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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6일 17시 13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Carl Gustav Jung (1875.7.26 ~ 1961.6.6)

 융은 정신의학자이면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삶의 대부분을 임상연습에 몰두하였고 동양과 서양 철학, 연금술, 점성술, 사회학 뿐 만 아니라 문학, 예술 등 심리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그 과정에서 겪게 된 내적·외적 경험들을 통해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다. 한 때는 프로이드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으나 좁힐 수 없는 견해차이로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별 후에도 프로이드의 치료법을 적용하기도 한 그의 모습과 다른 이들이 비논리적이라 여긴 인류의 모든 무속신앙, 종교 등에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에서 융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이 개방성이 자신이 개척한 분석심리학에도 스며들어가 있기에 오늘날 그의 이론이 심리학 뿐 만 아니라 인문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왕성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쳤지만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그는 한없이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융에게 있어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었기에 평생 동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했고,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바쁘게만 달려가지 말고, 가끔 멈추어서, 마음을 들여다보고(Look within),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Listen into)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고,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둘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것이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 되어준다.
 
그가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 안에서 두 세계로 나누어진 분리를 지양(止揚)하려는 나의 노력이 저지되고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보통의 일상적인 존재로부터 무한한 신의 세계로 밀어 넣는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예측해 볼 수 있듯이 그는 고독하게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고,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끝없이 탐구하고 모든 단서들을 수집하여 분석한다.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모험도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것임에도 그것을 감수하며 감행한다. 이와 같이 환자를 대하는 융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융은 생존 당시인 1959년, 영국방송공사 텔레비전에서 진행된 존 프리먼과의 대담에서 인류의 심리학적 자세에 장차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단언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융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한 위험은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큰 위험인데도 우리는 너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모릅니다. 아는 게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미래를 예견하였고 인간자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토록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기를 두려워했던 융이지만 그의 개인사가 낱낱이 드러나 있는 자신의 자서전을 비록 사후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자서전 문학의 백미

옮긴이 서문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서적인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8]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9]

자기실현(Selfstverwirklichung)은 ‘자아’ 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와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 자기실현은 나 자신을 깊이 있게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나를 만나 인정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듣는 과정들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그와 같이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9]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강하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11]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있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12]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나, 기껏해봤자 그런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인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 제시될 뿐이다. [131]
➜ 막연하게 제시된 그 목표지점을 구체와 시키면서 과정을 계획하고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 아닐까.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선물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13]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13]
➜ 뿌리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꽃은 새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잠시 잊혀지는 듯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14]

일생을 사로 잡는 꿈 - 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우연히 꾸었다. 그 꿈은 이를테면 일생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서너 살이었다. [31]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이를테면 땅에 묻히는 매장식이 거행된 것이었다. 내가 다시 땅에서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갔다.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많은 빛을 어둠속에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37]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거나 나의 예민한 감정이 상했을 때, 혹은 아버지의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나 어머니의 병약함으로 내가 침울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싸서 침대에 뉘어놓은 남자 인형과 곱게 칠해진 매끄러운 그의 돌을 생각했다. [49]
➜ 그 남자인형이 심리적 도피처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심리적 도피처가 필요했던 융은 얼마나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자문해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50]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 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52]
➜ 순간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면 자책하는 시간이 좀 줄어들 수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은 든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나는 나의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걱정과 연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좀 더 강해 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변덕스럽고 과민한 성질을 부릴 때면 나는 어머니 편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나의 성격 형성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되었다. 이러한 갈등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나는 좋든 싫든 부모님을 판정해야 하는 상위의 중재재판관 역할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일종의 자만심을 야기했다. 그 자만심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는 자존심을 부추기기도 하고 동시에 약화시키기도 했다. [56]

어머니가 등 뒤에 대고 “아빠 엄마의 안부 전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코 닦는 것도 잊지 말고, 너 손수건은 챙겼니? 손은 잘 씻었니?” 운운하는 말들을 길거리 사람들이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굴욕으로 느껴졌다. 자애심과 허영심에서 될 수 있는 한 흠잡을 데 없이 보이기 위해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나의 자만심을 뒤이은 열등감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나로서는 정말 부당한 일로 여겨졌다. [58]
➜ 자신의 노력은 보아주지 않고 단지 어머니 할 말만 하는데서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민감한 융에게는 열등감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여든세 살의 나이에 지난날의 기억들을 적어나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59]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나를 둘러싼 광대한 세계 앞에서 느끼는 왜소감은 내 마음에 의욕상실뿐만 아니라 일종의 은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것들이 학교를 극도로 싫어하게 만들었다. [63]

나는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빈둥빈둥 보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막연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65]
➜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무력감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나는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와 아버지 서재로 들어가 내 라틴어문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몇 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결심대로 밀고나갔다. 그렇게 15분가량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을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66]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를 밀쳐 넘어뜨린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를테면 그 사건에 ‘끼워진’ 것에 불과하며 내 편에서 그 사 건을 간교하게 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그 후로 부모님이 나를 염려한다거나 동정하는 어조로 나에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67]
➜ 참으로 많은 일들이 나로부터 비롯됐음에도 그 화살을 다른 이에게로 돌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외면한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임에도 말이다.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 무렵 나는 자연으로 빠져들면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67]

너는 누구냐?

