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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0일 07시 37분 등록
황금시대의 전설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있어왔다. 우리는 오래된 것을 존중하는 태도의 사회학적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것은 종족내지 가족간의 연대의식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자신의 특권에 세습적인 권의를 부여하려는 일부 특권층의 노력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더 나은 것이 반드시 더 오래되었을 거라는 느낌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예술사가와 고고학자들은 가장 마음에 드는 예술양식이 곧 근원적인 양식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는 실정이다. 예술을 현실지배 및 현실통어의 한 수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에 순응하는 하나의 방도로 보느냐에 따라 한편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재현하는 자연주의적 작품이 예술활동의 최초의 형태였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삶을 양식화하고 이상화하는 엄격한 형식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 예술사가 및 고고학자들이 전제주의 내지 보수주의로 기울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주의.진보주의적 경향을 띠는가에 따라 기하학적인 모양을 중심으로 한 장식예술과 자연주의적,모방적인 표현형식 중 어느 한쪽을 더 오래된 것으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 차이야 어찌 되었건 실제 유물들을 살펴볼 때 자연주의적 예술양식이 먼저 나왔음이 분명히 드러나며, 이는 연구가 진전될수록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어지고 있다. 13

그런데 당시의 마술은 우리가 흔히 종교라고 이름붙이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던 듯하다. 기도라는 것도 없고, 신성한 힘이나 존재를 숭배하지도 않았으며, 피안의 어떤 영적 존재들에 대한 신앙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종교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필요저건이라 일컬어지는 요인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혀 신비스러울 것 없는 기술이요 사무적인 활동이며, 우리가 쥐덫을 놓는다든가 땅에 거름을 준다든가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료나 밀의와는 무관한, 수단과 방법의 적절한 응용이었다. 이 시대의 그림은 이러한 마술의 도구였던 것이다. 117

구석기시대의 회화가 마술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예술의 자연주의적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상의 문신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은, 다시 말해서 단순히 대상을 지시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를 대신하고자 하는 그림은 자연주의적일 수빡에 없음이 분명하다. 마술로 불러내려는 짐승은 그림에 그려진 짐승의 분신일 터인만큼 이때 그림이 실물과 정확하고 충실하게 일치하지 않고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마술이라는 목적이야말로 이 예술로 하여금 자연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요인이었다. 실물을 닮지 않은 그림이란 단순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20

정신적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부닥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애매한 사용인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예술양식과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사회형태 사이에 결국은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이색적인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으며, 이런 대담한 유추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려는 생각만큼 큰 유혹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찍이 베이컨이 말한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진리탐구에 치명적인 것으로서 그가 경고한 네 개의 우상에 이어 애매성의 우상이라 이름지어도 좋을것이다. 33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이 분리되면서 아마도 예술활동의 담당자 역시 분화되었을 것이다. 무덤을 장식하는 예술과 우상조각은 종교적 춤의 연희와 더불어 주로 남자들, 특히 마술사와 사제들의 소관이 되었다. 이와 달리 세속적인 예술은 순전히 장식적인 용도를 지닌 수공예로 한정되어 전적으로 여자의 손에 맡겨졌고 가내작업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회르네스는 신석기시대 예술의 기하학주의적 성격을 그 여성적 요소와 연결시킨다. 그는 "기하학적 형태 중심의 예술양식은 무엇보다도 여성적인 양식으로서, 여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동시에 묘사대상을 길들이고 가꿔놓은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찰자체는 옳을지 몰라도 그 설명은 미심쩍은 개념 사용에 의존하고 있다. 35

이집트에서 예술품 제작의 조직화, 조수의 고용과 그 다면적인 활용, 개개의 작업단계의 전문화의 통합 등은 거의 중세기 건축현장의 작업방식을 방불케 할 만큼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많은 점에서 개인주의 원리에 기초를 두는 후세의 모든 예술생산 방법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생산의 표준화에 그 목표를 두었고, 작업장 생산방식 자체도 애당초 이런 경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수공업적인 방법이 점차 합리화되어감으로써 예술생산의 균일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수요의 증가에 따라 초벌그림, 원형, 일정한 패턴 등을 기초로 하여 제작하는 습관이 생기고 갖가지 예술작품을 단지 규격부품을 뜯어맞춤으로써 만들어내는 거의 기계적인 생산방법이 발달했다. 예술생산이 이와같이 합리적인 작업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물론 예술가에게 같겨지는 주문이 대체로 언제나 같은 것이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 우상, 무덤을 장식하는 기념물, 와의 조상, 귀족의 초상화, 그밖에 또 무엇이든간에 언제나 같은형의 것을 주문하는 관습이 미리부터 확립되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이집트에서는 독창적인 모티프가 특별히 높이 평가된 적은 한번도 없었을 뿐아니라 대체로는 도리어 금기시될 정도였던만큼 예술가의 유일한 자랑은 빈틈없고 단단한 것을 만든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예술적 가치가 비교적 낮은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이렇다 할 독창성이나 기발한 면이 없다는 결함을 보충해주고 있다. 동시에 이와같이 깔끔하고 완벽하게 마무리지어진 작품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은 이집트의 예술품 생산량이 그 합리적 작업방식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적었음을 보여준다. 55

