사에서 정치 지도력, 예술, 과학, 철학, 문학, 종교, 도덕 등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 흩어져서 각자가 따로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하나의 직물로 짜여져 나타난 시대였다.[111,112] 

그리스 사회는  남성만의 단성 사회였다. 그래서 여성의  정신과 매력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프랑스 계몽주의에 주었던 것과 같은  흥분, 우아, 자극 등이 결핍되었다. 보통의  아테네 사람들은 부드러운 성격이 모자랐다생애의 처음 6년을 빼고 남자들은 언제나  다른 남자들과 살았다.[114]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은 동물에게 친절하고 인간에게  잔인하였다.[114] 

아테네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서 선량해지기 어려웠다. 그들은 악덕을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성을 멸시하였다. 어떤 민족도  이보다   상상력이나 혹은   생생한 혀를 가진 적이 없었다. 명료한 사색과 그것의 산물인 명료한 표현이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신사적인 것으로 여겨졌다.[115] 

질서와 균형  비율, 형태와 리듬, 정밀성과 명료성에 대한  감각은 그리스 문화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116]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스  회화는 선으로 이루어진 논리학이고  그리스 조각은 균형의 숭배이며 그리스  건축은 대리석으로  기하학이다.[116] 

투키디데스의  페리클레스는 <우리는 무절제함 없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말하낟. 사물의 본질을 잡아내고 형태와 생명의 이상적인 가능성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었다.[116] 

그리스 사람들은  예술이란 삶에 종속된 것이며, 삶은  모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건강한 공리주의 성향을 가졌다.[117] 

그리스 예술은  빌려온 경외심으로 명상을 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사람들의 진짜 관심과 기획을  위한 것이었다. 예술가는 작업장에 파묻혀  보통 사람과 다른 언어로 작업하는  무능력한 은둔자가 아니었다. 예술가는  공공연하고 지적인 직책을 맡아 온갖  등급의 노동자들과 함께 작업하는 장인이었다.[117] 

엠페도클래스는  인간과 다른 모든 종은 생존 경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120]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입자일 뿐이며, 생각이란 특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입자들이다라고 하였다.[120] 

아낙사고라스는  우주는 약간 물리적인 <누스(nous, 정신)>에 의해 활력을 받은 입자들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이며, 이 누스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생명과 운동의 원천과도 비슷한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원래 흙, 습기, 열기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120] 

분명 아테네의  소수 지식인 사이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가지 일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다. 널리 여행을   중산층이 많아진 것과 떠돌이 학자들을 통해 사교육이 퍼진 것이다.[121]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으로 자신의 시대를 시작하였다.[121] 

보통   시대의 철학은 다음 시대의 문학이  된다.  세대 동안 사색이나 탐구의  영역에서 논쟁이 이루어진 사상이나  문제들은 이어지는 세대에 가서 연극, 허구,  문학의 배경이 되곤 한다.[122] 

황금시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 아테네는  영혼이  지쳤고,  세대 동안이나  계속된 싸움을 통해 품성이 타락한 것을 느꼈다.[132] 

8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아테네는  도시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와 부자들의 도시가  되어 서로 전쟁을 한다.>가난한 사람들은  법령 제정이나 혁명을 통해 부자들을  약탈할 음모를 꾸몄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항해 방어 조직을 만들었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다.[134] 

철학은 시민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지성을 함양해서 신의 계율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독하는 신성에 대신하게 하였다.[136] 

플라톤은 <두번째로  좋은> 국가의 초상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개된 교육 체계를 만들고, 교육적 맷돌의 가장 힘든 시련을  거쳐 살아남은 50 이상의 <보호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이다. 이들 보호자들은  재산을 가져서는  되고, 돈도 아내도  없이 소박한 삶과 높은 철학에 헌신해야  한다.. 그들은 우생학의 원칙에 따라  모든 짝짓기와 결혼을 감독한다. <남성과 여성 중에서 최고인 사람은 가능한 한 자주 최고의 상대와 맺어져야 한다. 열등한 사람은 열등한 사람끼리 결합한다. 그들은 한 종류의 결합에서 태어난 후손들을 양육하고 다른 종류의 결합이 만든 후손은 양육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대중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146] 

플라톤과는  더불어 논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더불어  일을 해야 한다.[148] 

「영혼에 관하여」는  영혼을 <섭취, 성장, 소멸을 하도록 해주는  유기체의 >으로 규정하였다. 신을 제1원인으로 본 것,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기본 에너지로 파악한 것은, 세계란 움직이는 에너지라고 여기는 현대의 관점과 일치한다.[150] 

행동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행복의 비결은 미덕에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덕은 지성이다. 이것은  현실, 목표, 수단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찰이다. 통상적으로 <미덕>이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황금의 중간(황금률)을 뜻한다. 정치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들간의 타협의 기술이다. 모든 사람은 불평등하게 만들어졌다.[150] 

