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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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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6일 08시 27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신영복 지음/ 돌베개 출판사

 

작가에 대하여

 

문학회 회원들과 답청가서 우연히 만난 어린 꼬마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지속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이 모임을 청구회라 했습니다. 청구회에서 만든 노래중에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 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밟아도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배우며 일하는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 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여기서 '주먹 쥐고'라는 것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문이죠. 순수한 모임이었지만 옥생활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네이버 출처-

 

2020일 동안을 옥생활을 하게 된 이유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청춘이 너무 아까웠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 세월의 고초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세월을 흘려 보내지 않고 세월 속에서 성숙되어 익어져 나왔다. 그의 고단했지만 단아했던 삶의 이야기는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엽서>,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처음처럼>, <강의> 등의 바탕이 되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 낸 그의 저서들이 그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의 경력

1941 경남 밀양 출생
1963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68년부터 88년까지 20년이란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서인지 그의 경력은 아주 간단했다. 그의 인품을 보는 듯 했다. 차분하고 나무같이 한결 같은 이미지에 맞게 그는 성공회대학에서 옥중 이후의 삶을 바쳤다. 갇혀있던 세월에 하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지만은 그는 출소 이후 오로지 한 길만을 걷고 있다.

 

대구 사범대학을 나오신 아버지와 지주 집안의 외동딸 어머니 사이에서 1941년에 태어났다. 형제 많은 집안에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 자랐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명문대인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4살에 나이에 숙명여대의 강연대에 섰던 촉망받던 젊은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1968년 여름, 그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이었다,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그 지도적 영웅에 종사하는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국가보안법 제 1 2항이 당시 구속 사유였다. 청년 신영복은 두 번의 사형 언도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7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고 반 년쯤 있다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을 만나듯이 여섯 살 연하의 KBS 라디오 클래식 담당 유영순 씨와 결혼을 하였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선생님의 개인 홈페이지는 ‘더불어 숲’ http://www.shinyoungbok.pe.kr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장 서론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인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17]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이나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18]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21]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정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22]

 

춘추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22]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3]

 

이에 반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24]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24]

 

고전 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25]

 

과학적인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입니다.[26]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28]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28]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29]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30]

 

오늘날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과학 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 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초 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31,32]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32]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34]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갈 세계 질서 역시 동일한 모순 과정을 답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33]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36]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37]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38]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40]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 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41]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42]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42, 43]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서양 문명이 갖는 모순구조)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요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과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의 창조에 있습니다.[44]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44]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45]

 

 

 

2장 오래된 시와 언 : 시경, 서경, 초사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에 주목합니다. 어쨌든 국풍의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광범하게 불려지고 또 오래도록 전승된 노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52]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52]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하지만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을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63]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 놓고 있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 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 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 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64]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연탄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안도현의 시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65]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66]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68]

 

중국사는 몇 천 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라는 것이지요.[69]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 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72]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를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 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74]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76]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77]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82]

 

 

3장 『주역』의 관계론

 

강의 서두에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87]

 

아무튼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88]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 , 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89]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90]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경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를 좌씨가 해설한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 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91]

 

『주역』의 경은 8,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뜻으로 십익이라 합니다.[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 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 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92]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100]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101]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101]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주역>의 사상입니다.[102]

 

산전수전을 두루 겪으신 노인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키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103]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 입니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103]

 

위보다 응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05]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나 반대로 상하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 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에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107]

 

공자는,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이라 하였습니다.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107]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107]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114]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와 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인 까닭, 그것이 비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119]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128]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28, 129]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129]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29]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4괘를 칸트의 판단 형식과 같은 철학적 범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주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형식이나 최상위 유개념과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주역』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130, 131]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31]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132]

 

 

4장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사회에 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개진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137]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41]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142]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 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붕’의 개념입니다. 붕은 친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 관계입니다. 계급 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붕은 수평적 인간 관계이며 또 뜻을 같이 하거나 적어도 공감대가 있는 인간 관계를 의미합니다.[143]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145]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46]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합니다.[150]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 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152]

 

이 글은 덕치주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l  첫째, 형과 예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l  둘째로, 부끄러움에 관한 것입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154~156]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초기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158]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 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158]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과장되기도 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158,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159]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160, 163]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적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의 논리입니다.[164]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165]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165]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 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6]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선생이 상서尙書 한 구절인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의 뜻은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166]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8]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 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68]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足食), 군사(足兵)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民信之)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去兵).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去食).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170]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의 회의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은 원래 신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이란 곧 신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171]