이집트 예술의 가장 뚜렷한 특색, 엄격한 양식화가 요구되던 시기뿐 아니라 자연주의 시기에도 많건 적건간에 엿볼 수 있는 특색은 합리적인 묘사방법이다. 이집트인들은 신석기시대의 예술, 미개인의 조각, 아이들의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는 개념상으로서의 성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은 전혀 없다. 또한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예에 따라서는 모순되기까지하는 그림의 각 부분을 합성하는 이른바 봉합적 묘사방법에서도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들은 시각적 인상의 통일성과 독특함을 마치 현실인양 구체적 형상으로 묘사하고야 말겠다는 식의 환각주의를 단념했다. 즉, 그들은 명확성을 위해서라면 원근법, 생략법, 중첩법 등을 포기했으며, 그 결과 자연에 충실하려는 의지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게 경직된 금기사항을 낳게 되었다. 60

이집트 예술에서는 정면성의 원리 이외에도 일련의 정석적형식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정면성의 원리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똑같이 이집트 예술에 내포되어 있는 양식원리의 대부분, 특히 중제국시대의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여려 원리의 인습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 양식원리 중 먼저 꼽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인물의 양다리는 항상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양다리 모두가 안쪽, 즉 엄지발가락 쪽에서 본 것처럼 그려진다는 규칙이다. 그리고 또 내디딘 다리와 뻗은 팔은 감상자측에서 보아 먼 쪽으로 그려야만 한다는 약속이 있다. 끝으로, 그림 속 인물은 오른쪽 측면만을 감상자 쪽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약속, 규칙은 범할 수 없는 형식주의적 원리로서 중제국시대의 사제층, 왕, 봉건제후, 관리 들에 의해 지극히 엄격하게 지켜졌다. 봉건제후들은 제각기 군소 군주들로서 형식 면에서는 진짜 파라오를 능가하고 싶어했고 고위관료들도 중산층과는 아직 엄연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뼛속 깊숙이 계습제도의 정신을 간직하며 보수 일변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정세는 힉소스족의 침입에 의한 혼란 속에서 발생한 신제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외부와 고립된 채 자체의 민족전통에 침잠해 있던 이집트는 이제 물심양면에 걸쳐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원대한 전망을 가진 국가로서 초민족적인 세계문화의 단서를 열게 되었다. 이집트 예술은 지중해 주변 전체와 동방제국 전부를 영향권 내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널리 각지의 영향을 흡수하는 동시에 자기 영토의 저 너머 자국의 전통과 인습의 테두리 밖에도 또 다른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64