알렉산드로스는  육체적으로 거의 신에 가까웠다. 모든  스포츠에 뛰어났으며 장난삼아 사자를  사냥하였다.[151] 

이렇듯 완벽함과 힘을 갖춘 젊은이가 성숙한 판단력이나 교육 받은 정신을 발전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벌써 왕관이 그의 머리에 씌워지고, 죽을 때까지 전쟁과 통치가 그의 마음을 뺏어갔다. 죽음은 그가 카이사르의 명료한 지성이나 나폴레옹의 빠른 이해력을 얻기도 전인 서른 세 살에 그를 찾아왔다. 그는 훌륭하게 말하는 법을 알았지만 정치와 전쟁을 두루 겪으면서 수많은 오류에 빠졌다. 그는 독단적 신앙을 넘어섰으나 마지막까지 미신에 붙잡혔다. 그의 궁정에는 점성술사들이 우글거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었으나 자신의 성정은 다스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일상의 아첨에 흐려지게 했다. 흥분과 영과의 도가니 속에 살았으며 전쟁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정신의 평화를 거의 알지 못하였다.[152] 

그의 장수들이  누구에게 제국을 넘기곘는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강한 사람에게> [155] 

그가 이렇게  인생의 절정기에 죽은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나이가  들었더라면 분명  환멸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패배와 고통을 통해 인생의 깊이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 처음  시작할 때처럼 – 전쟁보다 정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렇게 엄청나게 커진 왕국을  유지하고 감시하려는 노력은 그의 빛나는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온통 정력이었다.[155] 

9  로마 공화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판관들은 이탈루스가 오이노트리아의  왕이 되었을 , 그곳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탈리아 사람(이탈루스 사람)이라 불렀다고  보고한다.>[158] 

초기 공화국  시대 가족의 질서는 거의 절대적인  아버지의 권한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버지만이 법 앞에 권리가 있었다.[159] 

로마 사람들의  가장 깊은 경건함과 가장 진지한  숭배는 생명의 어머니이고, 죽은 자들의  고향이며 솟아나는 씨앗 속에 감추어진  마법의 힘인 대지를 향하였다.[161] 

아이가 의심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신앙심은 규율, 의무, 예의 등을 그의 성격 안에  만들어 넣었다. 종교는 가족에게 신의  보장과 후원을 보내주었다. 또한 부모와  자식들에게 절대로 스러지지 않는 상호  존경심과 경건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애국심은 역사상 알려진 다른 어떤 사회보다 더 강한 정열이 되었다.[162] 

그들은 농부, 노동자, 무역인, 기술자, 선생, 은행가 등이었다. 일부는 부유하고 일부는 권력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난하였다. 모두들 로마의 법이  자신들에게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카이사르  이전 대부분의 로마 역사는 이들  평민층이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의  역사이다. [164] 

한니발은 신체가  어려움을 견디고, 입맛은 곤궁을 견디고, 생각은 사실을, 혀는 침묵을 견디도록 자신을 훈련하였다. 적군(로마)의 역사가인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전쟁터에 맨 먼저 뛰어들고 맨 마지막에 떠나는> 사람이었다.[168] 

무한한 공간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낡은 세계는 소멸한다. 거대한 덩어리에서 태고의 안개 일부가 떨어져나와 식어 지구가 되었다.지진은 신들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아니라 지하의 가스와 흐름이 확장되는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신의 목소리나 호흡이 아니라 구름이 뭉쳐진 것이 충돌하면서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비는 유피테르의 선물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지상에서 증발해 올라갔던 습기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루크레디우스는 철저한 진보주의자였다.[175]

영혼(아니마)이란 <생명의 호흡>이다. 이것은 신체 곳곳에  아주 섬세한 물질처럼 퍼져  부분을  움직이게 해준다. 그것은 몸과 더불어  성장하고 나이를 먹다가, 몸이 죽으면   원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생명은  자유로이 간직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임시로 빌린  것이다. 우리는   잇는 한 그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의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처럼 우아하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한다.[176] 

죽음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저승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죽음을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저승이란 없다. 지옥은 이승에서  고통을 받는 것으로, 그것은 무지, 정열, 싸움을 좋아함, 욕심에서 온다. 천국은 이승의 <현명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신전>  들어 있다.[176] 

미덕이란 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조심스럽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된 능력과 감각이 함께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진정한 부는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176] 

역사는 국가와  문명이 일어나고, 번성하고, 시들고, 죽는 과정이다. 그러나  국가나 문명은 거꾸로  관습, 도덕, , 예술  문명의 유산을  전달해 준다. <달리면서 생명의 램프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달리기 선수들처럼.>[177] 

동과 서의  끝없는 싸움, <부드러운 마음>과 위안을 주는 신앙 대 <거친 마음>과 유물론적 과학의 끝없는 싸움 속에서 루크레티우스는 거의 혼자 자기 시대의 갈등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 물론 그는 철학자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178] 