 

이며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172]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174]

 

빈천을 무조건 탈피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천도 얼마든지 도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가치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은 것이지요.[177]

 

자본주의의 부귀에 대하여 그 과정과 그 도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178]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

“학하되하지 않으면 어둡고, 하되하지 않으면 위태롭다.[179]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181]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182]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 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입니다.[183]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 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186]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87]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188]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 박에 없습니다.[192]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이건 예건 인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의 논리 입니다.[193]

 

행과 언, 사람과 의상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그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195]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현만을 상대해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힘입니다.[198]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199]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200]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 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천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200]

 

 

5장 맹자의 의

 

우리의 강의에서는 공자 시대의 유가 사상이 맹자 시대에 와서 그 중심이 어떻게 이동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 맹자에 의해서 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212]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 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입니다.[213]

 

인과 의의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인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213]

 

만약 의를 경시하고 이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길 일이지 어찌 이를 말씀하십니까?[214]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 자재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으로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215]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217]

 

맹자의 유명한 여민동락 사상입니다. 주자가 주를 달아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고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219]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작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219]

 

이로써 미루어 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225]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226]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萬民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7]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인간 본성의 사회적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 재구성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29]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232]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233]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237]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239]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42]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하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249]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 구도를 가지고 있음을 물론입니다. 유가와 노장이라는 두 축은 중국 사상사의 오래된 심층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253]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전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254]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256, 257]

 

노자의 생존 연대는 『사기』에서조차도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학자들은 대체로 맹자 뒤, 한비자 앞이라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81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258]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1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262, 263]

 

핵심 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1장의 핵심 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263]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264]

 

전체의 의미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 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267]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269]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269]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271]

 

널리 알려진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 2

 

노자의 기본 사상은 다름 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1장 유와 무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273]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노자』의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는 인위, 작위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 명분, 문물 들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와 선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273, 274]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2장의 핵심 개념은 인식과 실천의 반성입니다.[274]

 

결론적으로 『노자』의 제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 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277]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277]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278]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도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280]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할 수도 없고 무지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281]

 

노자는 또 지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을 숭상하고, 난득지화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 내고, 심지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282]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 사상이며 도피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무지, 무욕, 그리고 무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283]

 

『노자』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283]

 

노자의 철학은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284]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면서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 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84~286]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 자연의 무도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287]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288]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로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289]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유부쟁 고무우’,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291]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이로운 것은 되기 때문이다.  - 11[292]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293]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 받는 일입니다. 백성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상의 정치이며, 이를테면 무치입니다. 무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임금은 백성을 신뢰하고 백성은 임금을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95, 296]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입니다. 세우고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며 그 공로를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개위아자연’,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96]

 

노자의 자연은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298]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 45 [299]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300]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당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305]

 

 

7장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조에 묶인 굽은 선비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309]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310]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독법의 핵심적 과제입니다.[310]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311]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318]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319]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319]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324]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는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326]

 

우리는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을 거부하고 천과 합일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327]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328]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328]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329]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와 기심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330]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331]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332]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333]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335]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대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338]

 

장자의 논리에 다르면 도는 재와 부재를 조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장자의 도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주류 담론이던 부국강병 논리를 반성하고 뛰어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340]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가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343]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345]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347]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소,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 족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354]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은 송나라 대부로서 성을 방위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나라 유민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367, 368]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을 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무제를 해결하자 했습니다.[[370]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374]

 

兼愛 겸애는 別愛 별애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 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375]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379]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 전쟁의 폐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380]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반성을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382]

 

인간의 행동을 욕구로부터 나오며 후천적으로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자는 임금과 제후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388]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용. 절장. 사과. 등 근검절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393]

 

묵자의 도는 근본에 있어서 관계론 입니다. 묵자는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를 강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겸애와 함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관계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394]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기리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기 있는 것이다.[407]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13]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른다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성악 [413]

 

예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멋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불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예론[418]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423]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인심입니다. 천도와 천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425]

 

즐거움이 지나쳐서 그 도를 이탈하고 혼란하게 되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예는 근본에 있어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례적인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그처럼 유연한 것입니다.[426]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을 따르고 그 의를 칭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434]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 나라의 관중을 듭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재상인 상앙이었습니다.[437, 439]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 유도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 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 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이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상하의 분별이 없어진다.   – 유도 [441]

 