아씨리아의 예술은 훨씬 시대가 내려와서, 즉 기원전 8세기 및 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종의 자연주의의 세계를 받는다. 아슈르바니팔왕의 왕궁을 장식하는 전투나 수렵 장면의 양각은 적어도 거기에 그려진 동물에 관한 한은 그 자연스러움과 발랄함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인물 쪽은 2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양식화된 수법으로 그려져 있고 머리카락이나 수염 모양도 여전히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우며 진부하다. 이 역시 아메노피스 4세 치하 이집트의 경우처럼 두 종류의 양식요소가 대립하고 있는 결과로서 이미 구석기시대에도 보였고 또 이후의 미술사 흐름 속에서도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수법상의 구분, 즉 인간을 그릴 경우와 동물을 그릴 경우에 각기 다른 수법을 쓰는 한 예이다. 그런데 구석기시대의 인간이 인간보다는 동물은 자연주의적으로 그런 것은 그들의 생활이 동물 중심이었던 탓인데 반해 후대에 오면서는 동물은 양식화할 가치가 없다고 보아 동물 그림이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74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대한 끄리띠 예술의 특색으로서 근대성을 강조하는 학자도 많다. 그렇지만 이 점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애매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끄리띠 사람들은 풍부한 독창성을 가지고 기술에도 뛰어난 재능할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취미는 별로 엄격하거나 확고한것이 못 되었다. 그들의 예술은 지속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기에는 너무도 안이하고 빤히 들여다 보이는 기법을 쓰고 있다. 엷은색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고지식한 필치로 그려진 그들의 벽화에는 현대의 호화여객선이나 실내수영장 주변의 장식용 그림들을 연상케 하는 경향이 있다. 끄리띠 예술은 근대예술에 많은 것을 주었을 뿐 아니라 끄리띠 예술 자체 속에 이미 근대의 공장예술적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끄리띠 예술의 이러한 근대성은 아마 끄리띠 섬에서 예술작품이 공장식으로 생산되었고 방대한 수출을 위한 대량생산이 행새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그리스 사람들도 끄리띠 사람들과 같이 고도로 공업화된 예술수공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식화의 위험을 면했던 겅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술사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원인이 반드시 동일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 아니 그보다도 예술사에 작용하는 원인이란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과학적인 분석으로 남김없이 밝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입증할 따름이다. 79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게 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의 아카이아의 왕이나 귀족들, 즉 이 시대에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를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장랑스럽게0 칭한 데서도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세속적, 비종교적이고 그들의 명성의 가장 빛나는 면류관에 해당하는 뜨로이 전설은 그들의 약탈과 해적 행위를 시적으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세계관은 그들이 언제나 전시항황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의 생활이 승리의 연속이었다는 사실, 그들의 문화적 환경이 언제나 급격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자신들보다도 더 개화된 타민족을 정복하고 고유의 문화보다 훨씬 진보된 문화를 누리게 된 그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피정복민족이 신봉하는 종교의 계율아나 금지사항까지도 정복자라는 한가지 이유로 지키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동적인 생활을 하는 호전적인 민족에게는 보고 듣는 것 전부가 모든 전통과 법에 맞서는 자유분방한 개인주의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쟁탈의 대상이요 개인적 모험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안력과 용기, 숙련과 지략에 따라 모든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87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엿볼 수 있는 시인이나 가수의 사회적 지위는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왕과 제후의 궁정에 소속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궁정가인과 민중가인의 중간에 있는 경우도 보인다.이것 역시 영웅시대의 상황과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씌어지고 마지막 손질이 가해진 시대, 즉 호메로스 자신의 시대의 현실이 혼합된 결과인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미 일찍브터 상류 귀족사회에 속하는 가창시인말고도 시장 바닥이나 서민들이 모이는 술집 같은 데서 영웅시에 나오는 혁혁하고 장엄한 모험담 따위와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 방랑가인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예컨대 아프로디테의 간통같은 단순한 삽화에 지나지 않는 듯한 요소들은 이러한 민속적인 이야기를 모태로 삼고 있다고 보지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91

모든 문학의 최고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어느 개인의 창작도 아니요 그렇다고 민속문학의 산물도 아닌 익명의 고급 예술품이며 다수의 우아한 궁정시인들과 학식있는 문사들이 이룩한 집단창작으로서 그 창작과정에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유파 또는 세대의 기여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19세기 미학 전체의 주추돌이 되는 낭만주의의 예술관 및 예술가관은 완전히 뒤입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보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아주 달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신비를 잃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낭만주의자들은 그 수수께끼 같은 아름다음을 소박한 민중의 문학이라 불렀고 우리는 그것을 비전과 학식, 영감과 전통, 고유의 것과 외래적인 것 등 너무나 상이한 온갖 요소들을 갖고서 막힘없이 흐느는 감미로운 억양과, 그 이미지들의 밀도있고 동질적인 세계를, 그리고 그 형상들의 의미와 실재의 완벽한 통일을 만들어낸 시적 창조력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96

귀족계급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 육체적 미의 이상과 그들의 윤리관은 문학작품에서만큼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같은 시대의 조각과 회화의 여러형식에도 결정적인 형향을 미쳤다. 보통 아뽈로상이라고 불리는 올림삐아 경기에서 우승한 귀족 젊은이의 입상이나 완별한 육체와 기사적 자세를 보여준 아이기나 지방의 박공에 새운 조각들은 삔다로스의 송시가 갖는, 서민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귀족적이고 영웅화를 추구하는 낡은 양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조각이나 문학작품의 대항은 모두 귀족으로서 고도의 훈련을 받고 경기를 위해 철저히 단련된 인간형이요 이상적 남성상이었다. 올림피아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귀족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들만이 경기를 위한 준비를 하고 이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초의 우승자 명부는 기원전 776년의 것인데 빠우싸니아스에 의하면 최초의 승리자 입상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536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 두연대 사이의 기간이 그리스 귀족제의 황금기였다. 그렇다면 승리자상이 세워진 것 자체가 이미 유약해지고 명예심이 모자라며 소심해진 세대의 사람들을 고무,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06