이러한 소심증은 세계와 그 가능성에 대한 불신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세상은 나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으나 막연한 위험과 무의미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항상 무엇이 닥치는지,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싶어 했다. 아마도 이것은 수개월 동안 나를 버렸던 어머니와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74]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인간들로서 부모가 없었다. 하느님에 의해 직접 그의 의도대로, 그들이 그러했던 모습 그대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하느님이 창조한 대로 존재해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르게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피조물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완전한 것만 창조하기 때문이다. [77]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을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77]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은 용기에 대한 그런 시험에서 악한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신의 전능함으로 이미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81]

하느님은 또한 아담과 이브를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이 복종하는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일에 나 자신을 넘겨주는 셈이 된다. [82]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84]

자연과 사원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학교 과제는 몹시 성가셨다. 나는 그것 역시 경쟁심으로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87]

결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보상했다.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잘못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89]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제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제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91]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 정도까지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야만 되는 급박한 이유가 생기면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할 것이 분명했다.[92]

두 인격의 어머니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 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96]

어머니는 너무 일찍 나를 믿을 만한 친구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여러 가지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103]
➜ 이미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친구 역할을 해주었던 융은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기에 더욱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한 살 무렵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내게 알려주어 나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소문으로 듣기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의 친구에게 의논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수업이 없는 어느 날 오후, 나는 어머니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도시로 가서 그 분의 집 초인종을 울렸다. 문을 열어준 하녀가 나에게 그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나는 침울하고 실망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집에 없었다고 하는 것을 특별한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일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정말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마음이 크게 상하여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바보로구나. 그런 것을 믿다니, 어리석게도 고시직하여 재난을 불어들일 뻔했구나,’ 그 후로 나는 어머니가 말하는 모든 것을 둘로 나누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머니를 한정된 범위에서만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이제는 어머니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어머니의 제2의 인격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말하는 것은 항상 그렇게 ‘요점에 맞게’ 정확했으므로 정말이지 나는 무서워 떨었다. 거기서 내가 어머니를 붙들고 늘어졌더라면 나는 대화상대를 얻었을 것이다. [103]

악의 기원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116]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나는 평균점수로 슬그머니 통과했는데 그 정도가 나에게는 딱 어울렸다. 그것은 주목을 받지 않으려는 나의 일반적인 성향과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125]

나의 비탄과 분노는 위협적으로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미 이전에 나 자신 안에서 여러 번 관찰했던 어떤 일이 일어났다. 마치 시끄러운 공간에서 방음문을 닫아버린 것과도 같이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냉정한 호기심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너는 흥분하고 있구나. 물론 그 선생은 너의 천성을 보지 못하는 바보다. 다시 말해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너는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며 소박하고 한 눈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128]

‘신의 세계’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일종의 직접적인 메시지에 의해 식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 [130]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131]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34]

나는 가난이라는 것이 불리한 점도 아니며 고통의 주된 원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서 가난하고 옷이 꾀죄죄한 소년들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었다.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나는 이전 보다 더 많은 좋은 친구를 얻었다. 내 발을 받쳐주는 훨씬 든든한 기반을 느끼며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136]
➜ 물질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결핍에서 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연과학 vs.신의세계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나는 실제 사물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면 그것에 관해 숙고할 만한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여겼다. 누구나 공상을 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158]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내가 최종적으로 의학을 택했을 때도, 인생을 그런 식의 타협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언짢은 감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취소하기 어려운 결정이 내려졌으므로 내 마음은 상당히 홀가분해졌다. [166]

사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 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거친 기질, 모호한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즉시 천진난만 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하면, 또 금방 변덕스럽게 유치한 실망에 빠지기고 했다. 깊은 내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

제2의 인격은 제1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이런 과제는 일련의 결점으로 인하여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 결점이란 때때로 부리는 게으름, 의기소침, 침울, 아무도 가치를 두지 않는 이념이나 사물들에 대한 어리석은 열광, 혼자 착각하는 우정, 좁은 마음, 편견, 우둔함(수학!),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 세계관에 대한 모호성과 혼란,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이 아닌 것도 아닌 이중성 등이었다. [167]

제 2의 인격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냉혹할 정도로 분명했으나 무능하고 의욕이 별로 없었다. 제1의 인격의 두텁고 어두운 매개물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2의 인격이 우세할 때는 제1의 인격은 제2의 인격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반대로 제1의 인격을 어두운 내적 영역으로 보았다. [168]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 없이 나를 바싹 따라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171]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 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 불확실감이 생겨난다.[174]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말보다는 주위 분위기를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것들에 대해 훨씬 더 잘 반응한다. 어린아이는 그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한다. 즉,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 보상(補償)적인 성격의 상호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174]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175]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 안에 깃들어 있다!” [176]
➜ 모든 것들의 정답은 거창하고 나에게는 어려운 방식으로 멀리 있을 거라는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그들은 눈을 내리깔고, 대학을 떠나 속물의 땅으로 돌아갔도다.

