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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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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8일 23시 20분 등록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프 카프라, 김용정/이성범 옮김, 범양사, 1979)

(원제: THE TAO OF PHYSICS, 1975,1983,1991,1999 by Fritjof Capra)


*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교수는 193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966년 빈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후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학 로렌스버클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소립자를 연구했다.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지속적으로 현대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카프라 박사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시작으로 하여,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히든 커넥션(Hidden Connections)> 등의 저서를 연속적으로 출간하였다.

  -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역자인 이성범 선생은 이 중 <탁월한 지혜>를 특히 함께 읽을 것을 권하였다.(p.9)-


  저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출간 이후 약 6년간에 걸친 강연과 연구를 통해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한 변혁적 세계관에 대한 고찰을 생물학, 의학, 심리학, 경제학 등의 학문 분야로 넓혀서 살펴 본 결과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1982)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세계관의 변화와 인식구조의 변환이 이들 학문 분야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나고 있음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은 미국 및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세계의 과학계와 사상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신과학 운동, 신생활 운동 등을 촉발하게 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은 <탁월한 지혜>(1988)에서는 그가 연구 과정에서 책을 통해 혹은 실제로 만나 교류했던 다양한 선각자적 사상가들(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제프리 츄, 크리슈나무르티, 앨런 와츠, 인디라 간디 여사 등)과의 대화 내용과 그를 통한 지적 통찰을 인물별로 분류하여 제시하고 있다.

  <생명의 그물>(1996)에서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통해 생명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 한 프레임웍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히든 커넥션>(2002)에서는 복잡계 이론에서 밝혀낸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사회 분야로 확대하여, 생명의 생물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을 통합시키는 개념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인간 조직의 관리, 경제적 글로벌화의 도전과 문제점, 바이오 기술의 사회적/도덕적 이슈 등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1984년 스프레트낵(Spretnak, Charlene)과 공저로 펴낸 <녹색정치>는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던 녹색 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독일 의회의 당당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녹색당의 이념 정강 및 그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녹색운동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정치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인류의 사상사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사상의 조류가 만나는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풍요한 발전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전적으로 타당한 얘기일 것이다, 이러한 조류들은 인류 문화의 전혀 다른 분야에,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문화 환경와 상이한 종교적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둘이 실제로 만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행여 그처럼 긴밀히 서로 연결을 맺어 하나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발전이 곧 뒤따라 전개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으리라. [5]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제 2판 역자 서문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 [7]


서구의 과학은 객관을 관찰하기 위하여 관찰의 과정에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배제했던 것이며, 그 결과로 가치 중립의 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의 학문은 그 궁극적 목적을 선의 실천에 두고 주관적인 마음을 항시 수련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하여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것을 학문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8]


제 1판 역자 서문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10]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11]


불교 등의 동양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인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11]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 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12]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물리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가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12]


현대 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적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


신비주의란 마술을 행하거나 기적을 바란다는 뜻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14]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15]


이 책은 고전 물리학의 유물인 메마른 기계론적 자연관이나 소박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되고 더욱 윤택하며 친화력 있는 전일적 우주관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번역된 것이다. [17]


제 2판 저자 머리말

그들의 연구를 추진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21]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 길은 부처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있다. [22]


제1판 저자 머리말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24]


이 책은 물리학을 꼭 알지 않아도 되는, 동양의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진 일반 독자를 위해 쓰인 것이다. [25]


제 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의 가르침> [33]


신비주의가 성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 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 종교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데 동 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36]


‘물리학’ (physics)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37]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지한 존재란 거짓된 바탕 위에 놓여진 것이며, 그의 보편 원리는 만물의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불이었다. ...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라고 불렀다. [37-38]


서양 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39]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인간 영혼에 대한 문제와 신의 완전성에 대한 상념은 물질 세계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믿었다. [39]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인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응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40-41]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41]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 ...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2]


2. 아는 것과 보는 것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인정되어 왔다. [46]


존재 자체의 이해는 동양 신비 사상의 중핵을 이룰 뿐만 아니라 모든 신비스런 체험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49]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50]


수많은 명상의 형태에 있어서 이 추론하는 마음을 침묵시키는 것은 이를테면 숨결이나 만트라의 소리나 만다라의 영상처럼 한 가지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

힌두교의 요가나 도교의 태극권

이들 유파의 율동적인 움직임은 명상의 보다 정적인 형태인 평화와 정은과 같은 느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61]


주위 환경과 합일하는 체험은 이러한 명상 상태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 상태인 것이다. [62]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3. 언어를 초월하여

서양철학의 학파에서 논리와 추론은 철학적 이념을 공식화하는 주요한 도구로 언제나 쓰여 왔으며, 버트런드 러셀에 따른다면 종교 철학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동양의 신비 사상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방의 현자들은 논리와 통상 개념을 뛰어넘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70]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75]


4. 새로운 물리학

실재에 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79]


모든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던,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에 의하여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82]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으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결과로 세계를 객관적으로, 즉 인간이라는 관찰자에 관해 전혀 언급함이 없이 기술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객관적인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84]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90-91]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98]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113]


제 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한하고 무든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될 수 없고, 언어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도 없다. [120]


‘카르마’의 의미는 마야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우주적인 단계에서 인간적인 수준에까지 점차 떨어져 심리학적 뜻을 띠게 된다. 우리가 단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마야의 그 주술 아래 놓여,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122]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123]


6. 불교

제 1성제, 고뇌 또는 좌절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다. 