10  로마의 혁명 

로마와 로마가  다스리는 제국 전체에서 모든 문명과  거의 모든 세대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경제 능력의 불평등과 상속을 통해  부의 집중이 점점 커졌다. 부의 집중  현상은 제국의 정복과 개척 등을 통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부의 집중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때로는 혁명을 불러온다. 이미 아테네에서 그런 경우를 보았다. [181] 

우리는 카이사르가  처음에는 무자비한 선동가이며 거침없는  난봉꾼이었다가 책임감에 의해 천천히  역사상 가장 신중한 정치가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의 결점을 보고 좋아하더라도 그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된다. 우리는 그가 여자들을 유혹하고  교도관을 매수하고 책들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자신을 그와 대등하게 여길 수는 없다.[195] 

마침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13군단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의   마디 말이 벌써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동료 병사 여러분!> 하는 말이었다. 게으르고 부패한 귀족 정치는 로마에  질서, 정의, 번영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대들은 자기를 따르겠는가?    명도 거절하지 않았다..... 기원전 49 1 10  그는 1 군단을 거느리고 알프스 이남 갈리아의 남쪽 경계선을 이루는 작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00] 

용서 받은 일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203] 

11  로마 제국(기원전 27  180) 

아우구스투스는  항거하기 힘든 선행을 수없이 베풀었다. 또한 변화에 단계를 두고 예의를  다함으로써 변화를 쉽게 만드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였다.[208] 

여자들은 어머니로서  존경 받기보다는 성적으로 탐나는 대상이 되고 싶어 하였다. 많은 로마 토박이들은 결혼 생활을 기피하거나 아니면 피임, 낙태, 영아 살해 등을 통해 가족의 수를 제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현상을 부모의 권위와 사회적 질서, 로마인의 성격 탓이라고 여겼다.[210] 

예술은 예술가와   수용자의 감정을 전제로 한다. <나를  울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먼저 슬픔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감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평온함 속에서 기억된 감정>  것이다.[214] 

12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에드워드 기본의  판단을 들어보기로 하자. <누구든 세계  역사에서 인류의 조건이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대를 꼽으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아마도 지체 없이 네르바 황제의  등극(96)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까지의  시대를 꼽을 것이다.  황제들의 통치  기간은 아마도 대규모 국민의 행복이  통치의 확고한 목적이 되었던 역사상  유일한 시대일 것이다.>[226] 

<마음의 평정>(안토니누스의  최후의 암호)이란 <보편적 자연(본성)에 의해 너에게 할당된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모든 것은 <나와 조화를 이루고 그대 우주(전체)와 조화를 이룬다.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것도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늦은 것도 없으며 그것은 그대 우주(전체)에 적합한 시간이다.>[234] 

<어떤 사람이  네게 나쁜 일을 했다면,  자신이  해를 입는다.…… 그를 용서해라.> 이것이  실천할  없는 철학으로 보이는가? 그와는 반대이다.  세상에서 훌륭한  기질이란 그것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 정말로 사람은 불행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 어떤 재앙이 덮쳐도 그의 영혼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로 받아들여라. [234] 

“……너는  부분으로 존재하였다. 이제 너는 여기서  떠나 너를 만든 그것 속으로 돌아간다. …… 또한 자연이 바라는 바이니……그렇다면   작은 시공(時空) 통과해서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만족하면서 너의 여행을 끝내라. 올리브 열매가 익으면 떨어지면서 자신을 만들어낸 자연을 축복하고, 자기가 자란 나무에 감사하는 것처럼.”[235] 

13  인간 그리스도 

우리는 그가  가장 사랑에 넘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동정  어린 부드러움을 보았다. 그것은 확고한  헌신을 만들어냈다. 회개한 죄인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 감동한  창녀가 그의  앞에 무릎을 끊고 그의 발에 기름을  붓고   위에 눈물이 떨어지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루가 7 37-38, 47) [242]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한 혁명은 훨씬  깊은 종류의  혁명이었다. 그런 혁명이 없었다면 모든  개혁은 오로지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기적인 욕심, 잔인성, 정욕 등을  없앨 수만 있다면 유토피아는 저절로   것이다. 이것이 모든 혁명 가운데 가장 깊은 혁명이 될 것이고, 이런 혁명에 견주어 보면 다른 혁명은 단순히 계급간의 쿠데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이런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245]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마르코와 마태오는 죽어가는 그리스도에게  이토록 절망적인 인간의 말을 주었다. 빌라도 앞에서 그를 떠받치던   위대한 믿음이  쓰라린 순간에  시들어 가슴을 찢는 의심이 되었던  것일까?[251] 

14  기독교의 성장 

베드로는 시리아에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고 서쪽으로 떠나  로마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베드로의  자리(로마 교황직) 세우고  번째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64 네로 황제  치하에서 박해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256] 

유럽의 도덕적, 정치적 정부라고 자처하고 있던 교회는, 국가가 국가 배신자를 보듯이 이단을  보았다.  사회 질서의 기초에 대한  공격이라고 여긴 것이다.[265] 