오, 저런, 저런, 저런, 오,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183]

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절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언젠가 여송연 한 통을 선물로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여송연은 일요일에만 한 대씩 피웠기 때문에 1년이나 피웠다. [186]

우리는 태양 아래서, 기울고 차는 달 아래서 한 잔의 마르크르레플러산(産) 포도주를 마치며 바일의 ‘아들러’를 논하고, 할팅겐의 ‘히르첸’을 논하며 온갖 것을 토론했다. 이런 대화는 내 학창시절의 잊을 수 없는 정점을 이루었다. [188]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193]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 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201]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 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211]

마지막 시험을 치른 날 저녁, 나는 오랫동안 열망했던 사치스러운 소망을 이루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 간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런 과도한 낭비를 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골동품을 팔아서 번 돈이 아직 얼마 남아 있어 그 돈으로 오페라구경도 하고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여행도 할 수 있었다. [213]

나는 소위 일종의 지식인 집단에 속해 있었고 특정한 사회적 ‘동아리’에 들어있었다. 나는 여기에 반감을 느꼈다. 나 자신을 그런 식으로 묶어 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214]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해 환상을 엮어나간다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이 셈이다. [217]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심리학에는 명백한 진리가 거의 없다.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무의식적인 요소를 고려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내가 어떤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환자가 곤경에 처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었다! [224]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는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 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226]

살인범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셈이다. 누가 죄를 범하고 잡히면 그는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된다. 누가 도덕적 지각없이 몰래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벌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235]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 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36]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단지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둔하고 감정 없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듯한 환자들의 마음속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일, 훨씬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241]

꿈의 분석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된다. 나로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해결책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248]

물론 의사는 소위 ‘방법’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적인 전제는 다만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은 그 전제가 타당할지 모르나 아마도 내일은 다른 전제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어떤 분석에서는 내가 아들러 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분석에서는 프로이트 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이다. [249]
➜ 분석은 단시 의사가 얘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대화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역동에 의한 에너지의 주고 받음이 아닐까.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49]

마음은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250]

오늘날에는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인은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250]
➜ 이미 때때로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이코 패스에 대한 기사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 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 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250]
➜ 바로 의사도 자기 자신이 자신의 첫 환자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나를 제대로 보지 않고 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서는 투명하게 환자를 볼 수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의사는 그 자신의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253]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무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261]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64]
➜ 독자노선을 타고 관계를 맺지 않고 물질적인 성취에만 급급했기에 성취 후에도 허한 마음이 채워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항은 특히 완강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개 그런 저항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치유에 효과적인 것은 독(毒)일수도 있어 모든 사람이 다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하지 못하도록 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수술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266]

사회적 평지에서 사람들이 만나게 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영혼의 자원들이 사실 같지 않은 황당한 상황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정신치료의 효력을 위해 꼭 필요한 환자와 의사간의 교감으로 인해 의사는 환자가 당하는 고통의 높이와 깊이로부터 받는 강렬한 인상을 외면할 수가 없다. 환자와 의사간의 교감은 끊임없는 비교와 조정, 그리고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정신적 실재의 변증법적 대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상들이 어떤 이유로든 양쪽 중 어느 한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정신치료 과정도 효과 없이 답보하게 되고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 [270]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 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271]
➜ 머릿속을 채우는 데는 온갖 열정을 다 쏟으면서 정작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등한시했기에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허탈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 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272]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부활

자기가 가장 나쁜 적인 되어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검은 진흙탕 홍수’로 위협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프로이트 자신이 검은 심연을 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284]
➜ 내가 나를 향해 꼿는 화살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처럼 나에게 가장 용기를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비장한 주장을 하고 곧바로 그것을 취소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신성한 힘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데, 그러는 게 정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힘이란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추락시키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성욕이 신성한 힘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이면서 악마라는 심리학적인 진리를 좀 더 고려했다면, 생물학 개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도 인간존재의 바탕을 좀 더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아마도 감정의 과잉으로 세계의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87]

신성한 힘의 체험으로 마음이 격렬히 동요하게 되면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실이 끊어질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절대적인 긍정으로,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부정으로 빠지게 된다. [287]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287]
➜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진동추를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288]