도시의 생활양식과 상업이 발달하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하기는 고대 오리엔트의 경제도 도시경제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달했고그 대부분은 상공업에 기초를 두고 있옸지만, 그것은 주로 궁정 및 사원 경제의 독점하에 있든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여하튼 개인적인 경쟁의 여지가 거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오니아와 그리스 본토에서는 적어도 자유시민들 사이에는 경제적인 경쟁의 자유가 있었다. 107

형식의 자율화라는 이런 변혁이 왜 이 시기에 이 지방에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오니아가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이민족과 이질문화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생활이 그리스인들에게 미쳤을 영향이라는 점에서 수비사리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질적인 현상에 둘러싸여 있던 덕분에 자기들의 특수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의식 및 이것과 연결되는 자기강조, 즉 자기들을 이민족으로부터 분리해주는 특색의 발견과 강조가 필연적으로 자발성과 자율성의 이념을 초래했다. 각양각색의 민족들의 각기 다른 사고방식을 관찰하며 길러진 안목으로 그들은 점차 이들 민족이 지닌 세계상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식별하게 되었다. 즉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 천둥의 신, 전쟁의 수호신 등이 이들 민족마다 모두 상이한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됨에따라 그들은 점차 표현방법 자체에 주의를 돌리게 되고, 조만간에 타민족의 표현방법을 그들의 신앙과 관련시키지 않고, 아니 신앙이라는 것 자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도 시험해보려고 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면 종합적인 세계관에서 분리된 자율적 형식의 개념이 탄생하기 일보 직전까지 온 셈이다. 자의식이라는 것, 즉 당면한 현실적 필요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에 관한 충체적인 앎을 추구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최초의 위대한 추상행위였고, 개개의 정신형식을 그것이 인생 전체속에서 그리고 통일된 세계상 내부에서 가지는 기능으로터 해방시킨 것은 또 하나의 공적이었다. 116

생활양식은 구석기시대가 끝난 이래 한번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유동적이며 분방하게 되었고 고루한 전통이나 편견에서 해방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던 외면적, 제도적인 특은 모두 제거 되었다. 전제군주, 참주, 세습적 사제층, 자치권을 가진 교회, 신성불가침의 경전, 신의 계시에 따른 도그마, 공공연한 경제적 독점, 자유경쟁에 대한 공식적인 제한- 이러한 것들은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모든 조건은 현세의 삶과 현재의 생활을 즐기며 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유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동적, 진보적인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낡은 보수세력의 작용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는 했다. 자기의 특권에 매달려 혈연국가의 권위와 함께 자유경쟁 이전의 독점경제를 유지하려고 애썼던 귀족들은 예술분야에서도 엄격하고 고풍스럽고 정적인 형식의 지배를 그대로 존속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고전주의의 역사는 그 전시기를 통해 이들 두 개의 대립하는 양식이 교대로 지배권을 장악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128

플라톤의 예술론에서 엿보이는 아케이즘 지향적 요소도 그의 정치적인 보수주의와 직결된다. 그는 조형예술 영역에서 새로 일어난 환각주의적 경향을 거부하고 뻬리끌레스 시대의 고전주의 예술을 편애했으며, 영원불변의 법칙에 묶여 있는 듯이 보이는 형식 위주의 이집트 예술을 찬미했던 것이다. 그가 예술분양에서 새로운 것에 반대했던 것은 거의 모둔 새로운 것에 반대하고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머리를 들고 나오기만 하면 그것을 곧 무질서나 데까당스에 결부시키곤 했던 그의 정치철학의 일환이었다. 플라톤은 미래의 이상국가에서 예술가를 추방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는 경험적 현실의 세계나 현상계의 감각적 인상, 즉 완전한 가상 내지 부분적인 진리에 집착하며 모든것을 가시적인 표현수단으로 잡으려고 하여 순수한 정신적 당위의 세계인 순수 이데아를 저속하게 만들고 왜곡시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41

