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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4일 09시 27분 등록

1.    작가에 대하여

러셀은 1872 5 18일 영국 웨일스에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으로서의 낙인, 이런 환경이 버트란트로 하여금 홀로 고고함을 견지하게 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게 함으로써 항상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성향을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귀족과 특권계층을 존중하는 영국의 전통 관습이 자유분방한 발언과 행동을 가능하게 했고, 어떤 고난과 불행에도 굴하지않는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당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영국 휘그당을 만들었던 멤버 중 하나였고, 당시 영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던 수도원 해체, 명예혁명, Great Reform Act에 참여하였다. 러셀의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부모님은 극단적인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산아제한의 지지자들이었다. 러셀의 어머니와 동생 레이첼이 러셀이 어린 시절에 사망함으로써, 러셀은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된다. 할머니인 러셀 백작부인은 청교도이자,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독일과 스위스의 부인을 가정교사로 고용했으며, 이것 때문에 러셀이 어릴적부터 영어와 독일어를 동시에 하게 된 것이다. 러셀이 가졌던 사회 정의에 대한 시각은 할머니의 영향력이 컸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는 사건으로 10대에 충격이 컸던 러셀은 여러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형 프랭크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면서 그의 삶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러셀은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또한 러셀은 정치, 사회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1896년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1902년에는 Fabian sociey coefficients dining club안의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1903년에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저작을 발간하고, 이는 논리주의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게 된다. 1905년에는 철학 저널 에세이를 싣고, 이후 화이트헤드와 함께 <Principia Mathematica>를 출간하며 수리철학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0년에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어 그의 제자가 된다. 수학자이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그리고 사회비평가이다. 러셀은 그의 긴 인생을 통하여 희생자들, 힘없는 늙은이들, 그리고 고독과 빈곤으로 괴로움에 넘치는 전세계 등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보려고 노력해왔다. 말년에 그는 혹시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한번 그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위대하고 완성적인 삶을 살아온 그였다.
 
russel.jpg

<서양의 지혜>를 통해서는 러셀을 많이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해 천재인가 광기인가?’라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그는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그의 다양한 분야의 저서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자신의 머리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의 줄에 줄줄이 꿰놓은 색색의 보석들처럼 철학의 역사를 꿰어 놓은 보배가 바로 <서양의 지혜>였다. 러셀이 앞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철학자 각각, 혹은 철학 성향 하나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집필해 놓은 책들은 굉장히 많지만, 이렇게 개괄적으로 철학 전반을 설명 해 놓은 책은 드물다. 나름 읽는 이로 하여금 알기 쉽게 적으려고 노력한 러셀이었겠지만, 역시 철학과 전혀 친하지 않았던 나와 같은 철학 초보가 시작하기에 철학이란 학문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철학의 역사적인 흐름과 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유명 철학자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라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내린 러셀에 대한 결론은 그가  천재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1)     Ko.wikipedia.org/wiki/버트런드_러셀

2)     <서양의 지혜/철학이란 무엇인가> 중 러셀의 생애와 사상

3)     www.mcmaster.ca/russdocs/rusell.htm

4)     En.wikipedia.org/Bertrand_russell

5)     사진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머리말 :::

인물과 장소와 문서의 삽화를 모아서 실었는데, 가능한 이에 해당하는 시대의 자료에서 고른 것이다. p11

철학사를 저술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주장할 만한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간결함과 동시에 광범한 기술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 전문화가 심화되어 가는 현대의 경향을 볼 때, 사람들이 자칫 지적인 면에서 조상의 은혜를 잊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법. 하나는 철학사가 전적으로 해설적이어서,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저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설에 어느 정도의 비판을 더해서, 철학상의 논의가 어떻게 나아갔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이 책이 선택한 방법)

칸트는 논박되는 것보다 오해를 받는 것이 더 무섭다고 했다. p12

이 책을 통해 독자가 문제를 더 추구하고 싶은 생각이 생긴다면, 이 책이 노린 효과는 이미 달성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p13

::: 프롤로그 :::

이 사색적 활동은 하나의 탐험이며, 다른 것들 사이에서는 철학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다양한 과학 분야는 철학적 탐구에서 시작된다. p14

미지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책을 바탕으로 신비적이거나 다른 근원적인 영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명확한 지식이 존재한다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이런 식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정의 내릴 수 없다.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철학을 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은 점쟁이가 이미 준비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탐구하고 때때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과업이다. p15

이른바 지혜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혜란 단지 무의미한 광기란 말인가.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p16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누군가가 하나의 총괄적 의문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

è  처음 의문을 가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이것이 비판이 되기도 때론 회의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맨 처음 이와 같은 호기심을 분명히 나타낸 국민은 그리스인이었다. p18

중요한 것은 종교의 기능이 지적 모험심을 자극하는 데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종교 면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복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별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도, 이와 관련이 있는 마법이나 점술의 풍습도 이런 목적을 위한 것들이었다. p19

식민지가 생기면서 교역이 발전하여 그리스는 다시 동방과 새로운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도리아인 이후의 그리스는 왕권이 시작되는 변화를 차례로 겪었다. 권력은 서서히 귀족 계급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에 이어 비세습적인 군주 또는 참주가 나타났다. 결국 정치 권력은 시민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를 뜻했다. p21

종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면서도, 남을 황대하는 고루한 풍습은 뿌리가 깊었다.

한편에는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다. 전자는 철학,과학,예술을 낳았고, 후자는 풍년 기원과 결합된 비교적 원시적인 종교 속에 나타난다. p22

오르페우스의 교리는 금욕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으며, 정신적인 무아지경을 강조한다. 그는 이에의하여 종교적 열광’, 즉 신과의 교신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이렇게 해서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는 신비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강력한 정감과 열정에 뒤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늘 동정이 갔다.

그리스인들이 이와 같이 신비적 요소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유는 과학적인 이오니아학파(밀레토스학파)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p23

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이 삶의 한 방도였다. 그리스어로 사색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무엇인가 보고 돌아다닌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리스 철학의 밭낭에 있는 근본 사상은 로고스이다. 이것은 특히 규칙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p24

살아남는다고 하는 문제는 첫째로 인간이 자연의 힘을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5

그리스 철학은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이원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원론의 모든 바탕에는 진위의 구별이 가로놓여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반되는 학설간의 시소전을 잘 관찰하여, 헤겔은 처음으로 변증법이라는 관념을 도출해 내었다. p26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이 시작되었다. p27

그는 기하학의 규칙이 일반적으로 무엇에든지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보편성에 대한 관념은 독창적이며 그리스적이다. p28

자신의 손이 미칠 수 있었던 모든 착유기를 전세해 두었다가, 시기가 오자 자기 마음대로 값을 붙여서 이를 빌려주었다.

탈레스의 견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마치 공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의 물질이 여러 가지 집합 상태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로 지도를 만들었고, 또 흑해 연안의 밀레토스 식민지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탈레스의 우주론을 비판했다. p29

아낙시마드로스는 질료를 무한한 것’, 곧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무한의 물질이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세계가 생기고 결국은 그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공기는 사물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30

밀레토스의 유명한 사상가 중에서 셋째로 손꼽을 만한 사람은, 아낙시메네스이다.

그의 사고 방식에서 대담한 주장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 견해는 전체적으로 영속성이 있다.

그도 하나의 기본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공기라는 특이한 실체로 본다. p31

영혼이 이루어진 근원도 공기이고, 공기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처럼 세계를 살리고 있는 것도 공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피타고라스학파가 채택한 견해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은 넓은 의미의 지리학에 관한 논문으로 수립되었다고 한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

è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는 것이 바로 사유, 논쟁, 등이 아닐까?

신비주의의 무게가 사회를 조금도 압박하지 않을 경우, 과학적 사변은 진보한다. p32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모두 당시에 풍미하던 종교적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그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습관은 전체적으로 보아, 잡다한 도시 국가의 기성관습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의 국가 종교와 충돌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섬의 전통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본토 도시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다. p33

어쨌든 그(피타고라스)는 폴리크라테스의 압제를 견딜 수가 없어서 사모스를 떠났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이던 크로톤에 정착했다. p34

철학적인 생활 방식이야말로 존재의 우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희망을 주는 것으로, 혈통의 우연에서 도피하는 길을 제공한다.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영혼은 일련의 윤회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이론의 진정한 계승자들은 수학자들이었다.

이런 생활 방식에서 정화의 역할을 강력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음악이다.

피타고라스는 이른바 음정의 단순한 수적 관계를 발견했다. p35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에서 수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수적 구조만 파악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이는 실로 중요한 개념이다. p36

그는 점이나 자갈을 나열하여 수를 나타내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라틴어로 계산이란 말은 자갈을 다루는 법이란 뜻이다.

기하학에서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빗면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유명한 정리를 발견했다. p37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무한한 공기는 단위를 명확히 해두어야 할 대상이며, 단위는 무한한 것에 규칙을 부여한다고 한다.

수학자가 삼각형에 대한 정리를 증명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딘가에 그린 그 어떤 도형에 대해서 아니라,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도형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p38

전통적인 여러 신을 향하여 계속 악의적인 공격을 가한 사람은 크세노파네스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오르페우스 부활의 신비주의에 반대하고 피타고라스도 조롱했다. 그의 철학적 전통을 이은 사람은 이오니아인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p39

귀와 눈이 있어도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쓸모 없는 증인이다.

신은 어른이 어린아이를 부르듯이 인간을 아기라고 부른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로 다투는 대립물들은 무한한 것으로 돌아가 서로 침범하던 것을 보상한다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조화의 관념을 낳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조화의 요소에서 새로운 이론을 전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한 발견이며, 철학에 대한 공헌이다. p40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조화는 겉으로 나타난 조화보다 뛰어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런 교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무엇도 동일하지 않다. ‘자네는 두 번 다시 독 같은 강물에 뛰어들 수 없다.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후세의 논자들이 만물은 유전하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헤라클레이토스가 해싿고 여기는 것도 이런 실례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헤라클레이토스학파를 유전파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p41

우리는 똑 같은 강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며,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 헤라클레이토스

우리의 존재의 단일성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리막길이 없는 오르막길은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의 관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선의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p42

모든 자연의 운행은 그 규칙에 따른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생각한 것처럼, 부정은 대립물끼리의 다툼에서 찾을 것이 아닐, 규칙을 무시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정해진 일이 흔들린다는 관념과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연분수에 의한 무리수의 구성과 같이, 점근법이 교대로 올바른 값을 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결부시키는 일에는 우리의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 잇다.

