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1년 2월 21일 04시 43분 등록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옥중생활을 했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단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규모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 사건이었다.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당했고, 신영복은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모두 여섯차례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꼬리표가 붙었다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외에는 통혁당 지도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음에도 통혁당의 지도간부로 간주된 무기수, 신영복이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나중에 중앙정보주에 가서야 자신이 통혁당 지도부가 된 것을 알았다.  지금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이기도 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중에 집필한 책이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2006년에 정년 퇴임했다.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을 성공회대에 기부했다. 현재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감옥에서 '인간성이 개조'되는 자기혁명을 이루어낸다. 밑바닥을 살아온 사람들과 24시간 맨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한다. 감옥에서는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살기에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10여년간 교도소에서 직접 노동을 하면서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에 그의 인간개조론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를 했다. 그는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이 역시 옥중에서 익혔다.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인생을 바꾼 진정한 '나의 대학 시절'이었다고 고백한다. 
-----------
'강의'는 유교 고전인 '시경' '서경' '주역'에서 시작하여 '논어' '맹자'를 거쳐 도가 사상의 텍스트인 '노자' '장자'를 말한다. 나아가 '묵자' '순자', 불교의 화엄학을 지나 성리학의 '대학' '중용'까지 간다. 동양사상을 이렇게 두루 살필 수 있는 것은, 그가 방대한 동양고전을 꿰뚫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방대한 텍스트를 이야기하면서도, 중심을 꿰뚫는다. 바로 '관례론'이다. 서양사상이 '존재론'이라면, 동양은 '관계론'에서 시작한다. 신영복의 고전독해는 과거의 가치를 현재와 미래에서 되살려 음미하며, 인간과 사회 및 우주를 관계주의적으로 이해한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 즉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아래 각축을 벌이던 무한경쟁시대에 터져 나왔던 거대 담론들을 '고전'을 통해 오늘의 상황에 연결한다. 현대 자본주의,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체제와 신자유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책을 읽고 의심했다. 시간은 강물과 같다. 시간은 여기에서 저기로 흐른다. 디지털 시대는 시공간을 순차적이 아니라, '내키는 대로' 재배치한다. 현재를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령화 사회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상품과 상술이, 다가오지도 않은 '고령화 사회'때문에 생겼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준비하기 위해, 재테크와 노후준비로 여유가 없다. 그의 '강의'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하다. 현실은 과거로 만들어지고, 사람은 그 과거, 현재가 된 원인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하나라 폭군 걸왕 이야기다. 저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걸왕의 독락'을 행복의 조건으로 삼고 있음을 본다. 개인적인 정서 만족만을 낙의 기준으로 삼는다. 타인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무지함을 질타한다.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상처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혼자서 놀아도 즐겁게 만드는 것이 현대 자본주위가 돈을 버는 방법이다. 기형적으로 부풀려진 에고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면 쉽게 상처 받는다. 

'강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다. 신영복 교수의 사상은, 땅에서 시작한다. 그의 책은 땅과 생각을 이어주는 다리다. 난 이 책을 책으로 보고 싶지가 않다. 나의 마음의 온도를 재는, 온도계로 보고 싶다. 내 인생은 따듯한 인생이 될까?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의 온도는 따듯한가? 
--------------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방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건 훨씬 더 현실적이 이유였습니다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집에서 보내주는 책은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해야 그 다음 책을 넣어주는 식이었어요.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은 물론이고 노자[도덕경]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동양고전 몇 권을 한 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했습니다.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8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늒미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20

앞으로 함께 읽게 될 고전의 예시 문안들은 동양고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우 초보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양고전을 섭렵한다는 것은 평생 걸려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 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이쓴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1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래된 미래'란 책을 알고 있지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책의 부제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 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25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잘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30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 입니다. 도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의 회의문자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다니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6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43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 운동, 신악부 운동등 문예 혁신 운동을 벌여 민중 정서에 다가서기를 호소합니다. 근세 이후에는 고문 운동이 오히려 보수화의 논리와 결합되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 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고 사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57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여져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의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의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요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5