리비도의 변화와 상징

1층의 무의식의 제1표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깊이 내려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 속에서 나는 원시문화의 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의 내부에 있는 원시인의 세계, 의식이 다다를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선사시대의 동굴을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대개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원시적인 마음은 동물의 혼의 활동과 가까이 접하고 있다. [299]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꿈도 가능한 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300]

자연(본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신경증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계몽이 신경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조로운 일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때에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부터 억압해오던 것에 머물기를 너무 좋아하기만 한다. [307]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독특한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들어간 데 있을 것이다. 그는 환자의 사례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개별적인 환자의 심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하자면 환자의 눈으로 관찰했으며, 그 결과 병에 대하여 그때까지 가능했던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이 점에서 그는 불편성(不偏性)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많은 선입견을 극복해나갔다. [311]

내 안의 연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316]
➜ 내 안에 닫혀 있는 문들이 모두 열리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모든 문이 열리게 되면 감당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들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326]

필레몬과의 대화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335]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것들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336]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에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무의식 내용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방법이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무의식 내용이 자율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스스로 익숙해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무의식과 교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41]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342]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 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10년 동안 나는 기분이 언짢고 안정을 잃었다고 느끼면 늘 아니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면 무의식에 무엇인가 배열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아니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또 무엇을 하려는 거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소? 나는 그것을 알았으면 하오!” 조금 저항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본 이미지를 항상 도출해냈다. 그 이미지가 나타나면 불안이나 우울은 사라졌다. 내 감정의 에너지 전체는 그 이미지 내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 이미지들에 관해 아니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꿈을 이해하듯 그 이미지를 가능한 한 잘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343]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변칙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암울할 것인가! [349]

나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초기의 체험에서 결코 멀리 떠나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저작, 즉 내가 정신적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다 초기의 명상과 꿈에서 나온 것이다. 1912년에 그러한 명상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거의 50년이나 되었다. 인생 후반기에 내가 이루어놓은 것도 모두 초기의 체험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감정이나 이미지의 형태로 있었지만 말이다. [351]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353]

내가 대학교수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 숙명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353]

내가 심적 체험의 내용이 ‘진실’이며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집단적 체험으로서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제시해 줄 수만 있다면, 바깥세계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노력을 요할 것이었다. [354]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362]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나는 인간의 본능을 에너지과정의 여러 표현으로 여기며, 열이나 빛 등과 유사한 힘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자가 모든 힘을 이를테면 열에서만 끌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권력이나 성의 개념 따위로 분류할 수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초기에 범한 오류였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아본능이라는 가설로 수정했고, 좀 더 지난 후에는 초자아에게 소위 최고의 힘을 부여했다. [377]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에서는 단지 나 자신이 어떻게 무의식과 관련을 맺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밝혔을 뿐 무의식 그 자체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환상탐구에 몰두하면서 나는 무의식이 변환하기도 하고 변환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체계와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변환과정에 대한 연구와 연금술의 상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개성화 과정’이라는 내 심리학의 중심개념에 이르게 되었다. [377]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382]

오늘날의 개인이나 문화공동체도 비슷한 위협, 즉 대중화의 위험에 처해있다.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가능성과 거기에 대한 희망이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이 취한 형태는 과거에서는 비교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기술시대’의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을 보일 뿐이다. 미확인비행물체(UFO) 현상의 전 세계적인 확산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382]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답보상태로 있게 할 뿐이며, 그로인해 다음 세대가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된다. [387]
➜ 비판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사고가 멈춰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를 멈추게 한 이유를 먼저 탐색해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판도 나올 수 있게 될 테니깐.

신들이 동물 형상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들이 초인간적 영역 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삶의 영역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동물들은 말하자면 신들의 그림자이며 그 성질 자체가 밝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작은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자신이 물고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혼의 치유가 필요한 무의식적인 본성을 지닌 심령들이다. [388]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388]
➜ 때로는 그 상처를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위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입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치료도 결국 자신의 몫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자신의 상처도 그로인해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상처들을...

분석 심리학의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의 진술, 즉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도 흔히 서로 일치하는 진술이다. [390]

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94]

여러 신의 힘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즉 인간의 세계의식 면에서 창조를 폐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지상에 있는 온갖 고등생물을 방사능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계 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幻影)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395]

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들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 [39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그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97]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 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미리 예감했던 것의 실험, 즉 개성화의 표현으로 이어졌다. 청동보다도 오래갈 기억의 징표였다. 그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져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단편적으로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좇아서 일을 했다. 그래서 내적인 연관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꿈속에서 탑을 지은 셈이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 즉 정신적 전체성의 상징을 이루게 된 것을 알았다. 마치 오래전에 뿌린 씨가 싹이 트는 것처럼 그 일이 전개되었다. [404]