지혜를 쟁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사물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p44

많은 것을 배워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지혜란 만물에 공통된 이 기본 공식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 공통된 공식은 도시가 달라지고 그 볍률이 달라져도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p45

(헤라클레이토스)는 강력한 사상가로서 전 시대 사상가들의 유력한 개념을 모아 플라톤에게 영향을 끼쳤다.

여러 가지 이론의 공통된 특징은 어느 경우나 하나의 원리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과업을 시도한 비평가는 파르메니데스였다. p46

그는 모든 사물은 그 어떤 기본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텅 빈 공간이라고 운운하는 견해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p47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이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의 전반적인 경향이다.

파르메니데스의 구체는 다툼이 끝나면 그와 동시에 세계도 끝날 것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과 상통한다. p48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생각이나 이야기의 대상은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말을 알기 쉽게 사용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고, 그 말이 의미하는 것도 그 어떤 의미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중요한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p49

유물론자들에 의하면, 이 실체는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불변이며 파괴할 수 없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 사이의 양극을 이루고 있다. 플라톤 외에도 원자론자들이 이들의 상반되는 두 견해를 종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으로 인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되었다. p50

엠페도클레스는 그때까지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세 가지 물질을 모두 채택하고, 거기에 제4의 물질을 첨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에 이들을 원소라고 했다. 이것은 물,공기,,흑으로 구성된 유명한 4원소 이론인데, 이는 약 2000년 동안 화학을 지배했다. p51

아낙시메네스는 이미 공기를 실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공기라고 부른 것을 에테르라고 불렀다. p52

원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다시 더 작은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이 작은 조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옮아가는 일은 없다. 이상이 완전한 엘레아학파의 유물론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빛이 진행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달빛이 간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p53

우리의 세계는 이 과정의 발전된 단계이며, 그것은 다시 적자 생존의 진화 원리에 지배된다.

건강은 상반되는 구성 요소의 올바른 평형 상태며, 질병은 그 중 어느 하나가 우세해질 때 생긴다는 이론을 이어받았다. p54

헬라스의 언어를 사용하던 모든 사람의 전통을 뛰어넘어 각 도시 국가의 풍습은 생생한 독자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발전은 독특한 변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구증가로 스파르타인들은 싫으나 좋으나 인근의 메세니아를 정복해야 했고, 메세니아족은 노예 인종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인은 군대 병영으로 변해버렸다. p55

모든 교육의 목표는 훈련된 병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병적으로, 감상적인 백성이 아니었다. 훈련은 엄했고 개인 감정은 억제되었다.

è  마치 지금의 북한을 보는 듯 하다.

여자들도 전반적으로 남자들과 똑같이 취급되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적으로 남성과 동등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스파르타를 본뜬 것이다. p56

è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여성과 남성들의 지위가 동등하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요소이다.

아테네의 세력이 강해지자, 스파르타는 테베와 동맹하여 아테네의 융성을 견제하려고 했다. p57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눈총을 받았고 바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아시아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만약 어떤 법률이 시대에 부합되지 않으면, 대중의 합의로 이를 개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법률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한, 사람들은 법률에 복종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는 내부의 질투와 분열적 개인주의 때문에 완전히 분열되어 국민적 안정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되었다. 델포이는 아폴로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였는데, 이 신은 이성의 힘을 대표한다. p59

올림픽 경기는 그리스인들이 육체에 가치를 부여한 살아 있는 표시였다. 이것은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인간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p60

기원전 5세기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지적인 실험과 발명이 둑이 터진 것처럼 갑자기 쏟아졌다는 점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문명은 전국에 걸쳐 참다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헬라스의 땅을 정복한 모든 민족을 정복했고, 오늘날까지 서양 문명의 뼈대가 남아 있다. p61

제아무리 좋은 시대라도, 유아독존으로 남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è  유아독존적인 생각이 어떤 형태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라서 어떤 면에서는 환영받을 만한 사고 방식일수도 있지 않을까?

물질을 무한히 분해할 수 있다는 가설은 흥미있는 일이다. p63

누스’, 즉 지성이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갈등에 대체되는 적극적 원리이다.

사물을 움직이는 것은 누스이며, ‘누스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생물과 무생물로 나뉜다. p64

시각이란 빛이 반대의 어둠에 침입하는 일이며, 매우 강렬한 감각은 고통과 불쾌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p65

정치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결국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는 것 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무리수의 무리라는 말이, 피타고라스에게는 이성을 빼앗긴, 아니 측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완전한 삼각형이란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다.p67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정확한 도형은 그릴 수 없다. 현실의 그 어떤 도형도 마음속 이미지의 충실한 모사일 뿐이다. 이것이 후기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 가운데 그 유명한 이데아 이론의 요지이다.

우리는 영혼을 악기의 현으로 보고, 육체를 현이 감겨 있는 악기의 몸통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기본 요소는 정육면체 모양의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겼다. ‘원소란 말 자체도 이들 후기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가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p69

아무런 크기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71

제논의 경우존재하는 것은 유한하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잘못된 형태의 후퇴적 논증은 사실 귀류법의 한 형식이다. p73

원자가 보통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작기 때문이다.

세계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은 원자의 재배열 때문이다.

아니다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정언적인 것으로, ‘나는 X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이다. 또 하나는 가언적인 것으로, 명령이나 희망 등에 사용 된다. p79

엘레아학파의 이론은 초기 유물론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이었다.

우리가 물질적 대상의 변화를 설명하자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가설적 구성 요소의 배열 변화와 관련해서 이것을 설명해야 한다.

원자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사람은 기원전 420년 무렵에 활약한 아브데라 태생의 데모크리토스이다.

150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않던 밀레토스학파의 의문에 대한 진지한 해답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로 한다.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p81

논쟁술과 변증법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논쟁을 일삼는 사람은 이기려고 기를 쓰는 반면, 변증가는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논쟁과 토론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면 궤변론자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실용주의의 창시자이다.

소피스트라는 말 자체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든 궤변론자든 대중에게 동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부터 철학 일반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면서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적 사고는 기존 습관이나 관습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날 철학자는 전통과 인습을 뒤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과 견해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 비타협자로서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p86

제2장   아테네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세 삶은 모두 아테네와 연관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아테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장려한 도시가 되어 해운과 무역의 중심은 물론,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모이는 곳이 되기도 했다. p89

아테네의 시민인 그는 돈이 거의 없었는데도 애써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즐거움은 친구들이나 남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이었고, 아테네 청년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피스트와는 달리 그 대가로 돈을 받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아무데서 멈추어 서고, 때로는 계속해서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겼다. p91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관심은 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식을 구하려는 일이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악을 저지르는 원인은 단 한 가지 무지에 있다.

과 지식의 연관성은 줄곧 그리스 사상의 특징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매우 선명한 유머와 통렬한 위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이러니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인데,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어에서의 삼가서 하는 말이라는 뜻에 가깝다. p93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를 현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델포이의 신탁이 언젠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정치가, 시인, 장인 등)의 무지를 폭로하면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사람의 지혜는 쓸모 없는 것이며, 자기처럼 자신의 지헤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95

언제나 자기를 인도하는 마음 속의 소리에 대해 언급한다. 이 내면의 소리는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금지는 해도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è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꽤나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듣는 편인 것 같은데, 내게는 주로 금지를 하기도 하지만, 더 끌리는 마음을 명확하게 들려주는 편인 것 같다.

정계에서는 그 누구도 오랫동안 계속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96

그가 마지막 몇 시간을 친구나 제자들과 함께 불멸을 논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면을 많이 차지하는 이유는 그들의 지위가 철학 역사상 가장 독자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옛날 철학자들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을 명확히 했다. 둘째, 그들은 각 시대를 통해 사람들의 상상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철학사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아마도 고금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실질적이었다. p97

이 교육 과정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을 경험 세계의 현상에서 배후에 가로놓인 불변의 틀로, 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생성에서 존재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학의 기능. 올바른 과제는 학생에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습관을 붙이게 해서 모든 문제와 관련된 규범과 기준을 이해시키는 일이다. p99

플라톤이 창립한 아카데미 :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암기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필요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장려되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이성의 빛에 비추어, 혼자서 사물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실용적인 사항에 숙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던 소피스트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세미나나 토론 그룹에서 학생이 풀도록 문제만을 제시하는 것이 상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과학적 교육이 정치가 정치 문제에서 사색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의 여부는 애초부터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플라톤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부 그리스가 성장하는 카르타고의 세력에 반항하여 자체의 힘을 유지하려면, 시칠리아 섬에 유능한 정치가가 필요했다. p101

플라톤은 그의 저서로 인해 세계 문학의 걸출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정작 자신의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떄문에 그의 철학은 주로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

후기의 대화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초기의 이론 몇 가지를 비판하고 있다. p103

플라톤은 철학 사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플라톤을 연구할 때, 수학의 중심적 역할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일찍부터 과학과 수학에서 벗어났다. p104

철학자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철학자란 진리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의견은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둘 다에 해당된다. p105

그리스어의 이데아그림이나 형상이라는 뜻이다.

철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동굴 안에 잡혀 있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사슬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몸을 돌릴 수가 없다.

동굴 안으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의 칙칙한 모습, 즉 단순히 그림자의 세계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햇빛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시야는 그 빛의 영향으로 희미해져서 이번에는 그림자를 보기가 이전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철학자라면, 이성과 진리라는 햇빛에 비치는 바깥쪽의 물체를 보게 된다. 이것이 실재이다. 우리에게 진리와 아는 힘을 주는 이 빛은 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p107

<국가론>은 아마도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 대화편에서 이상국가의 수립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론이란 이름이 붙었다. 우리가 이제 제시하려는 정치체계가 바로 이 이상국가이다.

그러나 하층 계급 출신이라도 뛰어난 자라면 지배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고, 관리자 자손이라도 무가치하면 병사나 하층 계급으로 내려 갈 수 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음악, 즉 뮤즈신이 지키는 예술을 가르쳐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는 체조’, 즉 팀이 필요 없는 운동을 가르쳐야 한다. 음악 교육 또는 교양 교육을 하는 이유는, 신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조촐한 식사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의사가 필요 없을 것이다. 젊었을 때는 불결한 것을 피해야 하지만, 일정한 연령이 되면 무서운 일이나 유혹에 맞서야 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데려가서 그를 낳은 부모가 누군지 모르게 하고, 집단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è  무섭다

정부는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p113

분명히 이 유토피아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커다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주권자들에게 영감이 되었다.

이상국가의 특징 중에는 물론 실제 스파르타의 상황을 관찰한 데서 온 것도 있다.