고苦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 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130]


제 2성제, 집착 또는 탐욕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130]


제 3성제, 니르바나, 완전한 해탈의 경지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130]


제 4성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 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

바르게 보는 것(定見), 바르게 아는 것(正思) - 인간 상황을 꿰뚫어 보는 냉철한 통찰력

바른 행위(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불교적 생활방식에 맞는 규율 부여

바르게 명상(正念)

실재에 대한 직접적 신비체험 (正定, 무상무아의 선정) [131]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제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131]


스즈키 다이세쓰가 불교라는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불렀던 것은 초월적인 지혜 혹은 직관적 지성인 프라주나와 사랑 혹은 자비인 카루나다. [133]


7. 중국 사상

중국의 현자는 오로지 이 높은 정신적 단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도 똑같이 마음을 준다. 그는 인간 본성의 상보적인 두 변-직관적 지혜와 실용적 지식, 관조와 사회활동-을 자기 안에서 통일하는데 중국인들은 현자와 왕의 이미지로 이것을 연관시켰다. 장주의 말로 표현하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그들의 고요함으로 해서 현자가 되고 움직임으로 해서 왕이 된다.” [137-138]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138]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142]


이처럼 대립자의 원초적인 한 쌍인 음과 양의 상호 작용은 도의 모든 운동을 인도해 주는 원리로서 나타나지만 중국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음양의 각가지 배합을 계속 연결하여 우주적 원형의 체계로 발전시켰다. [146]


8. 도교

중국 문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도교적 해방은 특히 인습의 엄격한 규율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155]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157]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161]


9. 선(禪)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166]


선에 있어서 개오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을 뜻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168]


제 3부. 대비


10. 만물의 통일성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인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 [176]


“자연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우리 자신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일부다.” 하이젠베르크 [187]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동양의 신비가들이 모든 사물들을 기본적인 전일자의 현신으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는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193]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194]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이 경험되는 방법상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195]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197]


12. 공간- 시간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증시켰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15]


그리스 철학과는 달리, 동양 철학은 항상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다른 모든 지성적 개념들처럼 공간과 시간을 상대적, 제한적, 환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217]


시공간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상호 관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갖는 세계관은 둘 다 시간과 변화를 그 본질적인 요소로서 함유하는 본래적으로 역동적인 관점이다. [230]


많은 동양의 현인들은, 생각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지만 통찰력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247]


동양의 신비가는 시간을 초월하는 속에서 그들은 또한 인과의 세계도 초월한다고 확언한다. 공간과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들처럼 인과율은 세계에 관한 어떤 경험에 제한되어 있고, 이 경험이 확대될 때에는 버려야만 하는 하나의 관념일 따름이다. [247-248]


13. 역동적인 우주

동양 신비주의의 중요한 목적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동일한 궁극적인 실재가 현현하는 것으로서 경험하려는 것이다. [249]


중국 철학에서는 유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재를 도라 부르며 모든 사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우주적 작용으로 본다.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도교도도 사람이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되며 그의 행등을 그것에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성현-깨달은 자-의 특징이다. [252-253]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주를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그물로서 보았는데 그 상호 연관은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우주의 망은 생동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성장하며 변화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역시 우주를 그와 같은 관계의 망으로서 생각하게 되었으며, 동양의 신비주의처럼 이 망이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254]


우주가 움직이고 진동하고 춤추는 것이므로 동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즉 자연은 정적인 균형이 아니라 동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256]


14. 공(空)과 형상

고전적인 기계론적 세계간은 공허한 공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견고하고 파괴되지 않는 입자라는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상에 혁신적인 수정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입자들’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공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271]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 공 또는 허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276]


그것은 무한히 창조적인 가능성을 지닌 ‘공’을 뜻하는 것이다. [277]


힘에 관한 그러한 견해는 또한 동양 신비주의의 특성인데, 그것은 운동과 변화를 만물의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성질로 본다. ...