볼링겐에서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본체로 존재한다. 여기서 나는 이를 테면 ‘어머니의 태초의 아들’이다. 연금술에서 매우 현명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노인’이니 ‘테고’니 하는 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이미 경험한 것으로, 그것은 이전부터 늘 살아 있었고 또 살아갈 제2의 인격이었다. 그는 시간밖에 존재하며 모성적 무의식의 아들이다. 나의 환상 속에서 그 ‘테고’는 필레몬의 형상을 취했고 볼링겐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404]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405]
➜ 단순해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해질 수 있다면 세상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르마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421]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421]
➜ 맹목적인 미래에 대한 환상이 점점 더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사고는 점점 둔화되고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421]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422]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423]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왔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그 밖의 것은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거기에는 죽은 자들을 괴롭힐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전깃불도 없고 전화도 없다. 내 조상들의 혼도 그러한 영적 분위기를 통하여 환대를 받는다. 왜냐하면 한때 그들의 삶이 남겨놓은 의문들에 대해 옳든 그르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대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대답을 벽에다 그림의 형태로 그려놓기까지 한다. 마치 수세기에 걸친 조용한 대가족이 그 집에 모여살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 나는 ‘제2의 인격’안에 살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生)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424]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유럽인은 자신들이 오랜 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들이 그 기간에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시계라는 것이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 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놓는다. [431]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격정으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 격정에 의해 그들의 생이 영위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충동과 격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성찰을 하지 않고 자아는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유럽인도 그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약간 더 복잡한 셈이다. 아무튼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의지와 숙고된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 [433]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437]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 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438]

살아 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 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439]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항들에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우리나라를 밖에서 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441]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영국에서 스위스인으로 어떤 면이 어울리지 않는가를 알면 영국을 비로소 인해하게 된다. 내가 유럽인으로서 어떤 면이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가를 알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유럽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유럽의 본질을 통찰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많은 미국인과의 친교와 미국여행 덕을 크게 본 셈이다. 유럽인에게 마천루 꼭대기에서 유럽을 한번 바라보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을 것 같다. [442]
➜ 때때로 나를 조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를 날카롭게 만드는 그 원인을 찾아가다보면 또 새로운 나를 볼 수 있겠구나.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443]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0]
➜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있다면 우리도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을 줄일 수 있을텐데...

케냐과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457]

나는 그녀의 행동거지에서 우러나는 확신과 자부심이 거의 대부분 그녀의 분명한 전체성과 동일시에 근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전체성은 아이, 집, 작은 가축, 샴바,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나머지 요소인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로 이루어져 있었다. [469]

나는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천연적인 전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리고 백인 남성의 여성화는 여성의 남성화에서 야기된 후속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았다. 가장 합리적이라는 국가들이 성의 차이를 가장 많이 소멸시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470]
➜ 각자의 역할이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기존의 것들을 혼합시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창조적이지만은 않은 가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내가 성자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둑질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나는 동양으로부터 아무것도 차용할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488]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 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490]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물론 그러한 참여가 나에게 무척 어렵게 여겨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수 없는 그럴듯한 구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무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내가 아마도 본질적인 어떤 것을 단념하고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다. 나의 부적격성에 대한 이러한 깊은 인식은 적극적인 행위의 결여를 대체한다. [491]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을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하다. [491]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精髓)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부처는 인간 의식의 우주진화론적인 위엄을 파악하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누군가가 의식의 빛을 꺼버린다면 세계는 ‘무(無)’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495]

낮이 잊어버린 신화를 밤이 계속 이야기하고, 의식이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고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축소시켜버린 그 거대한 모습들을 시인이 다시금 일깨우고 선견지명으로 살려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또한 ‘변화된 모양으로’ 사색적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새로 인식되는 법이다. 위대한 과거의 것들은 우리가 착각하듯 죽지 않고 단지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모양은 작지만 힘은 강력한’ 위장된 카비르가 새 집으로 옮겨간다. [500]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제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주관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508]

나는 인생에서 많은 여행을 했고, 로마에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도시의 인상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느꼈다. 이미 폼페이만 해도 벅찼는데, 그 인상들은 나의 수용능력을 거의 넘어서다. [509]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이미 폼페이에서 예기치 못한 사물들이 인식되었고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음이 제기되었다. [510]

1949년 이미 고령에 이르러 내가 그동안 미뤄두었던(로마여행-옮긴이)을 뒤늦게 해보려고 했으나, 차표를 사자마자 나는 기절해버렸다. 그 후로 로마여행 계획은 단호히 접어두고 말았다. [510]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525]

이제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527]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7]
➜ 덧붙이려고도, 애써 깎아 내리려고도 하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부정적일게 무엇이 있으랴...