학문연구가 이와같이 전문화되고 비인격화된 사실의 필연적 결과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절충주의의 위험이었다. 이 두가지 특색은 서양문화사에서 처음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것이자, 헬레니즘의 모든 특색 중 아마 가장 현대정신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적 특징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예술작품의 근본적 특색이기도 하다. 역사를 존중하며 고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지녔고 과거 여러 형태의 예술유파에도 폭넓은 태도로 임했던 이시대는, 필연적으로 모든 자극에 대하여 무차별하게 반응을 보인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예술작품의 수집이나 박물관의 설립을 통해 더욱더 심해졌던 것이다. 물론 이전 시대에도 왕, 제후 또는 개인이 예술품을 수집하긴 했으나 계통적이고 계획적으로 수집하게 된 것은 헬레니즘 시대부터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 예술의 발전을 한눈으로둘러볼 수 있는 완벽한 조각진열관을 만들려고 했고, 또 중요 작품의 실물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경우에는 하다못해 복제라도 만들려고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수집은 이러한 학문적 계획성이라는 점에서 근대 박물관과 미술관의 선구자였다. 147

로마시대 후기의 예술양식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적 양식이다.이것은 연속적 묘사법에서 볼 수 있는 서사시적 양시과는 반대로 오히려 서정적인 것으로, 단 한번뿐인 통일적인 시각상을 그 주관적인 순간성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비크호프는 이 방법을, 연속적방법의 전제이자 그 유기적인 보완이라 보고 있지만 이 두개의 양식 사이에 그렇게 직접적인 연관성을 상정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 두 양식은 출현한 시점도 다르고 그 외적, 내적 전제조건도 다르다. 즉 인상주의적 양식이 1세기에 고전주의 미술의 분화과정의 극치로서 등장했다면, 연속적 묘사법은 2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며 원래 고대 그리스,로마의 그것과는 다른 예술의용의 상당히 거칠고 비속한 표현인 것이다. 이들 두 양식은 각기 다른 사회계층을 그 모태로 하고 있고 양자가 동일한 작품에 동시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다. 157

연속적 표사법이 나타났을 무렵에는 고대적 인상주의의 전성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표면적인 기술만이 회화의 영역에서 장인적인 전통과 더불어 좀 더 생명을 유지해가다가 마침내 그것도 완전히 허물어지고 잊혀져버린 것이다. 연속적 묘사법,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제의 줄거리에 치중하는 서사시적 양식은 인상주의적 회화기술을 보완한다기보다 도리어 이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해 버렸다. 연속적 묘사법은 원래 비자연주의적인 예술의욕을 모태로하는 것이고 예술사에서 자연주의적 양식이 번영한 주요한 두 시대-즉 고대 그리스와 근대에는 거의 흔적도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따라서 2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서양미술의 전부가 이 벙법에 지배되고 있다는 비크호프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 방법은 후기 고딕에서도이미 주류에서 벗어났으며 르네쌍스 초기 이후에는 예외적으로 약간 나타났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연속적 묘사벙법에 보이는 서사시적 환각주의와 인상주의적 양식의 본질을 이루는 시각적 환각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내면적 관련도 없는 것이다. 158

일반적으로 중세예술의 특생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특징들, 그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인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인 취급 등은 중세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도시적 화폐경제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예술 및 문화의 근본적인 특생으로서 시종일관했던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다. 즉 중세의 예술은 중세 초기에서 전성기로 넘어가면서 그때까지의 엄격한 여러 구속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극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은 잃지 않았으며, 교회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리스도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의 표현으로 남아 있었다. 중세예술이 이와같은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이단과 분파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집단이 정신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그들이 설치한 구원기관인 교회의 사회적 권위가 본질적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78

흔히 상업과 교역, 도시경제와 화폐경제에 수반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반전통주의적 경향이 비잔띤제국에서 꽃피지 못한 원인도 그와같은 상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개는 평준화와 해방작용을하는 도시행활이 여기서는 도리어 엄중히 통제된 보수적 문화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꼰스딴띠누스 황제가 도시에 유리한 정책을 쓴 덕분에 비잔띤제국의 사회구조는 애초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나 중세 전성기 및 말기에 걸친 도시들의 구조와는 달랐다. 특히 제국 내의 어떤 지방에서 토지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꼰스딴띠노뽈리스에도 집을 한 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법률이 나온 결과 지주들이 수도에 모여들게 되고, 따라서 서방제국의 귀족보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처음부터 왕성한 독자적인 도시귀족이 생겨났다. 물질적으로 유족한 이들 보수계급의 존재는, 다른 사회틍의 유동성을 제약하고 꼰스딴띠노뽈리스와 같이 본래부터 안정성이 없는 상업도시에서 획일적, 인습적, 정체적인 경향을 지닌 절대군주제의 전형적인 문화가 발생하고 존속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89