“모든 순환하는 사물들은 자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의 운동은 바깥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288]


15. 우주적 무도

원자의 구성 요소들인 아원자적 입자들이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호 작용들의 불가분한 망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호 작용들은 입자들의 교환으로서의 그 자신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그칠 줄 모르는 유동을 포함하고 있다. 에너지 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입자 상호 작용들은 물질세계를 형성하는 안정된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은,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를 하고 있다. [291]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생명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313]

  

16. 쿼크 대칭들 - 하나의 새로운 공안(公案)?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이러한 실체들의 존재를 가정하면서 그의 동료 물리학자에게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속에서 ‘머스터 마코를 위하여 세 개의 쿼크’라는 한 구절을 인용해서 ‘쿼크들’이라는 환상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324]


대칭은 기하학과 더불어 그리스의 과학, 철학, 예술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대칭은 미와 조화, 그리고 완성과 동일시되었다. [327]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 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327]


17. 변역의 모형

S행렬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은 강조점을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 기본 관심이 입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응에 있다는 것이다.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의 그러한 전이는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 둘 모두에 의하여 요구되고 있다. 양자론은 아원자적 입자가 다양한 측정 과정 사이의 상호 작용의 표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해 해왔다. 그것은 고립된 어떤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시간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시키는 어떠한 발생 혹은 사건인 것이다. [332-333]


그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구조들과 현상들이 측정하고 분류하는 우리 마음의 소산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동양 철학에서 근본이 되는 주장들 중의 하나다.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고 이 의식 상태가 지나가면 다시 사라지는 마음의 소산물임을 거듭거듭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347-348]


변화의 끊임없는 연속에서 떼내어진 소산물들을 마치 영원하고 실재적인 것인 양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은 사물도 아니요, 사물의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요, 변화다. [349]


18. 상호 관통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인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359]


모든 자연 현상은 궁극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중의 어느 하나를 설명하려고 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전부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과학을 그토록 성공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근사치가 가능하다는 발견이다. [360]


“중국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들의 조화로운 협동은 외계에 있는 어떤 초월적 권능의 명령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이 우주의 모형을 이룩하는 전체 위계 속에 들어 있는 한 부분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오며, 그리하여 그것들은 자체 본성의 내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363]


즉 모든 것이 다른 것의 결과라는 것, 또 자연을 ‘설명’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365]


맺음말

일상 생활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있고 충만된 정신 생활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의 차원을 넘어서면 기계론적 개념들은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신비가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들과 매우 흡사한 유기적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382]


우리가 건강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속 각 기관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전체로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안녕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383]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는 추론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고, 신비가는 직관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

어느 쪽도 그 다른 것에서 이해되지 않으며, 그둘 중의 어느 쪽도 다른 것에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둘은 세계에 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385]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385-386]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이 책은 ‘내가 저자라면’이라는 타이틀로 마무리를 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책이다. 간신히 책을 완독한 지금도 저자의 논지를 미흡하게 이해했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내가 저자라면’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긴장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제1부 물리학의 길’,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은 비교적 쉽게 저자의 논지를 따라갈 수 있었다. 1부에서는 고전적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변화와 가장 큰 차이점, 그리고 새로운 물리학의 도래 등 평소 관심과 지식이 없었던 영역이었지만 의외로 재미있게 이해하며 읽어갈 수 있었고 동양 사상에 익숙치 않은 서양 독자들을 위해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2부도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3부에서 논의점을 뽑아내기 위해 깔끔한 접근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와 융합되고 중국에서 전통적 사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사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설명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그동안 막연하게 품어왔던 궁금증도 다소 해결할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현대 물리학의 각 논점들과 동양 사상의 논점들을 각각 비교한 3부의 내용이었다. 저자의 설명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아마 나의 사전 지식이 부족했을 것이다. 또한 이 많은 내용을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읽고 이해하겠다는 것이 욕심이다. 결국 위의 결론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내용들을 소화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미흡한 독자였지만 내가 이해한 것 중 하나는 이것이다.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그 다른 것에서 이해되지 않으며, 그 둘 중의 어느 쪽도 다른 것에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둘은 세계에 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385]


  프리초프 카프라 교수는 독자에게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로 전주까지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어떻게 다르게 발전해 왔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서로 다른 이 두 세계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앞으로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갈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인간, 자연, 상황 등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하나하나가 전일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전일성을 가진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번 수업에서 스승님께서 설명하신 ‘하나의 물방울 안에 온 달이 들어있다’는 의미에 좀 더 다가가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386]는 문구이다. 또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의 깊은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신비주의적 직관을 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을 그동안 내가 훈련받고 길러온 과학적 사고방식과 함께 역동적인 균형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점이다.        

IP *.23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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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1.29 00:36:51 *.129.207.200
법정 스님, 골프장 만드는 모습을 보며, 당신의 팔 다리가 짤리는냥, 아팠다고 하십니다. 깨달으신 분들, 혹은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는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만물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참 무서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내가 뿌린 것이 언젠가는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 

눈 아프신데,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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