그 목적은 철 없는 군주를,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중요한 도시의 문제를 관리하기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사람으로 기르는데 있었다.

그것은 교육이 의외로 만능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이다. p115

무엇인가를 이룩하려고 생각하면, 공통의 목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바람직하냐고 묻는다면, 군주 정치일 것이다.

자립력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꾸려 나갈 필요가 있다.

정치 문제에서 이와 같은 고립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 세계는 더 넓은 참다운 조직체를 달성할 수가 없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만큼 독창성은 갖추고 있지 못했으나, 도시 국가의 지나친 개인주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사회 이론에서는 두 사람(소크라테스, 플라톤)에게 공통된 특징이 있다. 교육의 본질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이렇다. (……) 그들은 학문이 지식을 잘라 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능력은 개인의 노력과 이들 노력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지도자의 도움으로 얻어야 한다.

대학은 독립적인 정신 습관을 길러 주고, 시대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는 탐구 정신을 키워 주어야 한다.

용기가 없든 훈련을 받지 못하든, 독립적인 사고방식이 사라진 곳에는 선전과 권위주의의 독초가 멈출 줄 모르고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억누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사회가 통합해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국가에 맥 빠지고 깨지기 쉬운 획일성을 강요한다. 권력과 책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육이란 교사의 인도를 받으면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자 G.소렐은 철학이란 원래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친구의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p119

<메논>에서는 학습 과정이란 이전의 세상에서 외우고 있다가 그 후 잊어 버린 뒤에 이를 생각해 내는 것이라고 한다.

교육 이론은 학습이나 철학과는 달리 보통 회화에 그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 눈이 뜨였다거나 환기되었다고 보통 말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언어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단편적인 철학적 사고가 고인 곳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넓은 뜻에서 영혼의 치료였다. p121

이와 같은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지식과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다면, 무지는 자유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헤겔은 자유란 사람이 필연적인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대화 방식은 다른 그 어떤 형태의 저술보다도 문학적인 훈련을 저자에게 요구한다. p122

인간을 정의하자면, 이상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을 각각 의미하는 원이 교차되는 부분이 인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의 차이를 가진, 즉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p124

대화편에 나오는 논의는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집중한다.

대화편 중에서 아마도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모든 과학적 논증의 틀을 이루는 가설과 연역의 방법에 대한 기술일 것이다.

가설은 현상을 만족하게 설명하다는 뜻이다. 가설의 결과가 사실을 공평하게 다루고 있으면, 하나의 가설은 현상, 즉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물 그대로의 모습을 올바르게 설명해 준다. p127

변증법의 목표는 최고의 출발점, 의 형상에 이른다.

이론과학은 항상 보다 넓은 범위에 있는 보편성과 처음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여러 분야를 점차 통일해 가면서 움직인다.

가설과 연역 방법은 그 어느 곳보다도 <파이돈>에 가장 잘 기술되어 있다.

이데아론이 지식과 의견을 구별하기 위해 수립되어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 이데아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경험론이 한 일이다.

태연한 태도로 그는 독배를 들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음, 즉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 마치 하나의 치료법이나 되는 것처럼, 친구 크리톤에게 말하기를 아스클레피우스에게 장닭 한마리를 제물로 바쳐달라는 것이었다. p129

문제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이다.(……) 지식이란 아이스테시스라고 그(테아이테토스)는 말한다. 이것은 어떤 지각을 뜻하는 보통의 그리스어이다.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은 옳지 않다.

è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기본적인 것들 것 이해하기 위해서. ? 라는 질문을 말이다.

만일 지식을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설에 따라서 말하려고 한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31

무엇이든 한 마디로 설명되기 전에, 그것은 다른 것으로 녹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이란 기억의 인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이란 논증에 의해 지지된 올바른 판단이다.

논증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후퇴를 의미하고, 둘째는 정의상의 순환논법을 의미한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없으나, 전체의 분위기로 보아 약간의 잘못된 개념이 제거된다. p133

문제는 소피스트란 무엇인가를 정의하여 소피스트와 철학자를 구별하는 일이다.

낚시는 하나의 기술이며, 따라서 이 기술은 제1의 유개념을 구성한다. 우리는 이것을 생산의 기술과 획득의 기술로 나눌 수 있는데, 낚시는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획득은 이제 그 대상이 승낙을 하는 경우와 대상이 포획되는 경우로 나뉜다. 다시 포획은 공개적인 것과 은밀한 것으로 나뉘고, 낚시는 후자에 속한다. 잡히는 물건은 무생물이나 생물이다. 낚시는 생물에 관계된다. p135

운동정지는 확실히 둘다 존재하지만, 이들은 대립되기 때문에 결합할 수 없다 ., 결합의 가능성은 세 가지 있다.

같다는 동일성과 다르다는 차이는 존재와 같이 모든 것에 해당된다.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실존주의적 용법과 이 명제에 붙는 연결사적 용법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일정한 판단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어떻게 아는가? 답은 사물이 그렇다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것뿐이다.

플라톤 철학에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원자론과 수학적 물리학 양쪽에 직접 연결되는 변화의 이론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형상, 기본적 물질, 실체 물체, 이 세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현대 과학 최대의 전통적 선구자로 나타난다. 모든 물체를 기하학에 환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 인물은 데카르트이고, 그 방법은 다르지만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플라톤이 하려고 한 것은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기 위해 이 관점에 대한 로고스’, 즉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었는데, 그가 사용한 가설은 수학적이다. p139

오늘날 선을 하나의 점이 운동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 견해는 뉴턴의 유분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p141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양 생물학을 연구했음이 틀리없다. 이 분야에서의 그의 공헌도는 19세기까지 그 이상의 이론이 하나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매우 컸다. p142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교과를 쓴 사람이 된 셈이었다.

플라톤이 연극상의 최대 걸작을 썼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미건조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아리스트텔레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플라톤을 비판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분명한 것은 그가 플라톤의 수학적 철학에 공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적 사상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아마도 논리학일 것이다. 그 대부분은 플라톤에게서 빌린 것인데 플라톤의 경우에는 논리학 이론이 다른 많은 소재 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그것이 모아져서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p145

실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에서 문자 그대로를 번역한 것으로, 단순히 하층에 있는 물건이란 뜻이다. 그것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불변한다. p147

명사는 때에 따라 실사라고 불린다.

보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생물학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유기적이다. 보편적 개념은 사물이 탄생할 때 나타나지만,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p148

여기서 하는 설명은 중요한 한 가지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것은 어떻게 그리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의 분명한 한 가지 특징은 증명의 관념이다. p150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그의 형이상학과 결부된 많은 가정에 의존한다. 첫째, 모든 명제는 주어-술어 형식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명제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나뉜다. p151

중요한 것은 전제가 옳으면, 옳게 이끌어낸 그 어떤 결론도 옳다는 것이다.

포유동물은 날 수 없다. 모든 돼지는 포유동물이다. 따라서 돼지는 날 수 없다. 이 형식은 셀라렌토라 불린다. p152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 형식의 연구를 분석론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검사를 위해 풀어헤치는 것이 논증의 구조이다. p155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란 말이 독립적으로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말의 의미는 판단의 취지와는 다른 뜻에서 지식의 대상이다. 말의 의미일 경우는 직접 이해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대부분 근대 철학자의 특징은 학계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에게 모두가 불만이 있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과 결부된 모든 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생겼다. 이것은 그에게서 귀중한 것을 많이 배울 수 잇는 기회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불운한 사건이었다.

그리스어로 물리학이 자연을 뜻한다는 것은 상기해 볼 만한 일이다. p158

형상에는 그 자체가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한정된 의미에서 이 형상적인 면, 말하자면 배치가 있다. 둘째,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발사되는 것처럼 변화를 현실에 나타나게 하는 동인이 있다. 셋째, 변화가 달성하려 하고 있는 목표 또는 목적이 잇다.

동력인은 현대의 말투를 빌리자면, 단순히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인이라는 관념은 목적론의 흔적이 그 말투에 남아 있지만, 오늘날 물리학에 끼어들 수는 없다. p159

목적론적인 견지는 결국 우리의 자연 환경이 어떤 질서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는다.

목표를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합목적성은 이 분야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p161

우주는 의자나 테이블처럼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재의 뜻을 분석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공간에 대한 진술을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 중 가장 흥미 있는 것은 매체 안에서 물체의 속도가 그 매체의 밀도와 중량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귀류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세 가지 방법으로 나열하여 연속성을 설명한다. 첫째, 사물은 계속적일 수 있다. 다음은 계속적인 항이 인접할 때와 같이 사물이 접촉해 있을 경우이며, 마지막은 순서가 연속적인 사물이 실제로 그 경계를 공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p165

선이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만물이 노력하는 목표이다.

진리는 결국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다. 신의 형이상학적 지위는 전혀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일이 없고, 세계에 그 근원인 추진력을 주는 제1의 발동자이다.

윤리적 문제는 우리가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을 때 생긴다. p167

윤리적 생활을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운 발견보다도 오히려 이미 모아진 진리를 관상적으로 회고하는 데 역점을 둔다.

도덕적 덕목, 또는 인격의 덕과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주장한다. 우리의 행동은 부족하거나 지나치거나 해서, 어느 편이든 옳은 방향으로 향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자신을 얕잡아 봐서도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공정한 몫을 받는다면 정의는 이루어진다. p169

자기가 형제를 자기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다소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면이 있다.

국가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포괄적이며, 최대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보통 인간으로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자족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 노예 문제를 논하여, 자연에는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의 이원 대립이 있다고 본다.

어떤 뜻에서 이것은 노예 제도가 결국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모든 민족은 분명히 자기를 우등하게 보고, 이 문제를 자기 입장에서 다루게 된다. p171

è  민족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우등하게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이의 중 대부분은 경제적, 사회적 편견에 의한 것이다. 참다운 애정을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애정이 작용하는 범위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 소유권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정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열린 사유 재산권과 같으며, 소유자는 그 재물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이런 책임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이다. p173

대등한 자가 대등한 몫을 가져야 하고, 대등하지 않은 자는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생기는데 대등한 자와 대등하지 않은 자를 정하는 방법이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모든 일에서 자기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선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지는 자는 선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모방이다.

비극에서 사람은 실제보다도 위대하게 표현된다.

인간의 성격에 내포된 희극적인 요소는 특별히 해롭지는 않지만, 하나의 결함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예술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가 어느 정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75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카타르시스를 뜻하는데, 자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 영혼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에는 치료적인 의도가 있다.

인물은 플롯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플롯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p177

사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타입의 사건이 있다. 첫째는 운명의 급반전이며, 둘째는 플롯과 관련된 뜻하지 않는 사태이다.