법가의 ‘법’은 오늘의 법학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였습니다. 천하 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445]

 

춘추전국시대가 법가에 의해 통일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 집권적 전제군주 국가라는 권력 형태는 진을 거쳐 한으로 이어지고 다시 역대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신해 혁명 때까지 이어짐으로써 2천 년 이상 지속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448]

 

 

11장 강의를 마치며

 

고전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472]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474]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이란 이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475]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508]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509]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510]

 

 

내가 저자라면

 

당면 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한 강의

 

신영복 선생님은 동양고전이 전공 분야가 아니어서 부족한 점이 많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 책이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셨다는 말씀이 이 강의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동양고전이 이 시대에 왜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의 재활용 방안 및 핵심과 요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등의 주제에 대한 고전 풀이 방식의 이야기였다. 근본적인 성찰을 행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젊은 세대들이나 현실을 단지 바쁘게만 살아가는 기성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의 강의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는 이 한 권의 책은 내 곁에 오래 남겨 두고 자주 바라보게 될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화두 [ 話頭 ] 그리고 나의 간화선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고 생각하느냐?

흐르는 물을 타고 헤엄을 치는 물고기와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산란하러 가는 연어와 누가 헤엄치기가 힘들겠습니까? 당연 자신이 타고난 사주팔자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 자신의 복이라 생각하고 인정하니 생각도 긍정적으로 달라지고 운명도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이옵니다. 그러나 타고난 사주팔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삶이 연어처럼 용을 쓰고 난 후 삶을 마감하겠지요.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

잔디는 처음에는 한 뭉텅이로 심어지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길죽한 띠풀이 나와 건너편에 있는 잔디와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전체가 긴 녹색 잔디로 덮여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구마도 싹이 나오면 하나씩 뜯어 옮겨 심지만 그곳에 하나의 고구마가 달리지 않습니다. 한 가지를 잡아 당기면 서너 개의 고구마가 달려 나오지요. 즉 더불어 같이 가면 훨씬 수월하게 이룰 수 있고 이루어도 풍성하다는 가르침이지요. 관계성에 대한 좋은 화두라 생각합니다.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변화이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나는 주역의 철학적 구도와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복잡하고 어려운 풀이처럼 보이나 파고 들어가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The best of best

 

주역에 이어 관계성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들이 벌였던 토론은 고대국가 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다. 굳이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많은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며<학이>편에 있는 논어의 첫 구절의 에 대한 이야기는 공자사상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양에 마르쿠스가 쓴 명상록이 있다면 동양에는 노자가 쓴 도덕경이 있다. 동서양 철학의 위대한 두 고전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성공과 처세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노자는 근본은 자연에 두고 철학은 물에 두었다. ‘도무수유’,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고 했다. ‘도덕경에서는 느림과 버림의 미학들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노자의 문장들을 나는 동양의 명상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은 장자편이다. 무릎을 치고 싶을 정도로 공감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또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실제로 많은 명상서적에 인용한 문구들을 장자편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역사적 인물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이나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장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가려운 부분만 골라 긁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내가 쓰고 싶은 말을 먼저 써 놓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다 좋지만, 특히 제일 좋았던 부분은 7 <장자>였다.

 

강의를 마치며

 

동양의 고서와 수천년의 역사는 분명히 개발의 걸림돌이 아니라 온 인류 미래의 주석이 될 것이다. ’화씨지벽처럼 옥을 돌이라고 하고 외면하면서 지구 개발화에만 매달리는 몰지각한 현 인류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이며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진정한 평화의 세계와 삶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성공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해왔던 강의를 나의 고전 독법이라는 강의로 마쳤다. 담담하고 진솔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들은 책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다시 읽어야 했고 또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실생활에 접목시키며 반성하고 성찰을 하는 시간을 준 강의에 큰 박수를 보낸다.

 

 

 

IP *.42.2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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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1.16 13:52:21 *.30.254.21
그래..장자...
오병곤 회장님이 맹자를 추천하여
책은 맹자를 신청했는데, 읽어보니
나도 장자가 좋더구나...
이유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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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1.16 14:59:04 *.236.3.241
이번 주 리뷰 특히 좋습니다 ^^ 시간이 많이 부족했을텐데~

각 장을 읽을 때마다 차분히 소화해서 자신의 생각과 잘 연결해
놓았네요. 묻고 답한 내용과 형식도 좋고.

꾸준함만이 줄 수 있는 감흥이 느껴집니다. 잘 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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