성상반대운동 전파를 강력히 촉진한 또 하나의 요인은 일체의 성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랍인들이 혁혁한 군사적 성화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회교도의 이러한 입장도 많은 동조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비잔띤 제국에서도 아랍인들처럼 성상을 갖지 않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적인 아랍인들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것은 그들의 종교가 성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도 그들을 본뜸으로서 아랍인들의 비결을 체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아랍의 풍습을 따옴으로써 그들의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성상숭배를 그만두어 나쁠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

그런데 이 음유시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 유래는 무엇이며 종래의 이런 부류의 시인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 음유시인은 중세 초기의 궁정가인과 그리스, 로마 이래의 미무스의 혼혈아라고 말해지고 있다. 
미무스는 고대 이래 계속 번창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완전히 소멸해버린 시깅도 왕년의 미무스 광대들의 후예는 여전히 제국 영내를 다니면서 그 단순하고 서민적이며 즉흥적인 연기로 하층민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중세 초기의 게르만 여러나라에서는 도처에서 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궁정의 시인이나 가인들은 그들과 엄격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롤링어 왕조 르네쌍스와 다음 몇 세대의 교회중심주의의 결과 이들 궁정시인들이 상류사회의 고객을 잃고 하층민 사이에서 미므스와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들도 이 경쟁에서 견디기 위해 스스로 미무스 연기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가인과 희극배우는 둘 다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하면서 서로 뒤섞이고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으며, 긔 결과 얼마 후에는 양자를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이미 미무스 연기자도 궁정가인도 없고, 다만 음유시인만이 남게 된 상황이 온 것이다. 음유시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추었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미 결코  시인이나 가인만이 아닉 악사 겸 무용사, 극작가 겸 배우, 광대 겸 곡예사, 요술장이 겸 곰재주 놀리는 쇼꾼, 한마디로 당대의 만능연예인이요 메트르드 쁠레지르(여흥진행 담당자)였다. 231

현재 남아 있는 작품만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세속미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교회미술과 세속미술 중간에서 어느쪽에도 속한다고 하기 어려운 당시의 초상미술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델의 개인적인 특징을 강조한 초상화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었다. 따라서 로마네스끄의 초상화는 공식적인 기념이나 전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필사본 성서의 헌사에 해당하는 그림이나 교회의 묘비조각 같은 데서나 볼 수 있었다. 필사본의 헌정화에는 주문주나 기증자의 초상 이외에 필경사나 화가의 초상이 첨가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그림은 그 의례적인 성격에더 불구하고 비록 아직은 전적으로 유형적인 묘사법에 의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매우 개성적인 하나의 새로운 장르, 즉 자화상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묘비의 일부를 이루는 초상조각에 이르면 이러한 내적 모순은 한층 심해진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묘예술에서는 죽은 당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든가 매우 조심스럽게 약간만 나타날 뿐이었다면 이에 비해, 로마네스끄 시대의 묘비에 이르면 죽은 당자가 주된 대상이 된다. 계급화 신분 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봉건사회는 개개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하는 데에는 아직 저항감을 느끼고 이었으나, 개인을 위한 기념비라는 개념은 이니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62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도시의 예술이요 시민적인 예술이었다. 즉 수도원과 귀족의 예술이었던 로마네스끄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도시적, 시민적이었고, 대성당의 건축에서는 비성직계층의 발언권이 더욱더 증대하고 이에 비례하여 성직자들의 영향이 가모했다고 하는 의미에서도 도시적, 시민적이었으며, 끝으로 이들 교회건축은 한 도시의 재산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미 교회의 어느 고위성직자가 자기의 재력만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도 도시적이요 시민적이었다. 그런데 시민적 세계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비단 대성당 건축뿐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사문화 전체가 옛날부터 봉건적, 위계질서적 생활감정과 새로운 시민적, 자유주의적 사고방식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시민계습의 영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문화의 세속화 현상이다. 이미 예술은 보통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소수자만이 나눌 수 있는 암호가 아니라 거의 누구에게든지 이해될 수 있는 표현수단이었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이미 단순히 성직자들의 종교가 아니고, 민중중교로서의 색채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의식이나 교리 등의 요소보다도 도덕적 내용이 중요시되었다. 종교는 인간화되고 감정적인 요소가 강해져갔다. 또 고귀한 심성을 가진 이교도에 대한 관용이라는 것도 - 이 현상은 십자군이 남긴 누에 보이는 몇몇 효과의 하나이거니와 - 당시의 좀더 새롭고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오히려 내면성이 증대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12세기의 신비주의, 교단개혁운동, 그밖의 각종의 이단도 모두가 이와같은 경향의 징후였다. 272