피타고라스 시대부터 산술과 기하학은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학은 형상의 영역에 속해서 지식을 낳지만, 다른 분야는 기껏해야 의견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p179

유클리드는 이집트 왕한테서 기하학을 알기 쉽게 몇 시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유명한 말로 응답했다. p181

시대의 정세에 따라 사람들이 그 앞뒤 시대보다도 오히려 현재의 어떤 문제에 주목한다는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 이론의 공로와 잘못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 그리스인이 거둔 가장 눈부신 성공은 아마도 천문학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성과로서 가장 놀라운 것은, 태양중심설의 발견이다. p183

이 지식 중 대부분은 그 무렵의 종교적 편견과 충돌해서 이내 잊혀졌다.

하나의 견해에 확신을 갖고, 동시에 초연한 태도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이다. p185

그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수학은 이런 태도를 양성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알맞은 학문이다.

키츠가 진리는 미라고 하는 말로 표현한 정감은 철두철미한 그리스적인 개념이다. p186

제3장   헬레니즘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인에게 아시아 여인과의 결혼을 권고하고, 자기도 주자하지 않고 실천했다. p189

그리스어는 여기저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언어가 되었고, 급속히 발달하여 교역과 상업의 공통된 용어가 되었다. 그것은 최근 수십년의 영어의 위치와 거의 같다.

헬레니즘 시대는 고전 시대보다도 훨씬 미신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안정된 삶의 기반이 노예 인구의 증대에 따라 무너져가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산산조각이 난 잔해를 다시 규합할 만한 강력한 인물도, 주장도 나오지 않았다.

끝을 모르는 불안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여와 지적, 도덕적 쇠퇴를 가져왔다. p191

철학에서는 새로운 몇 가지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첫째, 만년에 그(안티스테미스, 소크라테스 제자)는 상류 계급의 삶을 버리고, 서민의 간소한 삶을 살았다.

키니코스학파의 가르침의 요지는 세속의 재물을 돌아보지 말고 덕에 집중하라는 것이고, 미덕만이 가치 있는 재물이라 했다.

유대감이 약하면 약할수록 상처를 입고 실망하는 가능성도 적어진다. p193

è  반대로 유대감이 강할수록 상처가 깊고 실망의 가능성도 커진다. 가족처럼 말이다.

문제는 철학적 회의자가 이 지식을 어디에서 생각해냈는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조심하는 것 이상 좋은 일은 없다고 건전하게 생각하면, 회의주의는 아무런 문제없다.

피타고라스학파나 엘레아학파가 오관의 신뢰에 의심을 던진 데 반해, 소피스트는 이에 가까운 관념을 자기들의 사회적, 윤리적 상대주의의 기초로 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상가 중 그 누구도 의심 그 자체를 중심적 논점으로 삼은 사람은 없었다. p194

낡은 사회의 뼈대가 붕괴해버린 시대에 사람들은 평안을 구했고, 평화가 손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자 피할 수 없는 곤란을 어떻게든 견디고 나서는 마치 훌륭한 일을 한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이 학원은 그가 가옥 부지 내에서 공동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외부의 복잡한 세계와의 충돌로부터 고립하려고 했다. 평생 에피쿠로스는 가벼운 병이 따라다녔으나, 이에 지지 않고 몸을 단련시켰다. 그의 가르침은 중심적인 요점은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최선의 선은 쾌락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사색적 삶을 무엇보다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트의 의무 중 하나는 바로 공공적인 일의 운영에 자진해서 참가하는 것이다. 플라톤 또한 이 의무감에 깊이 감동한 사람이다.

적극적 쾌락은 결여되어 있는 사물을 요구하는 원동력이며, 즐거운 목적을 향해 노력할 때 경험한다. 일단 그 목표에 도달하면, 이미 그 이상의 요구가 없어지는 곳에서 소극적 쾌락이 얻어진다. P197

사심을 떠나서 이해를 위해 노력하면 비로소 우리는 에피쿠로스가 구하고 있던 것처럼 자기 의식을 떠난 마음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가르침을 심한 유물론적인 관점이라 해서 멸시하고 있었다. 이 점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실제로는 검소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만큼 매우 큰 오해라 할 수 있다. p198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거부했기 때문에 필연의 철칙까지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크게 반대했지만, 신의 존재는 인정했다.

신은 상벌 어느 것도 내리지는 않는다. 즉 흩어지지 않는 평형 상태에 이르기 위해 사려와 절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다른 학파와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과학적 전통을 낳지 않았다. 그 자유 사상적 태도와 미신적 풍습 타파의 태도는 초기 로마 제국의 상층 계급 중에서도 특히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줄곧 존중되었다. p199

위험과 고뇌를 아랑곳하지 않는 용기와 물질적 환경에 대한 무관심이 스토아 철학자가 존중한 덕목이었다.

세계가 그 궤도를 달릴 때 적용되는 법칙은 역사의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지배하는 어떤 최고의 권위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신은 내재하는 힘이며, 그 일부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부에 살아 있다. p201

스토아 학설에서 핵심적인 요점은 어떤 의미에서 덕의 내적인 선이야말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물질적 소유물을 잃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까지 보상할 수 있으나, 자존심을 잃으면 인간 이하로 전락하고 만다. p203

(세네카)의 일생은 전체적으로 성격상 스토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은 방법은 그의 철학에 충실했다. p205

(아우렐리우스)는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했지만, 그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국고 거부가 귀찮은 부로하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는 아마도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는 항상 박해자의 약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것(명상록)은 시간이 나는 대로 군무나 공무 때 잠깐의 틈을 타서 철학적 명상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생득권이란 인간이 바로 그 인간성 때문에 특정한 물건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는 세계의 지적 작업장이었으나, 자유 독립 국가로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중동은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헬레니즘화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가 그리스 유산의 전수자가 되었다. p207

정치면에서 보면, 로마는 많은 점에서 그리스와 비슷한 도시 국가로 시작했다.

그러나 정복과 발전의 결과, 지배자 일족이 막대한 재산을 얻은 데 반해, 소규모 자유 소유권 보유자는 농토를 잃고 말았다. 그것은 부재 지주가 소유하는 대규모 보유지에서 노예 노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군대까지도 권력을 이용하기 시작하여 자기가 지지한 대가로 황금을 얻기 위해 권력을 휘둘렀다. p209

침입자가 개종자가 되어 교회는 어느 정도 그리스 문명의 지식을 간직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 로마는 거의 차용 문화였다. 로마 세계의 기술, 미술, 건축, 문학, 철학은 상당히 솜씨 있게 그리스의 훌륭한 표본을 모방하고 있다.

그리스 전통 중 불경하고 기이한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의 타락과 결붇외어 고대 로마의 미덕을 저하시키는 데 다소의 역할을 했다. 특히 해외 발전의 도래와 함께 많은 제물이 로마에 흘러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순수한 그리스 영향은 힘을 잃어 특히 로마 시의 귀족 계급에 속하는 소수의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철학은 영향력은 약했으나, 그 성격은 스토아적이었다. p211

로마는 세계관의 폭을 넓혔지만, 문화적 조상인 그리스인과 같은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전세계적인 정치와 문명을 꿈꾸고 있었다.

로마가 해낸 최고의 역할은 자기 문화보다 오래되고 뛰어난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법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철학상의 결의론도 고대로마 전통의 형식적 운용에 맞설 만한 엄격함을 가지고 있었다. p213

그러나 3세기까지는 낡은 윤리학을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새로 해석하는 방식(신플라톤주의)이 눈에 띄었다.

고대 철학은 종말을 고하고 중세 철학이 출발하게 된다.

황제(고르디아누스 3)는 젊고 경험이 부족한 데다 이유도 없이 부하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저서(<엔네아데스>)는 플라톤 저서의 광대함과 색채 모두가 결여되었고, 이데아론과 피타고르스학파의 몇가지 신화에 한정되어 있다.

시대의 무질서를 앞에 두고, 밝고 침착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거나 더할 나위 없는 강인한 사람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p215

로고스의 중심적 역할을 인식했다는 것이 그리스 철학의 위대함이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은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도, 본질적으로 신비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누스는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을 의미하며, 정신과 같은 것이다.

일자는 자기의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신비주의는 자연이 아름답고, 사물의 성질상 가장 좋은 것이라고 주저 없이 인정한다. 이 사물에 대한 관대한 견해는 후기의 신부주의자나 종교지도자, 철학자까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플로티노스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의 본질로 보고, 본질이 영원하므로 영혼도 영원하다고 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설명과 비슷하다.

영혼은 영원하지만, 그것은 누스가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영혼의 실체까지는 잃지 않아도 개성은 잃게 된다. p217

이와 동시에 로마가 멸망했을 때, 동방에는 처음에 비잔티움 아래에서, 이어 회교도의 지배 아래에서, 종교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철학적 전통이 계속 이어져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철학의 시작은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일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놀라움을 느끼는 이 능력이야말로 초기 그리스인이 이상할 정도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탐구와 조사라는 일반 개념도 서양 철학을 형성한 그리스인의 위대한 발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특색 중 또 하나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인 탐구자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해야만 했다. 새로운 화법도 만들어 내야 했고, 전문 용어도 일상 회화의 재료에서 따와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필요한 도구를 만들 때 그 도구에 맞는 표현을 먼저 더듬어 찾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p219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가가 정치 이론으로서 적절한 것을 잘 전개시키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스인의 실패가 뛰어난 지력에서 생긴 일종의 자만심 때문이었다고 하면, 로마인은 상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본질적으로 계몽과 해방의 운동이다. 정신을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스 철학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 수단은 로고스이며, 그 동경은 의 형상 하에 지식을 추구하려고 한 일이다.

è  이런 목적이라서 그런지, 철학이란 학문은 더 멋있는 학문인 것 같다. 어떤 다른 학문보다 가장 인간적이고,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할 수 밖에 없는 학문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p220

è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완전 공감한다. 훌륭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다.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삶일 것 같다.

제4장   초기 그리스도교

읽고 쓰는 일은 거의 독점적으로 교회 사람이나 성직자의 특권이 되었다.

과거의 전통으로 살아남은 것은 교회의 손으로 보존되었고, 철학은 그리스도교와 그 수호자가 통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학문의 한 부문이 되었다.