우리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이 붉은 표지의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행진하는 광경을 보고 매우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오어록'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유일 지배 체제의 상징 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오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렇나 기록이 보전되고 부단히 읽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이른바 분서갱유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 문자와 고대 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위치우위는 그의 '세계문명 기행'에서 시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한 장서 70만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00여 년 후 로마 황제가 이교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들을 추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고대 문자 해독 능력이 인멸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 기록의 의미는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천 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라는 것이지요. 69
91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못ㅂ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암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 ,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70

이 '무일' 편에서 개진되고 있는 무일 사상은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 사상은 주나라 시대라는 고대사회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 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71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정 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직의 류사오치 이론의 마오쩌둥'이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만, 마오쩌둥 사싱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위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간과 담대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명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84

철학적 해석이 있기 이전의 '주역' 복서미신의 책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주역'의 경, 즉 텍스트 자체가 미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미신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점 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자의성을 지적하여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괘의 구성과 괘사, 효사에 동양적 사고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공자학파의 철학적 해석 방식뿐만 아니라 경 속에 담겨 있는 관계론에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91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달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성괘는 여석 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初, 2, 3, 4, 5, 6 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 중에서 1, 3, 5는 양효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의 자리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거나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가 실위입니다. 100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이 'IMF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은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 의식을 청산하고, 4, 5천불 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124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거싱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경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방식도 변해습니다. 네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 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이 평민 병사의 보병전중심으로 변화했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 경쟁이 국가 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펴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138

흔히 시간이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닏.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살, 3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샐지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회야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148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한느 것입니다. 예, 악, 사, 어, 서, 수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2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리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펴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160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글이고 별로 어렵지 않은 글입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선생이 '상서'의 한 구절인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의 뜻은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 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뱀범 자신이 스스로를 미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보다고 이 글에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건강은 실생활에 있어서 미모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구나 백범처럼 풍찬노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로서는 더욱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정작 백범은 얼굴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서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루쉰이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으로진로를 바꾼 이유가 그렇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 루쉰은 건장한 중국 청년이 러시아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건장하지만 우매한 조국 청년의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였지요. 우매한 대중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쇠 방에 갇혀 죽어가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중국인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167

더구나 내게는 이 '학이불사즉망'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어린 손자인 나를 앉혀놓고 이 구절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 않게 된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할아버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나서 자주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 내용의 핵심을 간추려보게 되기도 하고 또 글 전체의 구성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180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와 지신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183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189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이 말하기를, '군자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을 할 것이랴' 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문이 절이고 질이 곧 문이다.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 고 하였습니다. '곽'은 털을 뽑은 가죽을 말합니다. 자공의 반론은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빈빈하기가(고루 조화되기가)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형식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식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내용을 채우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습니다. 199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잇거나 바쁘게 뛰어다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수고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뵈었을 때, 왕은 연못가에 서서 고니와 사슴등 갖가지 새들과 짐승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현자 들도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시경'  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영대를 지으려고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우니
백성들이 달려와 열심히 일해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네. 
왕께서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부모의 일처럼 열심이었네. 왕께서 동산을 거니시니, 암사슬들은 살지고 윤이 나고 백조는 털이 희디희어라. 왕께서 못가에 이르시니 아! 연못에 가득한 물고기들 뛰어오르네. 218

'맹자'의 문장은 길어서 원문을 많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한문학의 교범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맹자'의 내용만이라도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민락장에 이어서 '오십보소백보'의 원전이 되고 있는 다음 장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양혜왕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하게 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웃 나라의 백성들 수가 줄지도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지도 않는 까닭을 맹자에게 물었지요. 221

인仁이란 하늘이 내려준 벼슬이며, 사람의 편안한 거처이다.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인을 행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며, 무례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남의 부림을 받으면서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열심히 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231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잇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하게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37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개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되지요. '난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 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의 '지자불박 박자부지'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244

춘추전국시대는 결국 법가사상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 사상계의 통일도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분서갱유도 그러한 사상 통일의 일환입니다. 유묵논쟁이나, 유법논쟁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역인 법가 사상은 난세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했지만 치세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법가적 정책이 그 역량을 결집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가동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진정한 부국강병을 만들어내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을 길러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255

'노자'는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서구에 소개된 이후 현재 약 60여 종의 번역본이 있으며 현대 서구 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노자' 강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62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장의 핵심 개념은 인식과 실천의 반성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입니다. '위'는 인+위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275