국가와 교회는, 그들 생각에 사람들이 도덕적,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법과 도덕의 복합적인 구조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단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서로 힘을 합쳤다. 위기에 몰린 정부는 거의 모든 종교 재판 관청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국가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종교 재판과 동일한 형벌을 내렸다. 자유는 안전이 만들어 내는 사치품이다.[266] 

<지혜를 향한   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272]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275] 

15  르네상스Ⅰ :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르네상스는  발생 초기부터 이미 죽은 다음 천국의  불확실한 즐거움 대신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모험을 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학만을 복원시킨 것이 아니라 그 쾌락주의적 자유로움도 똑같이 복원시켰다.[281] 

돈은 문명의  뿌리다.[282] 

자유로워진  감각은 자연, 여자, 남자, 예술에 드러난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 - 1534)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통합되지 않은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규율(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282]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상업, 전쟁, 사상의 통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284]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피코[298]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중략)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298] 

레오나르도   빈치는 너무 빨리  가지  일이나 주제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는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통합하는 목표, 주도하는  이념이 없었다. <보편인> 빛나는  부분들을 이어 붙여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능력들을 지녔기에 그들을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307]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 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화가여, 보라, 그대가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물에 주의를 돌리고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 <언제나 인물이  머리를 가슴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라.> <인물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게 만들어라.>[308]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가장 많이  일한다>(310) 

레오나르도는  과학의 기본 원칙 하나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수학이나 수학에 기초한 그 어떤 요소를 적용할 수 없을 경우 확실성이란 없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플라톤의 말을 흉내냈다.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내 작품의 어떤 부분도 읽지 말 것.>[318] 

레오나드로   빈치는 물질에서 정신을 보았고, 영혼을 믿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영혼은  오로지 물질을 통해 그리고 변경시킬   없는 법칙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활동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구절에서는  겸손과 열렬함으로 신에게 말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신을 자연, 자연의 법칙, <필연성> 동일시하였다. 마지막까지 신비적인  범신론이 그의 신앙이었다.[320] 

<하루를   보내면  잠이 달다. 그렇듯이 인생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321] 

16  르네상스Ⅱ : 로마 

일부 추기경들은  자신을 성직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가, 외교관, 통치자라고 여겼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로마 원로원이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338]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문명이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정당성을 넘어 과대하게 찬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퍙범한 보통 사람은 밭을 갈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동이 틀 무렵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일을 하였고,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근육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341]

과학은 예술처럼 속인들과 교회의 통합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번영을 누린 과학은 의학이었다. 남자들은 건강을 위해 식욕 멀고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였기 때문이다.[342]

모든 세상의 일들은 자연적인 이유를 가진다. 기적이란 우리에게 일부만 알려진 자연력의 활동일 뿐이라고 했다.[344]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가장 정직하고 부도덕한 책이다. 명료하고 솔직하게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에게  권고하는 도덕률을 실천할 필요가 없으며  실천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347]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규칙인 <국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을 국가의-곧 국민의 조직-안전이 최고의 법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평화라는 기독교의 이상은 시민의 기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따금 전쟁을 하는 것이 국민에게는 강장제가 되고 규율과 통일성이 기운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로마 공화국에서 미덕이란 겸손이나 온화함이 아니라 정력과 지력으로 무장한 남자다움, 강함, 용기 등이었다. 국민을 강하게 하는 전쟁은 좋은 것이다. 한 국가가 팽창을 멈추면 곧 죽기 시작한다.[347] 

개혁은 수많은  관리들에게는 지겨운 일이었고, 그래서  어두운 저항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빨리 죽기만을 바랐다. 교황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개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탄식하였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였다. < 인간의 능력이란 얼마나 많이   시대에 달려 있는 것인가!> [350] 

그는 결단을 내릴 백 가지 이유를 보았지만 또한 그에 반대 할 이유도 백 가지나 보았다. 마치 교황의 옥좌에<부리단의 당나귀> 가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스콜라 철학자인 장 부리단이 망설임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철학적인 나귀가 절망적으로 배가 고팠지만 두 개의 건초더미가 같은 거리에 떨어져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느 한쪽을 선택할 아무런 이유도 찾아 낼 수 없었기에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352]

17  르네상스Ⅲ : 베네치아의 일몰 

베네치아 문화는  역사상 알려진  중에서 가장 색채가  화려하고,  비싸고, 감각적으로 매혹하는 문화이다.[362] 

베네치아 사람들이 그림을 원한 것은 자만심에서 나온 일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의 영광이다. 개인은 자신의 탁월함을 영원히 기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티치아노의 많은 걸작들이 나왓다. 정부는 신민들에게 자신의 힘과 권위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훌륭한 벽화들이 나타났다.[364]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바친다. 길고 고통스런 생애  동안 그는 계속해서 창작하였고, 미술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걸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작품들이 이른바 살과  피를 찢고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의 정신과 마음에서 터져나온 것으로   가지를 완성한 다음이면 그는  출산의 고통으로 약해진 시간을 견디곤  했다. 그것들이 수십만 번의 망치질과  끌과 연필과 붓을 움직여서 형태를  얻은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것들은 불멸의 주인처럼 하나씩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의 지속적인 형태들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차지하였다.[371]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과 선,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을 뒤섞은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거나, 혼돈에 질서를 , 사물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은 부여하는 지적인 의지를 보면,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삶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을 얻는다.[371,372]