사제는 정통 신조의 수호자였으며, 서방에서는 교회가 여러 이단의 충격에 충분히 견뎠기 때문에 사제라는 지위는 크게 강화되었다. p223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대한 관념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이 관념은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악인은 지옥의 불로 떨어진다며 그 속에 인과응보의 요소를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p225

신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은 희생 의식 없이 지내야 했다. p226

유대 교도는 전체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거만했다. 이와 같은 점은 고전시대의 그리스인과 흡사했다. 그들은 단호히 자기들의 신 이외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p228

서방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 배척 감정을 무섭게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유대인은 그때부터 사회의 변두리에 살면서 19세기 해방에 이를 때까지 박해와 착취를 당했다.

다른 종파와 달리 유대인의 종파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신조에 이방인을 복종시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p229

그리스도교는 신자 한 사람이 자진해서 신도수를 늘리지 않았다며, 비정통적 유대인의 한 종파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è  지금 전도를 열심히 하는 그 문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이 한 사람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그 종파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놀랍다.

그들은 육식을 금하고 그 어떤 형태의 성도 모두 죄라고 선언했다. p230

한때는 그리스도교 자체도 가공할 만한 박해를 받았으면서 일단 권력을 잡자, 전적으로 같은 정도로 확고한 신념에 불탔던 소수파에게 광폭하게 대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p231

마르크스주의자는 제도적인 그리스도교에 동의하지 않고, 종교를 사람들의 아편이라 하며, 실용주의적 이유에서 이에 반대할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려 한다. p232

그 단계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암브로시우스)는 세속적인 삶을 버렸다. , 정치활동은 그만두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방제국 전체의 권력은 막시무스가 찬탈하는 지경이 되었다.

원로원에 잇는 그리스도 교파는, 암브로시우스와 교황 다마소스의 동무을 받아 우세를 차지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요구는 교회는 지상에서의 귀복을 얻기 위한 매개물이므로 국가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국가 권력이 당시에 얼마나 후퇴하고 있었던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p235

암브로시우스가 무장한 이방 민족 용병과 대결해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황제는 꺾이고, 아브로시우스는 교회 독립을 위한 싸움에 커다란 정신적 승리를 얻었다.

복음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로마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했다.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위해서 헤브라이어 자료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이는 마지막 시기에 유대인 학자의 도움을 얻어 진행한 과업이었다.

그가 쓴 대부분의 편지는 젊은 여인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녀들에게 덕과 순결의 길을 지킬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p237

è  지금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하고 있는 순결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순결주의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실시해보는 것은 어떨지

인간은 본질적으로 저주를 받은 죄 많은 존재로, 교회의 조정이 있어야만 구제된다. 그러나 종교 의식을 지켜도, 덕이 있는 삶을 보내도, 구원은 얻을 수가 없다. 신은 선하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구원을 준다는 것은 호의지만, 주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비난할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중한 일은 주로 신학에 관한 것이었다. 철학 문제에 관계되어 있을 때도, 그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가르침과 플라톤학파의 철학적 유산을 화해시키는 데 있었다. 그가 치밀한 사상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p239

무에서 생길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 정신의 과학적 기분과는 인연이 없었다.

이 범신론에 입각하면, 신은 세계다. 이와 같은 사상의 경향은 어느 시대에서나 신비주의적 편향이 강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 견해를 가진 가장 유명한 대표적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다.

현재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현재는 진실로 있는 오직 하나뿐이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서 살아 있고, 미래는 현재의 기대로서 살아 있다. p241

교회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킨다는 중심적 주제는 중세에는 매우 중요했으며 지금도 몇 곳에 남아 있다.

(보에티우스)를 유명하게 한 책 <철학의 위안>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쓴 것이다. p243

그것은 아테네의 세 철학자의 탁월성을 재긍정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보에티우스는 선하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을 따른다. 보에티우스는 선하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을 따른다. 그의 윤리학에 대한 가르침은 대체로 스토아적이고, 그의 형이상학은 곧장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의 특징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투옥되어 죽음의 선고를 받은 한 인물이 직접 썼다는 사실일 것이다.

오히려 그는 거의 고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문제의 한가운데에 서서 유능하고 냉정한 위정자로서 고트족의 군주에게 충성을 다했다.

해답은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이중적이다. 인간이 전통의 소산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전통은 이런 식으로 시간에 묶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 방식을 몸에 지니고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와 같은 시대 사람을 갈라놓고 있던 골을 의식했ㅇㄹ 것이다. p245

철학적인 문제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가? 한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시대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가?

사회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에는 그 어떤 상호 작용이 있다.

반면에 철학 문제는 그 배후에 있는 역사적 학식의 모든 재료가 없어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히파티아는 수학 연대기에 이름을 떨치던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p247

인격은 하나 밖에 없다는 관점이 우위에 섰다.

그러나 황제 유스티누스는 식견이 좁은 사람이었다.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음모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는 보에티우스를 감옥에 넣고 524년에 처형했다.

황제는 종교에 대한 관심을 배우자였던 유명한 테오도라와 나누었다. 이 귀부인은 평범한 과거를 가진 여자로, 그리스도 단성론 신봉자였다. p249

유스티아누스는 565년에 죽고, 3년 뒤 이탈리아는 새로운 이민족의 맹공을 받았다.

우리는 중세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새로운 사실 두 가지를 언급해야겠다. 첫째는 사쪽에 수도원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로마 교황권의 권력과 권위가 증대했다는 것이다.

설립자인 베네딕투스는 회원에게 빈곤과 복종과 순결의 맹서를 요구하는 교파의 회칙을 만들었다. 동방 교회 수도자의 지나친 금욕 생활은 베네딕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권위와 권력은 종신 임명을 받은 대수도원장의 손에 있었다. p251

그 무렵에 읽고 쓴다는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하는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단의 가르침은 교회를 계속 괴롭혔고, 교회 기준의 전반적 쇠퇴 때문에, 성직자의 삶을 지배해야 할 그리스도교 원리는 상처를 입기 쉬었다. 성직 매매의 폐습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실제로 약 500년동안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p253

è  지금 교회들도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이단의 존재’. 도대체 이단이란 단어를 정의 내리는 사람은 누구이고, 이들을 처벌하는 것 또한 누구인가? 결국 서로에게 이단이 되고 마는 것 아닐까?

로마 가톨릭교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그레고리우스는 불굴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마음이 약간 좁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제국이 지나치는 면이 있어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합치하거나, 이에 반대하면 위태롭다고 여겨지면 이를 눈감아주었다. p254

제5장   스콜라 철학

몇몇 학문이 특히 아일랜드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석진 수도원에서 소중하게 육성되고 있었다.

철학이 교회와 실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고찰하고 있는 시대에, 교황권과 세속의 권력이 나오게 된 그 주된 발전 추세를 대충 그려볼 필요가 있다. p257

정치 권력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교황권은 동방 교회가 자기 영역 안에서 강력한 존재로 있었던 것 이상으로 훨씬 강력해졌다. p258

충돌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주교를 이명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교황권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 그 지배권은 종교 개혁에 의해 무너졌다. p260

서방 교회의 성직자를 억제할 힘까지 소진하여 지방의 주교들은 다시 독립을 주장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스어의 지식은 대부분의 유럽에서 잊혀지고 있었는데, 멀리 떨어진 땅 아일랜드에는 남아 있었다.

요하네스는 자유 의지쪽을 지지하여, 덕을 목표로 하는 노력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한 것은 상당히 심한 그의 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논하는 방법이 단지 철학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이성과 계시는 진리의 독립된 근원으로, 겹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p263

참다운 종교는 바로 참다운 철학이며, 반대로 참다운 철학은 참다운 종교다.

요하네스는 그의 철학을 스콜라 철학의 언어적 의미로 볼 때 실재론자였다. 전문적 용어법인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 둔다는 것은 중요하다.

보편적인 것이 사물이며 특수한 것 앞에 온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것은 이름에 지나지 않고, 특수한 것은 보편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보편의 문제에 관한 실재론자와 유명론자의 싸움은 중세 내내 격렬하게 벌어졌다.

신 자신의 본질은 사람들에게나, 신 자신에게나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사네스는 이를 위한 논리적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신이 만물이기 때문에 인식자와 인식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인식 상태는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사물의 존재에 나타나며, 신의 지혜는 사물의 질서에 나타나고, 신의 생명은 사물의 운동에 나타난다. 이들은 저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해당된다. p265

성바울의 제자 아테네인 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논문의 저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당시의 교회를 둘러싼 큰 문제가 두 가지 있었는데, 성직 매매의 풍습과 독신의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돈을 받고 교회의 공직을 주는 일은 이와 같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재물과 권력을 주는 근원이 되었다. 이 습관은 결국 성직 임명 제도를 부패시키고 이따금씩 이 폐해와 싸우려는 노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제는 결혼을 하면, 차차 세습적인 제도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재물을 축적하는 경제적 동기까지 더해지면, 더욱 그렇다. 독신은 속세인과의 거리를 알리는 것이었다. p267

교황 니콜라스 2세 아래에서, 교령이 나가 교황 선거권은 사실상 추기경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황제는 전적으로 제외되었다.

다미아니는 신이 모순법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이미 행한 일을 되돌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창한 사람으로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교황은 황제를 퇴외와 파문으로 위협했다. 그런데 황제는 자기야말로 최고 자리에 있다고 선언했고, 교황쪽이 오히려 퇴위를 선언당했다. p269

그레고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책은 나중에 성공을 거두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의 존재론적 증명을 고안한 사람으로서 철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신은 최대의 사고 대상이므로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호메트가 선언한 새로운 종교는 몇 가지 점에서 신약 성서에 첨가된 신비주의를 떨쳐 버린 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일신교로 돌아갔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그도 우상을 금했으나, 그들과 달리 포도주의 사용까지 금했다. p271

이와 같이 종교적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수적으로는 약세였지만, 자기들보다도 더 문명화되고 신조가 이질적인 사람들이 사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새 왕조의 정책은 광신적 이슬람교 계급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었다. p272

페르시아 최대의 이슬람교 철학자는 아비케나였다.

그의 저서는 라틴어 번역을 통해 서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커다란 철학적 관심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 개념이라는 영원한 문제로, 이것은 나중에 스콜라 철학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사물 앞에는 신의 정신이 있고, 그것은 신이 사물을 하나의 틀에 따라 창조할 때다. 사물의 안에 잇는 것은 사물이 외부세계에 속해 있을 때만의 일이다. 사물의 뒤에는 인간의 사고가 있으며, 인간의 사고는 경험을 통해 유형을 구별한다. p273

황제는 서임식에 간섭해서는 안 되고, 그 대신 성직자는 세속의 재산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교황은 제안했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건한 제안보다는 이 세상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제안의 조항이 알려지자, 게르만 성직자들은 크게 난동을 부렸다. p275

그는 재산을 쥐고 있는 성직자는 천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명목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고집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17세기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사회처럼 자유 사상으로 기운 사고방식을 내세웠다.