사람이 개성화의 길을 가는 중에, 즉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원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527]
➜ 완전한 길이 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뺄 수 있을 것이고 그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대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사건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528]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28]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화롯가에 앉아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유쾌하게 유령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533]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우주만물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지적인 문제에서 제외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거기에 관한 어떤 관념이, 예를 들어 꿈이나 신화적인 전승을 통해 나에게 제공된다면 나는 그것들을 기록해둘 것이다. 심지어 그것으로 하나의 견해를 짜내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 견해가 언제나 하나의 가설로 남고, 그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더라고 말이다. [535]

인간은 사후의 생에 관한 견해를 짜내거나 묘사하는 데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자신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형으로서 우리 인생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덧붙여야 마땅한 신비로 가득 찬 삶이다. [535]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이것 역시 조건부이긴 하지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536]

회피할 수 없는 질문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이에 답해야 한다.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선회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無)’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542]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단일성과 무한성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552]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556]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만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후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신화와 관련하여 꿈이 주는 약간의 암시나 이와 비슷한 무의식의 자발적인 발현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물론 이러한 암시에 인식이나 증거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신화적인 확충에 적합한 기초로 이바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탐구하는 지성에게 그 생명력에 불가결한 주변의 여러 가능성을 마련해주고 있다. [558]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세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경직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단일성과 무한성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 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60]

나는 양쪽 다 옳다고 생각한다. 서양인은 의미를 투사하여 객체에 의미가 있는 듯이 추정한다. 동양인은 그 의미를 자신 속에서 느낀다. 그런데 의미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법이다. [560]

추측하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문제는 내가 생의 마지막에 빈손으로 서 있지 않는 것이다. [561]
➜ 삶의 마지막에 내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못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562]

나는 또한 대답이 요구되는 하나의 물음이 개인적인 성취를 통해 세계 속에 생겨나게 되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내가 제기하는 물음과 대답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 카르마를 가진 누군가가(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만) 보다 완전한 해답을 주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어떤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한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는 수백 년 동안 휴식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고 있다가 그와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새롭게 과제에 임하여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의 과제를 다 마칠 때까지 사람들이 이제 얼마간 휴식시간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563]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565]

내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어떤 원인으로 내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는 격렬한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이 충동은 내 본질의 무척 확고한 요소다. 이와 같이 굶주린 본능은 무엇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기 위해, 또한 그것을 넘어서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적은 암시에서 신화적 표상을 찾아내기 위해, 이를테면 의식을 만든 셈이다. [567]

소위 콤플렉스가 분리되어 나타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콤플렉스 자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격체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예컨대 정신병자의 목소리가 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568]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표상들은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현실과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 [571]

무의식의 통합성은 나에게는 모든 생물학적·정신적 현상의 고유한 영적 인도자로 여겨진다. 그것은 총체적인 실현, 즉 인간의 경우 전적인 의식화를 추구한다. 의식화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이며, 그리하여 자기 인식은 이러한 과정의 정수이며 핵심이다. 동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자기’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고대 기독교의 관점에 따르며 자기인식은 신인식(神認識)에 이르는 길이다. [572]

인간의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572]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 무의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573]

오로지 삶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찌해서든지 증가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는 시기에는 자신의 단일성과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단일성과 유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의식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군중과 정치권력의 열광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과의 망상적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573]

우리 시대는 모든 강조점을 이생의 인간에 두어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신들림이 초래되었다. 독재자들이 출현하고 그들이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영리하기 그지없는 지성인들의 근시안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내세적인 것이 박탈된 데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간은 무의식성의 제물이 되어버린다. [573]

인간의 과제는 이를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식을 형성해가야 하는 그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574]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선과 악(또는 불완전함)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며 특유한 심리적결과가 뒤따른다. 다른 데서 내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행해지거나 의도되거나 생각되는 온갖 잘못은 세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응징할 것이다. [580]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방성에 대하여 우리는 도덕적 형태를 갖춘 인도철학의 ‘네티 네티(neti-neti : '아니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부정의 부정, 즉 부정을 통한 긍정을 시사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철학 이래 ‘절대’는 ‘네티 네티’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한다-옮긴이)’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윤리규범은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양(止揚)되고,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런 생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리학 이전 시대에도 이미 ‘의무의 충돌’이라는 말로 늘 제기되었던 내용이다. [581]

하지만 개인은 보통 자신의 결단능력을 결코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황스러운 가운데 의지할 수 있는 외부적인 법과 규정을 자꾸만 소심하게 찾고 있다. [581]
➜ 나의 결단 능력을 믿을 수 있다면 자꾸 밖에서만 그것에 맞는 근거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다 가능성으로서는 진실이다. 사람이 원래 그래야 하듯이, 자기기만과 자기착각에 빠지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전자나 후자를 완전히 모면할 수는 없다. [582]

자기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 요인으로, 우리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좌우된다. 그것은 무의식과 그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떤 최종적인 판단도 없다. 우리는 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를 인식은 하면서도 붙잡을 수는 없고 그것에 합리적인 한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의식을 확장해주는 학문을 통해서만 자연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와 같이 심화된 자기인식 학문, 즉 심리학을 필요로 한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광학지식 없이 이른바 손목이나 좋은 의지만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583]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83]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584]