 

18  종교개혁Ⅰ :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역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조직의 하나이다. 그 기원, 목족, 방법, 흥망성쇠, 잘못, 업적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면 다른 어떤 주제나 제도의 연구보다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해 많은 빛을 던져줄 것이다.[373]

교회와 성직 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개혁은 세속의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의회는 이 생각을 환영하였다.[377]

 위클리프는 교황이, 사도 요한이 예고한 반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묵시록의 짐승이라고 하였다. 이런 약점을 고칠 방안으로 위클리프는 모든 재물과 권리를 교회로부터 빼앗아야 하고 사제들은 사도의 빈곤 속에서 살라고 제안하였다.[379] 

교황국이 가장 찬란한 시대 하나를 맞고 있을 때 종교개혁이 다가왓다. 콘스탄츠 공회의는 세명의 교황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마르틴 5세는 교회 집행부와 재정의 통합을 복구시켰다.[388]

그는 가장 유명한 책 [어리석음의 예찬] 우신예찬을 7일만에 썼다. 이 책은 그의 생전에 40판을 거듭하였다. 뒷날 1632년에 밀턴은 이 책이 캠브리지에서 <모든 사람들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작은 책자는 인류가 어리석음 덕분에 그존재를 이어가고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제 정신이라면 어떻게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평생 동안의 일부일처제라는 대가를 지불하겠는가? 정신이 멀쩡한 여자가 어떻게 덧없는 한순간의 황홀경을 위해 출산의 고통과 양육의 시련을 대가로 지불하겠는다? 삶의 사실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미래를 안다면 누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남자와 여자들이 멈춰 서서 제대로 생각을 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은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고 인류의 치명적인 무지에는 거의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는다. 이 작은 책자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을 비웃는다. 무에세 세계를 창조한 이브의 순진한 죄, 세대에 세대를 이는 잔혹한 형벌, 동종녀 출산,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성체로 바뀌는 일등을 비웃엇다.[392]

에라스무스는  베드로가 율리우스를 천국의  앞에서 가로막는다는 가상의 대화를 썼다.

베드로 :   자세히 살펴보자. ....... 성직자의 일상복, 그러나   아래로는  묻은 갑옷이 있구나. 눈은 야만스럽고, 입은 거만하고, 이마는  단단하고, 몸에는 온통 죄악이 묻어  있구나. 숨결은 포도주 냄새로 진동하고  여자를 밝히다가 건강을 망쳤구나. , 자네가  조른다면 자네가 누군지 내가 말해  주지. ........ 자넨 지옥에서 올라온 율리우스  황제로구나. ......

율리우스 :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을 겁니까?

베트로 :   같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열게 될 꺼야. [393] 

수많은 인자들과  영향들 - 교회 내부의 , 지적, 감정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인 것들 -  수백 년의  방해와 억압을 견딘 다음 하나의  회오리바람으로 뭉쳐져 야만인이 로마를  정복한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전복을 가져올 참이었다. 아비뇽 유폐와  교황 분열로 인해 교황청의 힘이  약화된 . 수도원 계율과 성직자 독신주의의  붕괴, 고위성직자의 사치와 교황청의 부정 부패, 교황들의 세속적 활동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6세의 도덕성의 결함, 율리우스 2세의 전쟁, 레오 10세의 조심성 없는 즐거움. 성유물 판매와 형벌 면제 칙령(면죄부) 행상. 십자군 전쟁과 터키 전쟁에서 기독교에 대해 회교가 승리를 거둔 일.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점차 퍼져나간 일. 아랍의 과학과 철학의 유입. 스콜라 철학이 붕괴되고 스코투스의 비합리주의와 오캄의 회의주의가 등장한 것. 개혁을 위한 공회의 운동의 실패. 세속적 고대의 발견과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인쇄술 개발. 읽기 교육과 일반적인 교육의 확대. 성서의 번역과 성서 읽기.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았던 사도들의 삶과 교회의 화려한 의식 사이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도이칠란트와 잉글랜드의 부와 경제적 독립이 커진 일. 종교적 제약과 요구를 싫어하는 시민 계급의 확대. 민족주의의 심화와 왕조들의 권력 강화. 모국어와 모국 문학의 민족주의적 영향. 발도파, 위클리프, 후스 등의 영향. 종교 의식은 줄이고 더욱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직접적인 종교를 향한 신비주의적 열망......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힘의 급류를 형성하였다.[403] 