스콜라 철학은 하나의 운동으로 결론이 사전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철학과는 다르다. p277

아벨라르는 사상가로서 더욱 중요한 인물이었다.

로슬랭보다도 정확하게, 그는 우리가 사건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갖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편적 개념은 사물끼리의 유사성에서 생기는데, 유사성은 실재론이 잘못 가정하는 것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13세기에 스콜라 철학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p278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에서는 시대를 몇 걸음 앞섰고, 정치 개혁상에서도 근대적이었던 프리드리히는 독립된 사상과 행동을 가진 사람이었다.

새로운 법전을 가져다준 하나의 개혁 시대가 도래했다. 무역과 상업은 모든 내국 관세 장벽의 철폐에 의해서 장려되고, 교육은 나폴리 대학의 설립으로 촉진되었다.

이단의 근절은 철저하게 이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완전히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사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후세 사람들이 마녀 사냥적인 방법으로 사상을 간단히 탄압할 수 없다는 것을 과연 배웠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역사는 후세 사람들이 이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p281

잉글랜드인도 잔다르크가 이와 같이 처분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런 이의도 제의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성직자가 철학적 영감을 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찾아냈다고 한다면, 13세기는 아리스톤텔레스가 개가를 올린 세기였다.

교회의 틀 안에서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철학적인 영향력으로서 완전하고 영속적인 지배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283

그들의 논증이 바로 우리를 그 논증이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학대전>의 위대한 체계는 지적 노력의 기념비이다. 서로 다른 견지가 언제나 분명하고 공정하게 기술되어 있다.

초기의 플라톤파 신학자의 경우, 이성과 계시의 이원적 대립은 철학 체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퀴나스 학설은 신플라톤주의의 이론과는 반대되는 가르침을 나타냈다.

신에서 시작해서 이데아를 지나 제일 아래의 특수 존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 조직이 있을 것이다. 로고스가 다리를 놓고 있는데, 더 실제적인 언어로 기술된 이 로고스는 매우 분별 있는 관점이다. 말에는 일반적인 뜻이 잇지만, 특수한 것에 사용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주의 방식은 일원론적 존재관을 가지면서, 인식 작용의 영역에서는 이원론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인식의 근원이 가정된다. 첫째, 여전히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이것은 오관의 경험에서 사고의 양식을 얻어온다. 스콜라 철학의 유명한 공식에, 지능은 감각의 경험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있다.

이성이 합리적인 지식을 낳는데 반해서, 계시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준다. p285

사람들은 추리할 수 있기 전부터 믿어야 한다. 이성의 진리는 자율적이지만,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계시의 문제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넘는 것도 신학적 요소 때문이다. p287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적어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그 존재는 정당화하거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토마스주의의 형이상학의 중심 논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런 활동은 유한한 대상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간에 다른 그 무엇인가로부터 나와야 한다. p288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자들 : 신학 자체를 고전철학의 의존으로부터 해방시킬 작정이었다. 동시에 철학은 신학적인 목적에 예속되어 있던 관계를 끊게 되었다. 철학적 사고를 자유롭게 하면서 함께 나타나는 것이 과학적 연구이다. p291

토마스 주의자들은 특히 수학을 몰랐다.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실험에 의존해야 한다.

본질과 존재는 일치하기 때문에 개체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아퀴나스의 견해와는 달리, 질료일 수는 없고 형상이어야 한다. p293

최고의 힘이 신의 의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안에서는 지식을 지배하는 것이 의지라고 둔스는 주장한다. 총회는 민중의 선거로 구성되어야 한다 p295

오컴의 면도날, 문제의 실재물은 물론 형상이나 실체 등으로 전통적 형이상학이 관련되어 온 것이다.

오컴은 존재가 개체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을 다루는 논리학의 영역에는 의미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 잇다는 것을 인정했다.

오컴은 이와 같이 철저한 유명론자다. 엄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뜻으로 보면 논리학은 언어의 기계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직접적이다. 한편, 논리학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말에 대해 운운한다면, 명사는 간접적이다. 논증에 사용되는 모든 명사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 주요하다.

토마스주의는 보편적 개념의 관념을 사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컴과 일치한다. p297

단테의 위대한 시는 중세의 견해를 요악한 것이다.

라틴어는 차차힘을 잃어 19세기 초기에 학자의 표현 수단으로는 모습을 감추었다.

단테의 정치적 사고를 다져볼 때 그는 강대한 제국 권력을 지지했는데, 그것은 당시에 제국이 초기 세력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p299

종교의 힘이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걱정의 근원이 되었지만 교의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자, 그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p300

루터는 스콜라 철학자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오컴을 존중하고 있었다.

각 나라 국어가 번성함에 따라, 교회는 철학과 과학의 지적 활동에 대한 지배력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 p301

è  언어의 힘이 이렇게 큰건가??

현대에 와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 통치라는 관념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1300, 교황은 성년을 선언하여, 이 해에 로마로 순례 오는 신도에게는 누구나 면죄부를 준다고 했다.

è  누구나??

인간으로서 그(보니파키우스 8)는 교회의 지배자에 어울리지 않게 돈을 사랑했고, 신앙 문제에서도 정통 신앙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 약탈과 같은 조치는 이단이라는 사실무근한 구실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느 교황이나 자기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추기경은 추기경대로 자기의 후계자를 골랐기 때문에 불화를 해결하기는 힘들다. p303

교회는 내부에서 자기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교황이 공의회 운동을 반대해서 더 잃지 않아도 좋을 교황권의 권위까지도 잃었다.

오컴은 신에게 절대적인 자유와 권력을 부여하고 있었는 데 반해 위클리프는 신의 필연적이며 신의 의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첫째 이유는 신앙이 충실한 일반 대중이 극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반해 교황이나 주교는 속물적 생활 양식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에서는 그(위클리프)의 가르침이 후스파의 운동을 고무시켰고, 이것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p305

그리스사상과 중세사상의 주요 차이점,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그리스인에게는 속죄나 구원과 간츤 문제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윤리적인 사고방식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비형이상학적이다.

그리스철학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세속적이었다. p307

철학은 종교적 기능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중세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되었다.

실재론적 이론은 사물을 관리할 때 신의 힘에 중요한 기능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명론은 훨씬 많은 여지를 준다.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플라톤 철학보다도 훨씬 그리스도교 체계와 조화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컴은 신앙을 합리적 연구와의 있을 수 있는 모든 연관에서 해방시키면서, 철학을 비종교주의로 되돌리는 길을 열었다. 16세기 이후, 교회는 더 이상 이 분야를 지배하지 못했다. p309

가능한 한 종교의 교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스콜라 철학은 가금 비상한 창의성과 예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런 과업이 거둔 원대한 결과는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이어받아 후세에게 전해 준 언어적 도구를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반면 스콜라 철학의 결함은 경험적 탐구에 충분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p310

제6장   근대 철학의 융성

중세기 쇠퇴기에서 17세기의 거대한 파도에 이르는 과도기에는 중대한 움직임 네 가지가 한층 눈에 띄게 된다.

첫째는 15,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다.

새로운 문화 운동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새로운 영향력이다.

이들 북쪽 나라들에서의 휴머니즘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동일한 시대에 일어나는데, 이것이 중세 세계를 바꾼 커다란 세 번째 힘이다.

개신교는 휴머니즘 영향 덕분에 보편적이 성직자라는 개념을 수립했다. 모든 사람은 신과 직접적인 접촉 관계에 있고, 그리스도에게는 교황도 사제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중요한 발전은 오컴의 비판으로 시작되는 경험적 연구의 부활에서 직접 나왔다. p313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코페르티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재발견이었다.

과학적 연구가 진보해서 생긴 사고 방식은 본질적으로 부활한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이다.

공업기술의 응용면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과학은 다른 종류의 위험을 만들어 냈다. p314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의 비판자가 되어 약간의 직접 빼놓고는 다루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초래한다.

과도기의 특징에는 특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활자를 사용하는 인쇄기가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 인쇄술은 낡은 권위를 뒤집어 엎는 데 도움을 주었다. p315

지식이 더 널리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지구에 대해 지난날보다 더 올바르게 보기 시작했다. p316

중세인에게 세계는 정적이고 유한하고 질서정연한 장소였다.

세계는 수학적인 틀에서 수립된다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오랜 견해가 되살아난다.

교회는 이단의 전파를 억제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잘 되어가지 않았다.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처럼, 현존 질서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전복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이견을 품는 사람에게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p317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다면, 이것은 중세라는 과거와 근대 사이에 약간의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활동 분야에서 중세의 사고방식이 갖는 한계는 이제 파기되어 가고 있었다. p318

한가한 상황은 이탈리아가 프랑스 국왕과 서로마 제국 황제의 싸움터로 변하자 돌변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는 심하게 분할되었고,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해 규합할 수 없게 되었다.

베네치아령 사람들은 조금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이 미개인의 손에 의한 패배를 맛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비잔틴 제국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319

르네상스 운동의 선두주자는 피렌체이다. 아테네 이외의 그 어느 곳도 이 정도로 균형을 이룬 예술가나 사상가를 낳은 곳은 없었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그 중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피렌체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출현한 갈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p320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위대한 시대라기보다는 특히, 플라톤 연구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도전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의 교리 체계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여러 가지 고대 미신으로부터 구출되지는 못했다.

수백 명에 이르는 기인들이 죄도 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물론 마녀 사냥은 현대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경쟁 상대나 적을 남몰래 해치우는 기술이 최고도에 이르고 있었다. p321

마키아밸리의 정치학에 관한 위대한 두 저서

<군주론>은 독재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과 수단을 연구하려는 것임에 반해, <로마사론>은 각종 형태의 지배하의 권력과 그 운용을 전반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었다.

마키아밸리적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비열하고 경멸적이라는 뜻을 띠게 되었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어떤 때는 우정을 가장하고, 어떤 때는 목숨을 없애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목적을 위해 놀랄 만한 수완과 외교술을 발휘했다. p323

(마키아밸리) 교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서 비난한다. 첫째는 성직자 거의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종교에 대한 민중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황권의 세속적, 정치적 관심이 이탈리아 국가 통일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p325

르네상스 이후로 사람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종교의 기능은 알프스 양쪽에서 차이가 났다. p326

기존의 종교적 전통과 완전히 단절할 수 없는 이유가 첫째, 마키아밸리도 지적했듯이 교황권이 이탈리아 국가 통일에 방해가 되었다고 해도, 교회는 어느 면에서 국교의 일부였다. 둘째, 신앙은 유사시에 근본적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깊은 확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p327

이 책<우신예찬>)에서는 인간의 약점에 대한 많은 조소 외에도 종교 제도와 주교들의 타락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인상 깊게 남은 분야는 교육이다.