중세의 궁정문화가 그 이전의 모든 궁정문화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뚜렷하게 여성적 성격을 띤 문화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여성의 영향이 이미 강했던 헬레니즘 시대의 왕궁들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중세의 궁정문화는 여성이 궁정의 정신생활에 참가하고 또한 문학작품의 방향결정에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남성 자신이 여러가지 면에서 여성적인 사고방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여성적인 것이었다. 옛날의 영웅문학이나 그 뒤의 샹송 드 제스뜨와는 달리 프로방스의 연애가요나 브르따뉴의 아서왕 설화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아끼뗀느의 엘레오노르, 나르본느의 에르망가르드 등등 시인들의 보호자였던 수많은 여성은 문학적 쌀롱을 가진 귀부인이요 문학을 이해하는 여성으로서 당대의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때로는 시인의 입을 빌려서 그들 자신이 직접 발언하는 일조차 있었다. 그런데 남성에게 심리적, 도덕적 교양을 심어준 것이 여성이었다든가, 여성이 문학의 원천이고 대상이며 또한 청중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써는 아직 불충분하다. 시인들은 여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여성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고대에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요 전리품 쟁탈의 대상이며 노예에 지나지 않았는데, 중세 초기에도 아직 그들의 운명은 가족이나 영주의 자의에 맡겨져 있었다. 이러한 여성이 이제 와서는 얼핏 보아서는 이해가 안될 정도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남성은 항상 군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문화의 세속화가 진전된 결과 중세의 궁정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오히려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치더라도, 애당초 교양이라는 것이 어째서 그만한 사회적 평가를 받아서 엿엉이 교양에 의해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 한은 의문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법률제도가 변한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딸이 왕위를 게승할 수도 있고 여성이 큰 봉건영지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도 일반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더구나 기사계급의 연애관으로 말하자면, 그거은 원래부터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의 전제가 아니라 그 징후의 하나인만큼 설명으로서는 더욱 부적당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82

고딕시대의 정신적 유동성은 문학작품보다 조형예술에서 대체로 더 잘 살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문학활동은 그 중심을 이루는 사회층이 계속 변했기 때문에 그 발전이 때로는 상호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여러 단계의 축적이고 말하자면 단속적인 것이었던 데 비해, 조형예술 활동은 이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의 비교적 통일적인 직업층과 결부되어 있어서 그 결과 거의 단절 없이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정체상태에서 벗어나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의 원동력이었던 시민계습의 정신이 문학에서보다 조형예술에서 훨씬 신속하고 전면적으로 자기를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학영역에서 시민계습의 현실주의적, 비공상적, 현세긍정적 생활감정을 직접 표현한 것은 이시대의 방대한 문학활동 가운데서 일종의 주변현상에 속하는 몇몇 개별적인 장르뿐이었던 데 비해, 이 시대의 조형예술에서는 거의 어느 형식을 보아도 이러한 시민계습 생활감정의 입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조형예술 작품에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서보다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서양 정신의 일대 전환 즉 신의 나라로부터 자연계로,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바로 주변의 것으로, 엄청난 종말론적 신비로부터 인간세계의 좀더 범상한 문제로의 복귀가 한층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 예술적인 관심의 중심이 위대한 상징이나 형이상학적인 종합이라는 데서 떠나 직접 체험 가능한 것, 감각적이고 일회적인 것의 묘사로 이동하는 경향도 문학영역에서보다 먼저 나타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종말 이래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던 유기적인 생명은 이제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경험적 현실세계에 소속하는 개개의 사물이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미리부터 피안적, 초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308