해결은 대극의 대립과 쟁투에서 나오므로 그것은 대개 의식에 있는 것과 무의식에 있는 것이 섞인, 깊이를 알 수 없는 혼합물, 그러니까 일종의 상징이다. 쪼개진 동전의 반쪽 조각이 꼭 들어맞는 것과도 같다(고대 풍습에 따르면, 친구와 헤어질 때 ‘후대의 표시’로 동전을 쪼개어 각각 그 반쪽을 가졌는데, 원해는 그 쪼개진 동전을 가리켜 ‘상징’이라고 했다고 함-옮긴이).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협동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다라 형태 속에서 신의 표상과 닮은 형상을 얻게 된다. 이러한 신의 표상은 아마 통합성관념의 가장 단순한 설계도일 것이며, 대극의 쟁투와 화해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일 것이다. [589]

우리의 정신은 세계구조로부터 조성된 것이다. 큰 것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의 가장 작고 가장 주관적인 것 속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의 표상은 항상 강력한 맞상대에 대한 내적 경험이 투사된 것이다. [590]
➜ 어떤 큰 무엇인가가 아니어도 제대로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강력한 내적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구나.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법이다. [594]

통찰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색은 의미가 없다. 사색은 예컨대 물병자리 시대의 경우처럼 객관적 자료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 [596]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596]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신과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모두 인간적이며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다. [597]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영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착상’이 우리가 궁리해낸 결과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로 스며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597]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표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598]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그럴듯한 비밀의 필요성은 원시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사회적인 단계에서 비밀은 개별 인격들의 결속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상하는 데 의미가 있다. 개별 인격은 타인과의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감으로써 반복해서 분열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는 개체가 되려는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오랜 수련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통과의례를 거친 우수한 개체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동체 역시 사회적으로 분화된 정체성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무의식적인 정체성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601]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한 ‘야곱’은 천사가 더 강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천사가 야곱과 싸운 후에 다리를 절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이다. [604]

우리는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진실로부터 아무것도 제거하지 못한다. 새로운 이름이 일종의 부정의 뜻을 담고 있다면 기껏해야 대상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될 뿐이다. 반면에 인식할 수 없는 것에 긍정적인 명칭을 붙이면 거기에 상응하여 긍정적인 태도로 바뀌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을 원형이라 지칭한다고 해도 그 고유의 본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진술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이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는 우리의 마음에 이름을 올리게 되며, 결코 의식의 발명품으로 여겨질 수 없게 된다. 신은 이로써 제거되거나 폐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험 가능성에 근접한 위치로 옮기게 된다. [609]

나는 다른 분야에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다른 분야의 지식을 내 분야에 유용하게끔 만들고자 시도할 뿐이다. 물론 그런 지식의 응용과 결과에 관해 보고하는 일은 나의 의무다. [611]

우리는 한 분야에서 인식한 것을 다른 분야로 옮겨와서 실제로 응용해볼 때 소위 발견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X 광선이 물리학적 발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의학에서 응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방사선 치료가 경우에 따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그것은 의사로서는 관심을 갖게 되는 사안이지만 물리학자에게도 당연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물리학자는 방사선을 전혀 다른 방식,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의학자가 그에게 X 선 촬영의 해롭고 유익한 어떤 성질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고 해서 자신을 질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611]

예컨대 내가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통찰을 정신요법분야에 응용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전문분야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때하고는 다른 조명을 받으며 드러날 것이고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612]

마음의 역동성 밑바닥에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넒은 의미의 대극문제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심리학적인 토론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들은 당연히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특징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제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기서는 더 이상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학적 근거와 의미에서 고찰되는 것이다. [612]

정신의 제한성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꼭 정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과 인식이 관련되는 한 우리는 정신을 넘어서 볼 수는 없을 뿐이다. 비정신적인, 초월적인 객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 자연과학은 묵묵히 확신하고 있다. [614]

정신이 늘 자신에 관해 진술한다 해도 결코 자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모든 이해와 모든 이해의 대상은 정신적인 것 그 자체이며, 그만큼 우리는 온통 정신적인 세계에 어쩔 도리 없이 갇혀 있다. [615]
➜ 우리가 정신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되는대로 말하는 것, 즉 충분한 근거 없이 진술하는 것은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진술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경우에도 정신 역동적 근거라는 것이 관련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주관적이라 부르고 단지 개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사람들은 그 진술 이 진정으로 개별적인 주체로부터 나왔고 오로지 개인적인 동기에서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역동적 ‘유형’에서 솟아나온 것인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실수를 범하고 있다. [616]