그의 목표는 아카데믹한 전문가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독자 대중이었다.

그는 국왕과 아라곤의 캐서린과이 이혼에 반대하여, 1532년에 자리를 떠났다. 그는 앤 불린의 대관식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국왕으로부터 극심한 불쾌감을 샀다. p329

그는 런던 탑에 감금되어, 1535년에 재판을 받을 때 의회가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려 이 때문에 그는 처형되었다.

조난당한 선원이 섬나라 사회에서 5년동안 살면서 쓴 보고서 형식을 취한다.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관용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자유주의 방식이다. p331

종교개혁은 유럽에 영원한 종교적 분열을 가져왔기 때문에 관용의 관념이 널리 퍼져야 했다.

개혁을 구하는 움직임이 발전해서 분열이 된 것은 정치적 세력 때문이었다. p333

è  이익이 생기고 그 이익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되면서 분열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인가 보다.

예수의 가르침과 현존 사회 질서 사이에 중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 이라면 이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었다. p334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그때까지 진압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서, 새로운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할 수 없이 보증해 주어야 했다.

교리면에서 아우그스티누스학파에 속한 칼뱅주의는 루터의 복음주의보다도 엄하고 완강했다. p335

개신교는 세계 종교가 아니어서, 국가 정치 지배자의 보호가 필요했다.

실제 활동은 전도 사업과 교육과 이단 근절이었다. p336

이탈리아의 인본주의자들의 사상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수학적 전통이 새삼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6,7세기의 과학적 탐구의 눈부신 부흥을 가져온 중요한 발전 중 하나였다.

비례의 존재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완전함을 보장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인본주의 사상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알베르티였다. p337

수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어지는 몇 세기 동안 과학의 부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예술이 다소라도 수의 성질을 띠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졌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가장 명백하지만, 다른 예술에도 해당된다. p338

피타고라스학파는 신을 최고의 수학자로 보고 있었다. 인간은 어느 정도 그 수학적 기능을 사용하거나 연마할 수 있다면, 신의 지위에 한층 접근하게 된다.

철학 분야에서도 신플라톤주의적 성격이 다시 부각된다.

세계와 세계의 문제에 접근하는 이 새로운 방식은 스콜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숭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p339

르네상스에 생기를 준 원리 중 몇 가지로 되돌아가는 일은 가까운 장래에도 일어날 수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 철학에는 전체적으로 그다지 생기가 없었다. 한편, 학예 부흥의 전파와 책이보급, 특히 고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전통적 힘의 소생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 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위대한 과학 혁명

차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천문학의 기존 개념을 뒤집어엎고, 마침내는 현상의 뒤로 돌아가서 매우 일반적이고 강력한 가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태양중심설을 처음으로 부활시킨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였다. p340

결국 과학 운동의 커다란 발전이 주로 프로테스탄트 나라들에서 일어난 것은 국민교회가 과학 운동의 일원이 내세우는 의견을 억압하는 데 상대적으로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p342

행성은 태양에 접근하면, 궤도의 원격부에 있을 때보다도 빨리 움직인다.

현상의 올바른 설명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보통 분명하지 않은 관계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현상을 맹목적으로 기록하는 것도 가장 황당무계 한 추측처럼 과학의 방해가 될 수 있다.

물체를 계속 밀지 않으면 정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옳았기 떄문이다. p343

물체를 끊임없이 밀어주지 않으면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장애물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을 제거하면, 물체는 혼자서 계속 움직인다.

물체를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자유롭게 계속 움직일 수 있다.

역학에 대한 새로운 방식(갈릴레이)

첫째, 멈춤은 물체의 특정조건이 아니며, 운동은 자연적 조건과 같다고 가정.

둘째, 그때까지 여겨왔던 것처럼 원운동이 아니라 직선 운동이 특별한 의미로 자연적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물체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으면 직선으로 일률적인 속도를 내며 계속움직인다. p344

이러한 모든 발견은 오랫동안 품어온 편견을 뒤집었고, 정통 스콜라 철학자는 망원경을 비난했다. 망원경이 이와 같이 그들의 독단의 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p345

1687년에 나온 <자연 과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그는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설명하고

1법칙은 갈릴레이의 원리를 일반화해서 말한 것이다.

2법칙은 힘을 비등속 운동의 원인이라고 정의하여, 힘이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고 규정했다. 3법칙은 모든 작용에는 서로 동등한 반작용이 있다는 원리이다. p346

현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철학자는 그때까지 주로 추구한 면만을 논했다. 현상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소재가 없으면, 경험적 탐구는 여전히 불모로 끝나기 때문이다.

오르가논은 과학의 진보에 봉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오르가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p348

올바른 과학 연구에 대해 베이컨이 강조한 것은, 새로운 발견 방법 또는 수단이 이미 분명히 파탄한 삼단논법의 이론에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귀납법에 대한 자기으 ㅣ새로운 해석에서 구했다. p349

이 설명은 통계적 탐구에는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베이컨은 가설의 공식이 귀납법에 입각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예비적 가설을 가져야 한다. p350

베이컨은 과학적 탐구에 그토록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자기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새로운 국면을 모두 간과하고 있었다. p351

1651년에 <라바이어던>을 출판하자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갈라졌다. (토마스홉스)

홉스는 죽을 때까지 수학자들과의 논쟁을 그만두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그의 저서는 <리바이어던>인데, 여기에서 그는 주권론의 완성에 일반적인 철학적 견해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이론으로 향하기에 앞서, 그는 이 책이 서론에 전반적인 철학적 입장을 상당히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다.

대학이 개선해야 할 주요 결점 가운데 하나가 무의미한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p354

è  대학이 또 다른 결점은 쓸모 없는 지식들을 주입시키려고 한다는 것도 있다.

지배자가 선출된 가장 중요한 목적인 보호를 해 줄 수 없는 경우, 비로소 사람들은 당연히 이 합의가 무효라고 선언할 수 있다. 이런 계약에 입각하고 있는 사회가 공화국이다. 공화국은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인 리바이어던과 같은 것이다.

홉스는 철저한 에라스투스주의자로, 교회는 행정 당국에 따르는 국가 제대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화를 향하려고 한다.

르네상스 이후에 사상가의 관심을 모은 또 하나이 큰 문제는 방법이 중요성이었다. p355

이듬해 (1633) (르네 데카르트)는 이탈리아로 가서 2년 동안 체류했다. p356

데카르트는 주요 물리학 저서에 코페르티쿠스 이론을 채택했는데,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황은 데크라트의 저작에 흥미를 보여 그를 설득해서 스톡홀름으로 오게했다. 이 스칸디나비아의 원수는 참다운 르네상스인이었다. 의지가 견고하고 활력이 왕성한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아침 5시부터 철학을 가르치라고 일렀다. p357

데카르트는 이성 자체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만, 이성을 잘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다를 뿐이다.

자신이 자기 이성을 어떻게 잘 사용했는가를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분명하고 명백한 관념 외는 아무것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하나하나의 문제를, 그 해결에 필요한 만큼의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셋째는, 사고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는 질서를 따라야 하며, 질서가 없을 경우에 우리는 질서를 가정해야 한다. 넷째는, 우리가 빠뜨린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철저하게 대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운명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억제하고, 자기 희망에 사물의 질서를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사물의 질서에 맞추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의심하는 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p359

데카르트 철학은 이와 같이 사고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출발점으로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 후 합리론과 경험론 두 진영의 유럽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사고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은 의심할 수 없는 특징을 보여야한다. p361

데카르트가 설명한 엄격한 결정론은, 18, 9세기의 유물론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특히 뉴턴 물리학과 함께 이해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

실체란 성질을 간직한 것이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이고 영원하다.

라이프니츠, 단자론에서 무한히 많은 실체가 모두 독립적이지만 조화롭게 움직인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천성적으로 약간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그 후 완전히 고립하여, 친구의 작은 모임 속에서 조용하 살면서, 렌즈를 닦아 생계를 유지하고 철학상의 명상에 잠겼다.

스피노자의 저술은 많지는 않지만, 전에 거의 볼 수 없었을 정도의 집중력과 논리적 엄밀성을 나타내고 있다. p365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그때 그 시대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자유가 국가의 기능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19세기에 인정된 만큼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홉스와 달리 사상의 자유를 외친 주창자였다. p366

가장 온당한 정부는 법령을 내는 권한이 있을 경우, 올바른 법령을 내고, 신앙과 교육 문제에서는 초연하다.

가장 좋은 정부에 대해 말하자면, 활동이 어느 정도의 자유와 안전에 달려 있는 상업 사회야말로 자유주의 세상을 만드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갖는다.

17세기의 으뜸가는 지적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p367

이 책<윤리학>은 간결하고 명쾌하고 추론한 걸작이다.

신과 우주, 즉 모든 사물의 총체는 동일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유명한 범신론이다. p368

일단 적절한 관념을 가지면, 우리는 틀림없이 사물의 질서와 관계를 알게 되므로, 이 질서와 관계는 관념의 질서 및 관계와 같다. 정신의 본성은 사물을 우발적으로 보지 않고,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p369

인간은 전체에 더욱더 순응해 가면서 그에 알맞은 자유를 얻는다. 자유란 바로 독립 또는 자기 결정이며, 이것은 신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도 부지야말로 모든 악의 최대원이라고 생각했고, 지식이야말로 우주의 보다 큰 이해라는 뜻에서, 현명하고 적절한 행동에 이바지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p370

스피노자가 극단적인 일원론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해답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무한한 실체를 가정한다. p371

(라이프니츠)는 비참하게 잊혀진 채 있다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는 한쪽 영역이 다른 쪽 영역으로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보았다. p373

그 어떤 두 개의 단자도 인과적으로 결부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참다운 관련도 없다. p374

넓은 뜻으로는 모든 단자는 영혼이며, 이들은 모두 비물질적이고 불멸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생기지만, 자유 의지는 읜간이 논리적인 엄격한 강제력 없이 행동할 때만 허용된다. p375

라이프니츠는 두 개의 논리 원칙을 기본적인 공리로 받아들인다. 첫째는 모순율 둘째는 이전에 언급한 충족 이유율로, 일정한 상태가 충분히 먼저 생겨난 이유에서 나오게p 된다는 원리이다.