19  종교개혁Ⅱ :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루터는 도이치어로   유명한 역사적 답변을 하였다. “폐하와  귀족들께서 간단한 답변을 원하시므로  나는 쓸데없이 구별하지 않고 대답하겠다..... 내가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것이  아닌 (나는 교황과 공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일  없다. 그들은 서로 모순되니까), 나의 양심은 하느님 말씀에 따를 뿐이다. 나는 어느 것도 취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 양심에 거슬린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멘.”[420,421] 

농민들은 루터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종교가 자신들의 이유를 정당화시켜 주고 또 희망을 주고 행돋하도록 부추기고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머렷다고 느꼈다. 그들 중 일부는 절망적인 분노 속에서 시니컬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 혹은 그 자녀들은 카톨릭으로 되돌아갔다. 일부 사람들은 루터가 비난한 과격분자들을 추종하엿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서 공산주의의 권고를 들었다.[433]

20  카톨릭 종교 개혁(1517-1563) 

이탈리아가 개신교가 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성직자에 반대한다 하도 그리고 교회에 가지 않는다 해도 일반적으로 종교심이 강하였다. 그들은 계절에 따른 의식들을 좋아하고 도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는 성인들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신을 상상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극으로 데려가는 신앙,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추락한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믿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이 드물었다.[444]

수도원 새혁자들 중에서 스페인 풀신인 아빌라의 테레사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빌라의 기사였다. 그는 도덕적 청렴함과 교회에 대한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밤이면 가족에게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어주었다. 어머니는 병약한 사람으로 기사들의 사랑 이야기로 고통을 달래곤 하였다. 테레사의 어린 시절 환상은 낭만적인 성스러운 수난 사이에서 흔들렸다.[447]

여행과 고난의  한가운데서 테레사는 신비로운 헌신에  대한 유명한 책을 썼다. 이들    곳에서 그녀는 육체의 질병이  되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 두뇌  안에서 많은 부풀어 오른 강들이  덤벼들어 낭떠러지로 쏟아지는  같다. 물소리에 잠기지도 않은 채 다시 새들의 소리가 노래하고 휘파람을 분다. 나는 뇌를 지치게 해서 두통이 악화되었다.>[450]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되고 성직자가 애인을 두었을 경우에는  심각한 형벌이 정해졌다. 성직자들의 도덕성과  규율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작은  개혁들이 도입되었다.... 공회의는 루터의  반란을 점화 시킨 잘못된 악습들을 정직하게 인정하였다..... 공회의가 이제 그 임무와 유용성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교황과 황제가 동의함으로써 공회의는 1563 12 4일 마침내 지친 대표들의 행복한 연설 속에서 끝을 맺었다. 앞으로 수백 년을 위해 교회의 노선이 확정되었다.[460] 

공회의는 루터의 반란을 점화시킨 잘못된 악습들을 정직하게 인정하였다. 한 교령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형벌 면제를 승인할 겨우그것과 결부된 온갖 법죄적 이익을 완전히 배제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통탄할 만한 악용의 원천이다.>[460]

카톨릭의 종교  개혁, 혹은 반종교 개혁은 주요 목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카톨릭 국가나 개신교  국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처녀를 유혹하고, 직위를 판매하고,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성직 계층의 도덕성은  개선되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거친  자유는 진정되어 인류의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형태가 되었다.[461] 

21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엘리자베스 1  시대의 영국은 르네상스(셰익스피어), 종교  개혁(엘리자베스), 계몽주의(베이컨) 등이 하나로  합쳐져 천재와 역사가 폭발적으로 집약된  시대였다.[463] 

삶에 대해  이보다  쓰라린 판결이 있을까. 있다. '아테네의 티몬' 생각해보라...돈을 잃고  친구들도 하룻밤   사라진    그는 문명의 먼지를 발에서 툭툭  털어내고 숲의 고독 속으로 은둔한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불친절한 야수도 인간보다 친절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467] 

증오의 황홀경에 잠겨 그는 자연에게 인간을 낳는 일을 멈추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악덕의 야수들이 불어나 인류를 소탕해 버리기를 바란다. 이런 극단적인 인간 협오증은 거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468]

세익스피어의 비문으로 여기고 있다.

좋은 벗들이여, 간절히 바라노니

이곳을 들러싼 흙을 파지 말라.

이 옫ㄹ들을 보호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그리고 내 뼈를 움직이는 사람에게 재앙을.[472]

감정은 지성에  종속되고, 패배는 희망에 극복되고 삶의  흥망성쇠는 인간 정신의 승리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전망 속에 파묻혔다. 그토록 압도적인 패배를 뚫고 이와  같은 낙관주의가 살아남은 적이 있었던가.[472] 

값이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보석도...여러분의 사랑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사랑과 더불어 통치했다는 것을 내 왕관의 영광으로 여깁니다...왕이 되어 왕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을 쓴 사람 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이 옥좌에 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지혜로운 왕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더 사랑한 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 '황금의 연설' [477,478] 