노자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참으로 노자답다고 하겠습니다.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언어와놀리들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278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천하는 무사로써 얻을 수 있으며,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장의 지자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서예를 사사받은 정향선생님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하신 적이 없다고 실토하신 적이 있습니다. 투표하시지 않은 이유가 매우 특이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나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찍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를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자기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한 바퀴 휘익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282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입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 많은 사람이 범한 절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 권력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289

'대교약졸'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예에서만큼 졸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이란 글씨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301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외편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에 묶인 굽은 선비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 309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 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동안이나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머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324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려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고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끼어나도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나한테 먹을 가는 기계가 있습니다. 먹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더러는 이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가끔씩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이 기게는 자기 식대로만 움직입니다. 물이 없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갈고 있습니다. 이 기계가 먹믈의 농담을 알맞게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33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강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6

묵은 목수의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의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먹줄은 목수들이 직선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입니다. 그래서 법도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엄격한 규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묵자'에는 묵자가 방성 기구를 만들고 수레의 빗장을 제작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묵자를 공인이나 하층 계급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은 그러한 계층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묵자의 사상이 하층의 노동 계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검은색은 이처럼 묵자의 면모를 구체화해줍니다. 365

묵자의 반전론은 매우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묵자는 공전을 예찬하는 자를 반박합니다. 공전이 비록 불의하지만 이익이 된다는 노리에 대해서도 반박합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제후국이었으나 전쟁을 통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백성이 많은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공전을 예찬하는 논리가 있지만 묵자는 단호하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380

사람의 본성은 약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든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413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무낭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428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기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되었다. 지금 선왕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432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과 덕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를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 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446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관련 내용을 보면, 책을 불사르되 첫째로 박사관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의약 점복 종수등 과학 기술 서적도 제외했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의 전적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추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대규모의 분서는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관부소유의 서적이 서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융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젓거리에서 시서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5

고전 강독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창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아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508

---->두번째 읽다. 
신용복 교수의 글에는 힘이 있다. 행동과 실천이 바탕이기 때문이다. 해박한 지식, 실천, 그리고 글. 그의 강의'를 읽으며, 나의 롤모델을 찾았다. 사업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다. 치열하게 살고, 치열하게 기록한다. 그 결과는 책이 된다. 

IP *.111.206.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752 [북리뷰 50] 구본형의 필살기 신진철 2011.03.15 2342
2751 하트 투 하트 [2] 이은주 2011.03.14 2767
2750 [리뷰50] 삼색공감 (정혜신) / 새로읽기 최우성 2011.03.14 2737
2749 북리뷰50. 경영의 미래_게리 해멀(심층읽기) 박상현 2011.03.14 2185
2748 북리뷰49-<살아남기위하여>-두번재 읽기 박경숙 2011.03.14 2218
2747 <세월이 젊음에게 - 우리가 가져야 할 일과 인생에 대한 마음가짐 > - 구본형 [2] [1] 김연주 2011.03.08 2936
2746 북리뷰, 위대한 기업으로. 맑은 김인건 2011.03.07 2241
2745 북리뷰-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이은주 2011.03.07 1908
2744 [북리뷰 49] 문명의 충돌 신진철 2011.03.07 2387
2743 북리뷰48-<자기경영노트:피터드러커> 박경숙 2011.03.07 2347
2742 북리뷰 49. 프로페셔널의 조건_피터 드러커(청림출판) 박상현 2011.03.06 1688
2741 49.<떠남과 만남> 구본형 [6] 박미옥 2011.03.06 2115
2740 [리뷰] 필살기 최우성 2011.02.21 2244
2739 북리뷰 48. 피터 드러커 자서전_한국경제신문(심층읽기) 박상현 2011.02.21 2289
2738 북리뷰47-<행복의 정복:버트란트 러셀> 박경숙 2011.02.21 2799
» 북리뷰, 강의 맑은 김인건 2011.02.21 2319
2736 [북리뷰 48] 클릭! 미래 속으로 신진철 2011.02.20 3082
2735 북리뷰- 신화와 인생-조지프 캠벨 이은주 2011.02.20 2253
2734 48. <살아남기 위하여> 자크 아탈리 박미옥 2011.02.19 2332
2733 경영의 미래 맑은 김인건 2011.02.16 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