고딕시대의 이상주의는 동시에 일종의 자연주의로서 피안적 세계에 근거한 정신적인 이상형을 경험적인 관점에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다시 철학상의 관념론이 관념을 개개의 사물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관념을 강조하면서도 개개의 사물도 중요시하던 것에 대응하는 현상이었다. 이것을 이른바 보편논쟁의 용어로 번역하면, 보편적인 기념은 경험적 사실에 내재한다고 생각되고 그 이외의 형태로는 여하란 객관적 존재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사에서 말하는 이 온건유명론은 아직도 철저히 관념론적이고 피안중심적인 세계관을 근거로한 것이었는데, 이것과 절대적인 관념론 즉 보편논쟁에서의 이른바 실재론 사이의 거리는 뒤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유명론 즉 관념은 그여하한 형태의 객관적 존재도 인정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주어진, 일회에 한한, 유일하고 독특한 개별적 경험으로서 밖에는 진정으로 실재한다고 볼수 없다는 사고방식과의 거리보다도 더 컸다. 314

보편논쟁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문제는 철학의 중심 문제요 어떤 의미에서 대표되는 철학문제일 뿐 아니라 - 경험론과 관념론,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개인주의와 보편주의, 역사주의와 비역사주의 등의 문제가 모두 그 변형에 지나지 않는 철학에서의 전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 단순한 철학문제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소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자기의 정신적 존재를 자각한 인간이 반드시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문제들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관념의 현실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경험적 현실세계의 사물과 불가분의 것으로 간주하려고하는 온건한 유명론이야말로 당시 사호, 경제 구조상의 갈등이라든가 그 예술이 지닌 이상주의적 요소와 자연주의적 요소의 내부적 모순 등, 요컨대 고딕시대의 모든 이원적 성격의 열쇠였다. 315

고딕 건물은 자체 내에 움직임을 담고 있는 작품일 뿐아니라 감상자까지도 동원하여 예술감상이라는 행위를 일정한 방향과 단계적인 발전을 수반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바꿔놓는다. 이와같은 건축물은 어느쪽에서도 한눈에는 담을 수 없고,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전체의 구조를 제시하는 완결되고 시선을 안정시켜주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그 위치를 바꿀 것을 강요하고, 하나의 운동, 행동, 재구성이라는 형태로서만 그 전체의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고딕시대와 비슷한 사회적 여건을 갖추고 있던 민주제시대의 그리스 예술도 마찬가지로 감상자의 적극적 태도를 요구했다. 당시에도 감상자는 예술품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상태에서 이탈하여 묘사된 주제가 지닌 운동을 자기 마음속으로 되풀이할 것을 요구당했다. 고정된 입방체적인 형태가 해체되고 조각이 건축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고대의 고전미술이 감상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저 조상의 회전이라는 현상을 향해 고딕 미술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323

로마네스끄 시대의 건축주들은 주로 자기의 농노나 소작인들의 노동력에만 의존하고 있었지만, 화폐가 자유로이 통용되면서부터는 자유신문의 외부 노동력을 고용해들일 수 있는 범위가 전보다 증대하고 그 결화 점차로 일정한 지역권 내의 노동시장이 형성돼갔다.이제부터 건축활동의 규모와 속도는 현금 준비상태에 좌우되게 되었고, 고딕 교회의 건축이 몇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었던 것은 그 이유의 태반이 주기적으로 닥쳐온 자금의 부족 때문이었다. 즉 자금이 충분할 때에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신속히 진행되었지만, 자금이 고갈되면 일이 지연되든가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달훌 수 있는 자금의 양에 따라 전혀 다른 두 가지 작업진행 방식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대체로 안정된 인적 구성을 갖고 일정한 진도로 공사가 진행되는 경우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장인의 수에 많은 변동으 보이고 때로는 공사를 쉬거나 속도를 늦추기도 하면서 진행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326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을 동업조합적인 제약이 이완되고 생산이 점차로 동업조합의 틀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조합이 제공하던 안전범위에서도 벗어난다는 것, 즉 경제활동 일체가 경쟁을 의식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책임 아래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중세 전성기도 이미 자본주의 시대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러한 정의로써는 불충분하고,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포함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타인의 노동력의 기업적인 활용과 생간수단의 소유를 통해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 즉 한마디로 노동을 일종의 봉사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든다면 자본주의 시대는 14세기 및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자본의 축적이라든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거대한 재력이라는 것은 중세 말기에 와서도 거의 문제 될 수 없었고 오로지 능률, 계획성, 합목적성의 관점만으로 지배되는 철저히 합리주의적인 경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향은 이때부터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개인주의적인 경제사상, 동업조합적 관념의 점차적 쇠퇴, 인간적 관계의 사무적 관계로의 전환 등은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직 본격적인 자본주의 개념에는 멀리 못미친다 하더라도, 시대는 새로운 경제체제의 특징을 담고 있었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대표자인 시민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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