그녀는 지치고 보잘것없는 영국9잉글랜드)을 물려받았지만 그녀가 더날 때 영국은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해심의 폭과 국민의 부유함 속에서 배움과 학문이라는 근육이 건장해졌다. 아버지의 독재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적인 요소와 매력으로 그것을 온건하게 만들었다.[479]

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베이컨에게 있어서 비밀의  사랑이며, 가장 행복한 성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직책으로부터의 피난처였다.[483] 

베이컨이 1610  아이삭 케소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깊고도 참된 사색의 도움으로……인간의 삶의 질서를 더 낫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목표로 삼는 일입니다.>[483] 

과학에는 마법의  모자란 없다. 마법의 모자에서 나온  모든 것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  우선  안으로 집어 넣어져야 한다. 단순히 우연한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료의 <단순한 열거>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을 통해 찾아진……경험>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488] 

경험의 진짜  방법은 우선 촛불을 켜는 것이다(가설). 이어서 촛불을 수단으로 삼아 길을  비추고, 비로소 적절한 경험을 시작해서……그것으로부터  공리를 이끌어낸다(<첫번째 결실>,잠정적  결론). 그리고 이렇게 확정된 공리로부터  다시 새로운 실험을 하고……실험자체가  판정을 내려야 한다.”[488] 

학문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문을 도덕서에 종속시켰다. 학문의 확장이 자비심에 아무런 듣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인간성에는 아무런 이듣도 없을 것이라 하였다. <정신의 모든 미덕과 존옴성 중에서 선의가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평소의 열광이 줄어들었다.[491]

< 국가의  청년기에는 군대가 번성한다.  국가의  중년기에는 학문이 번성한다. 그리고 군대와 학문이 잠시 함께 번성한다. 국가가 쇠퇴하는 시기에는 상술과 상인들이 번성한다.>[492] 

무엇보다도  좋은 정책이란 국가의 재물과 돈이  소수의 손길에 모이지 않게 하는  일이다. ……돈은 (옮겨 심은 나무를 위한) 뿌리 덮개 같은 것이어서 골고루  펴서 뿌리지 않는다면 좋은 것이  아니다.”[493] 

<인간의 오성은  메마른 빛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부터  어떤 주입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과학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의 과학이라  불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참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498] 

그는 철학과 삶에서 이성과 종교 두 가지 모두를 위한 공간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감정적 추측, 초자연적 존재의 입, 인기 있는 신화 대신에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그는 모든 과학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그것을 다음 세기의 가장 열렬한 정신들에게 넘겨주엇다. 그가 원햇던 아니건 그가 요구하였던 기획- 자연 탐구를 위한 포괄적인 기구, 지식의 세계적인 확장과 보급- 은 현대의 가장 심오한 드라마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오늘날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기독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학 및 철학의 확산과 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 현대의 드라마는 베에컨을 통해 세계를 향하여 그 프롤로그를 말했던 것이다.[498]

옮긴이의  :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경구(警句)  지닌 힘차고 간결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거대한 내용을 담아낸다. 어차피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발전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여기 없지만  절대로 짧지 않는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따라 성큼성큼  걸음으로  걸으면서  마디 말로 예리하게   시대의 핵심을 찌른다. 이미 역사의  수많은 흥망성쇠를 관찰했던  눈길은  인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절망을 넘어 담담한 관찰자의 냉정함을 보인다.[500] 

어마어마한  학문의 역사를 포함하는 서양사를 단순히  정치, 사회의 역사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유연하고 매력적이다. 바로  문화사를 읽는 눈길이다.[501]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라는 듀런트의 태연자약한 고백은 우리를 멈칫 놀라게 한다. 문명을 떠 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꼽은 항목들은 기억할 만한 것들이다. 즉 가족, 종교, 교육(학교), , 대중의 의견(여론)등이다. 다 기둥을 바탕으로 그의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다.[501]

그는 사회  변혁의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로 ()  편중 문제를 꼽고 있다. 부가 지나치게  한편으로 쏠리면 반드시 혁명의 기운이  생겨난다. 그리고 역사 상의 어느 시대이든 관계없이 한 사회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니면 그에 휩쓸리느냐에 대한 답변이 그 시대의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우리 시대라고 어찌 다르겠는가?[501] 

여기서 역사는  영웅의 역사이다. 영웅이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 시인까지 포함한다.  모든 영웅들은  한결같이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다. 듀런트는 이들의 위대성을  깎아 내리지는 않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띤 채 약점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501] 

아흔 여섯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듀런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에이리얼이  있었다.이들은 1913년에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두 사람의 행복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들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다음 이 유작 원고를 발견한 존 리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사람은 다행스런 삶의 동반자였고, 나아가 이상적인 동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행복한 결합이 이들이 함께 오래  살면서 많은 저작을 만들어  원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502]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고 나서 좋았던 점

 