이를테면 후자인 경우,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객관적인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정해지지 않은 수의 개인이 내적인 충동에서 동일하게 진술하고 각자 어떤 하나의 견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원형은 단순히 비활동적인 형태가 아니라 특수한 에너지를 갖추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진술의 동인(動人)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진술의 주체로도 이해될 수 있다. 개인적인 인간이 그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 그 개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진술이 저지되거나 무시되면, 의사로서의 경험이나 마음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이 보여주듯 정신적 결핍현상이 생긴다. 개인의 경우에 그것은 노이로제 증상으로 나타나고, 노이로제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관련되었을 때는 집단적인 망상(妄想)형성이 발생한다. [616]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진술들은 이성적으로 논증된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반론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세계상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세계상이란 레비 부륄이 절절하게 명명한 대로 ‘집단표상’인 것이다. 확실히 자아와 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가 심리학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617]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 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620]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623]
➜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욕심만 버려도 오히려 얻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623]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교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객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625]
➜ 제대로 된 공동체는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주고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모두 동일시하려는 것을 목표로 두지 않고 서로의 개성을 조화롭게 구성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두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625]

나는 한 번 도달한 곳에 결코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의 환상을 맞아들이기 위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625]

나는 언제나 내적인 법칙을 따라야 했다. 나에게 부과된 그 법칙은 내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 법칙을 항상 따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일관성 있게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626]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8]
➜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이 만족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

나 자신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형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629]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 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629]
➜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뿌리를 든든히 잡고 있다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운을 지니고 있다. [629]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630]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630]

편집자의 말

나에 관한 책은 항상 일종의 숙명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나 자신으로 하여금 미리 어떻게 쓰도록 한다든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자서전도 지금 벌써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을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온다. 그러나 내가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633]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635]

항상 그랬듯이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그 결과 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네. 아마도 ‘외적인’ 경험들은 한 번도 실재가 된 적이 없거나, 아니면 단지 나의 내적 발달단계와 일치할 때만 실제가 되었을 것일세. 내 존재의 이러한 ‘외적인’ 발현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나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네. 그것은 내가 모든 정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들에 참여했기 때문인 듯이 여겨지기도 하네. [636]

학자로서의 융은 경험론자인 셈이다. 융이 회상록을 위해서 개인적인 종교적 느낌과 경험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이 그의 주관적인 경험의 여로를 기꺼이 따라오리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융의 주관적인 진술이 자기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들 마음속 신의 형상은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641]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글로 써온 내용의 정수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노력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i)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643]

3. ‘내가 저자라면’

 한 인간의 정신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 자서전에는 자신의 사상과 분석심리학을 형성해가는 융의 삶이 서술되어 있다. 자신과 수많은 환자들의 꿈과 환상을 분석하면서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는 신호들을 포착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며, 새로운 정신의학의 길을 개척해 가는 과정,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신화와 환상을 통한 인간 마음의 접근, 정신의 불멸과 맞닿은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탐색, 연금술의 발견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는 융의 자기실현의 역사가 그대로 펼쳐지고 있다.
그는 생생하게 남아있는 모든 기억은 마음을 불안과 격정으로 몰아넣는 ‘정신적인 경험’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인생에서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희미해지고 내적 경험에 관한 회상은 점점 더 생생해지고 다채로워진다. 때문에 그의 자서전은 외적 사건보다는 내적 흐름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 꿈에 관한 것이다. 융은 인간은 의식할 수 있는 ‘의식’층과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층이 있다고 한다. 그 무의식의 대표적 형태가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억으로 시작하여 유년시절의 기억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다음에는 그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꿈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꿈 중에 누군가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이나, 세계대전을 암시하는 꿈과 같은 것들은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 그 꿈들이 맞아 떨어지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라고 말하는 그는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 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 걸렸다고 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렇게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을 재료로 삼아서 말이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는 경이롭다. 인간 영혼의 상처에 주목하고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으로 들어간 융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정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보완을 한다면 꿈을 분석하는 과정이나, 유년시절부터 겪었던 중요 사건들에 심리학 이론을 덧붙여 설명을 한다면 부가적으로 심리학적 지식을 생생한 예와 함께 얻어갈 수 있어 책의 내용이 보다 풍부해질 거라 생각된다. 또한 집단 무의식과 원형에 관한 개념을 설명하는데 있어 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신화와의 연결성에 대해서도 보다 깊게 설명되었다면 신화를 외면하고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가 신화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자라면 무의식의 흐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기 보다는 어떤 경험들이 일어났을 당시 내가 지각한 무의식의 흐름과 내면을 설명하고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쌓여서 어떤 부정적 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깨닫게 된 나의 부정적 기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방식들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써보면 좋겠다. 단지 나만의 경험이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위에서 쉽게 경험해 볼 수 있는 내적 갈등에 관한 몇 가지 주제를 정해놓고, 거기에 관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 겪게 되는 내적 흐름과 갈등들을 어떻게 극복했으면 그로 인해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를 쓰고, 각 에피소드마다 그에 해당하는 심리학 이론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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