1.이 책에 쓰여진 내용은 단순히 서양사를 알기 쉽고 읽기 좋게 배열한 것만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학문의 역사를 포함하는 서양사를 단순히 정치, 사회, 역사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관찰은 유연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에 나 역시 동의 한다.그리고 보통 역사서에서 볼 수 있는 사건 중심의 인과 관계의 서술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상호 관계의 서술이었기에 조금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 1장 문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다.”라는 태연자약한 고백으로 이 책의 첫 장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한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고, ‘맞아!’ 하며 가장 공감한 부분도 바로 이 문장이었다. 어느 책에서도 문명에 대하여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의 하고 설명한 책은 아직까지 보지 못 했던 것 같다. 글의 첫 문장이 중요하듯 책의 첫 장에 다뤄진 흥미 있는 문장은 책을 읽는 내내 집중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3.이미 읽었던 ‘서양 철학사’에서 다루어졌던 시대와 철학자(플라톤 , 아리스토 텔레스)들이 너무나 반갑고 낯익게 다가왔다. ‘서양철학사 3부 근현대 철학에서 다루어 지고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야기는 ‘역사속의 영웅들’ 에서는 15장에서 19장까지에서 소개 된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역사서와 철학서가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두꺼운 책에서 보다는 적당한 두께의 책에서 정보와 오락을 얻기를 원하는 현대 대중들을 위해 인류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과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 주요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던 저자의 의지가 이 책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책의 구성

 

1-5 : BC. 3500 (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화문명)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돌아보면서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한다.


6-8
: 순수한 지성의 영역에서 훨씬 비범하고 이례적인 업적을 성취함으로써,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처음 만들어냈다. 수학자,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고 그리스의 연극이나 미술 분야도 다루지만 그리스에서 문학은 철학의 뒤를 쫒아가지 않았다.


9-12
: 로마 공화국이 만들어지기 전의 사람들과, 통치, 정복에 대해 알아본다. 카이사르, 슐라,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장이기도 하다.


13-14
: 인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장을 이야기 하고 있다.


15-17
: 유럽에서 기독교 중세가 시들면서 피어난 근대의 꽃은 알프스 남쪽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르네상스인데 이에 대해 다루고 있다.


18-19
: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치적인 반항이자 신학적 반항이기도 한 종교개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수도자들의 온갖 종류의 악덕과 불법로 인해 발생한 분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를 말해 주고 있다.


20
: 성직자에는 반대하지만 제례의식을 좋아하고 또 도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는 성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해 카톨릭의 영향력이 커지는데 개신교 종교 개혁에 맞서는 카톨릭 내 종교 개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1
: 이성 시대가 다가옴을 알리는 세익스피어와 베이컨의 시대로 끝을 맺는다.

 

아쉬운 점

 

책을 읽는 도중 제목 번역이 잘못 되어 있는 줄 알고 원제를 다시 보았다. Heroes History' , 역사의 영웅 맞았다. 읽으면서 주요 인물만 골랐음에도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각 개인 인물에 대한 설명만 놓고 볼 때 다루어진 인물들의 단점이나 종교에서도 타락한 점만이 부각되어 있었다. 무얼 보고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그들을 영웅이라고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서술이 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아니면 원제를 달리 달았으면 책이 좀 더 빛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내 스스로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Ⅰ,,, 이전에 살다 죽었던 인물들이 다시 예수처럼 부활을 했는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름이 같은가? 다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확인 절차에 바빴다. 시대적으로 찾아 볼 시간은 없었지만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로렌츠를 르네상스와 로마 뒤로 넣고 싶었다. 르네상스Ⅱ에서 1445년 시대를 말하다가 르네상스Ⅲ에서는 다시 1378년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뒤에 친절한 연대표라도 있으면 안개 속을 헤매는 나 같은 독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련만 암튼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많이 혼란스러워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레오나드로 자신이 그린 모든 초상화 중에서 가장 완성된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주장하는 모나리자의 미소나 미켈란 젤로가 조각한 4.9 미터의 다윗상의 섬세한 근육 그리고 페렌체 피티 궁전에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등 이런 예술 적인 부분에서의 자료 사진과 연대기 정보만 가미 되었다면 기막힌 문명사 입문서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IP *.219.10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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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5.18 01:00:00 *.129.207.200
자료조사와 책을 꼼꼼히 읽으셨군요. 올리신 사진을 보니, 윌그란트의 얼굴에서 아버지와 같은 미소가 느껴집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너털거리며 웃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올해는 많이 확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네요. 밖에 비가 오고, 손님은 끊겼습니다. 

하시는 일도 많은데, 야무지게? 해나가시는 모습 보면, 대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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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05.18 09:34:29 *.219.109.113
인건아 !  저 나이가 되서 저런 미소를 갖으려면

지금 그렇게 웃어야 주름이 저렇게 만들어져 . 저 나이에 보기만해도 푸근한 아버지의 미소가

나오는거지.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많이 웃어야해. 나도 지금 입에 미소를 걸고 있다.

왜?  너의 댓글이 흐뭇해서.... 나 하는 일 많은것도 알아주고 ㅋㅋ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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