과학자가 이론을 수립할 때 하는 일은 우연적인 것을 파악해서, 이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과학을 소유하는 것은 신뿐이며, 따라서 신은 모든 것을 필연의 빛에 비추어서 본다. p377

그는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만지도 않은 봉급을 보충할 생각으로, 귀족의 개인 교수를 하거나 틈틈이 집필 활동을 해야 했다.

진리는 사실과 같다는 이론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미친다. p379

자연에 대해서 무엇인가 배우고 싶다면, 인간은 수학적 절차보다도 오히려 실험과 관찰에 의한 경험적 방식을 채용해야 한다. 비코는 데카르트보다도 베이컨에게 훨씬 공감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와 소렐은 비코의 저서를 연구했다. 사상이란 가끔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비코의 저서는 그다지 널리 읽힌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철학의 많은 발전의 싹을 품고 있다.

자연은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만든 것이지만, 실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p381

비정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원리에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인식론의 문제에 관한 매우 올바른 결론이 몇 가지 나온다. 왜냐하면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 작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우리는 비록 숙련된 기술이 어느 정도 부족하다해도, 악보를 읽는다든가, 연주를 하든가 해서 곡을 재구성해야 한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점차 숙련된 기술도 갖게 된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적극적이고도 문자 그대로 재구성적인 요소이다.

비코는 반대로 발견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상의 역할을 강조한다.

비코의 암시적인 설명은 발전 중에 있는 과학을 증명하고 발명의 순서로 택하고 있다. p383

실제로 언어는 시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 과학전인 것이 된다. p384

합리론자는 발전의 방향을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목표로 잘못 알고 있는 반면, 형식화하는 일을 거부하는 방식은 우리가 항상 빠지는 좁은 시야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을 방해한다. 게다가 비코의 방식은 보통 일상의 담화가 필요한 만큼 또는 가능한 만큼 분명하다고 보는 견해와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일상 회화에 과거의 철학적 편견이 살아남아 있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매우 경솔하고 낙천주의적인 관념이다. p385

진리는 행위이다. p386

제7장   영국 경험론

첫째,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신교적이었지만, 칼빈주의식으로 좁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정치와 군주정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전통에 반대하고 있었다. p389

사람들이 자기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었고, 따라서 이제 교육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기 시작했다. p390

개인주의라는 이론은 대체적으로 합리론적 이론이며, 이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감정에 지배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야만적이라고 여겼다. p391

19세기 산업 사회의 발생과 함께, 자유주의는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노동 계급을 사회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강력한 원인이 되었다. p392

로크의 <인간오성론>은 이와 같이 새로운 체계를 제공하려고 하기보다는 예부터 내려오는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려는 것이다. p394

이 새로운 계획의 첫걸음은 지식을 엄밀하게 경험 위에 놓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선천적인 관념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p395

복합관념은 실체와 양태와 관계로 세분된다.

로크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크에 의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관념이며, 이것은 또 이것대로 세계를 묘사하고, 또 모사한다고 한다.

그의 논술은 체계적이지 않고, 어려운 점이 나오면 논의를 그치는 일이 많다.

철학적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게 했다.

그들의 광신주의는 이성과 계시 둘 다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로크는 느끼고 있었다. p397

세 권력은 한 권위가 특별히 강력해지지 않도록 상호 억제와 균형된 제도를 구성한다. 이것이 정치적 자유주의적 중심을 이룬다. p399

로크는 가장 심오하지도 않고 가장 독창적이지도 않지만, 그의 저서는 철학과 정치에 지울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로크의 영향 때문이다.

로크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뉴턴의 광범위한 정복과 결부되어 있다. 뉴턴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폐기시키고 말았다. p400

로크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더욱 강했다. p401

로크의 자유주의를 이어받은 공리주의자들은 개화된 이기주의 윤리를 지지했다. p402

로크의 이론에 남아 있는 중대한 하나의 결함은 추상 관념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p403

버클리 철학의 근본 논제는, 어떤 사물의 존재는 우리가 그 사물을 지각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요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각되는 대상이 사람의 정신 안에 있다고는 보통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p404

경험하는 것은 경험한 때의 일로, 그 밖의 어떤 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사물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뜻을 형성하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p406

버클리는 추상 관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상과 관념 사이의 로크의 구별 전체와 그 결과로 생기는 지식의 모사 이론까지 거부한다.

로크는 담화 중에서 한 마디의 말이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식으로 지식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음이 틀림없다. p407

귀를 기울일 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의 흐름이지, 일련의 말의 뜻을 서로 분리하고 다음에 이것을 다시 이어 맞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408

나는 오늘날까지 철학자를 재미있게 만들고, 지식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은 어려움 중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대부분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처음에 먼지를 일으켰으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다. p410

철저한 비판적 설명을 가하기 위해서는, 로크의 관념이론은 버클리보다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버클리는 정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재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재산의 범위 내에 생활을 맞추어야만 했다. p411

이 책에는 저자의 젊음의 흔적이 철학적 내용에서보다도 무모하면서도 솔직한 어조에서 엿보이고 있다.

흄은 인상과 관념을 우리 지각이 내포하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p413

그대로 그리스어의 뜻 이데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흄에게 사고 작용은 회화적 사고 작용, 도는 애초에 같은 뜻이었떤 라틴어를 빌리자면, 상상 작용이다. 총체적으로 감각할 때나 상상할 때의 경험을 지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상 또는 관념의 연속뿐이며, 따라서 달리 더 깊은 관련이 있는가의 여부의 문제는 생각하는 것조차 낭비라는 것이다. p415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연속해서 일어나는 지각뿐이다. p416

우리가 감관 지각에 있는 두 개의 대상을 빈번하게 추측하면 인상이 형성하는 두 개의 관념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준다.

인과성은 하나의 정신 습관이다.

합리론이 요구하고 있는 원인과 결과의 관련의 필연성을 ,흄의 인식론에서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합리론자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이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그 어떤 심리적 기구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정신 습관이 들어가는 곳이다.

필연적 관련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규칙의 수는 8개이다. 첫째 원인과 결과는 공간과 시간에 인접해야 한다. 둘째, 원인은 결과보다 먼저여야 한다. 셋째,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일정한 관련이 있어야 한다. 넷째, 우리는 동일한 원인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고 배웠는데, 이 원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다. 다섯째, 몇 가지 원인이 동일한 결과를 낳은 경우, 이들 원인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다. 여섯째 규칙은 결과의 차이가 원인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회의적이란 말은 그 어떤 만성적 우유부단을 나타내는 통속적인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원래의 그리스어는 단순히 꼼꼼하게 탐구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체계를 수립한 자가 자기의 해답을 발견했다고 느낀 데 반하여, 회의론자는 그보다 확신이 덜하여 계속해서 고찰했다. 이윽고,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자신 없는 상태가 그들의 이름을 특징짓게 되었다.

이와 같은 회의론을 흠잡아 쓸데없이 잘못을 들춰내려고 애를 쓴 사람은 누구나 경쟁 상대도 없는데 논쟁을 해온 사람이다. p421

회의적 입장은 윤리학과 종교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p422

제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계몽주의는 특정한 철학 사상 유파에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16,7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종교상 다툼의 결과였다.

왕권신수설은 여러 종교관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정세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p425

 계몽운동은 본질적으로 보면, 자유로운 지적 활동을 재평가하는 것이고, 문자 그대로 암흑이 지배하고 있던 곳에 널리 빛을 비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편안함과 안락함은 부끄러운 것으로 배척되고, 불안정한 생활 방식 쪽이 이론상으로는 훨씬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이상화된 빈농 개념이 나온다.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특별한 미덕이었다. 여기서 인정하는 빈곤이란 본질적으로 농촌적인 것이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낭만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p427

낭만주의 운동과 결부해서 부활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낭만주의는 국가 상호간의 차이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민족성이라는 신비적 개념을 좋아했다.

떠오르는 중산 계급의 삶은 그들에게 따분하고 비정상적인 인습에 둘러싸인 것으로 비쳤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낭만주의 운동은 하나의 영향을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는 이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착수하고 있는 문제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머리를 돌리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게 했다는 것이다.

이성을 과소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비합리주의적 태도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실존주의이다.

낭만주의는 특히 시인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다.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자는 아마도 바이런일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후기 낭만시는 바이런의 영향을 받고 있다. p429

유물론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쥘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의 <인간기계론>이다. 그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배제하고, 하나의 실체, 즉 물질만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유물론자는 당당히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다. p431

무지한 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지배자와 성직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퍼뜨리고 장려한 것이라고 보았다.

<백과전서>는 여러 면에서 18세기 계몽운동의 상징이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토의가 강조되며, 목표는 인류의 새롭고 행복한 앞날을 향하여 일을 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은 장자크 루소이다. p433

그녀 사이에서 생긴 5명의 아이는 모두 고아 양육원에 맡겨졌다.

è  정말 최악이다. 철학 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욕망을 가르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파리로 빈곤함과 비참한 상황 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p435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전체적으로 사회에 위임할 때 , 개인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는다.

그가 언급하는 민주주의는 고대 도시 국가지, 대의 정치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p436

칸트가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도 흄을 읽고 나서의 일이다. 칸트는 흄이 말하는 습관을 합리적 원리의 지위로 높이고, 간단하게 흄의 문제를 처리한다.

p437

그의 습관은 매우 규칙적이었기 떄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건강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규칙적이고 꼼꼼한 생활로 병을 예방했다.

철학자로서 이 정도의 영예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칸트 철학이 한편으로는 영국 경험론의 극단적인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적 합리론적  고유한 원리 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p438

감관 경험은 지식에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이 취하는 형식, 즉 경험의 소재를 지식으로 전환하는 구성의 원리 자체는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칸트는 생각한다. p439

칸트에게 인과성은 아프리오리의 종합적인 원리이다. 그것을 아프리오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경험에서 생길 수 없다고 하는 흄의 논점을 강조하는 데 머물지만, 칸트는 그것을 외적으로 조건이 붙은 습관이라고 표현하는 대신에 하나의 인식 원리로 다룬다. 

명제의 성질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한정적인가로 각기 실재와 부정과 한계라는 범주를 나타낸다. p441

사람들은 모두 이성적, 또는 이성이 부여되어 있는 한 평등하지만, 지식에 관해서는 불평등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이란 적극적 지성이며, 이 점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심각할 정도로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판단으로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이른바 통각이 있어야 한다.

칸트에 의하면, 범주의 틀을 거치지 않는다면, 영속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이론 전체의 요점은 공간과 시간의 아프리오리한 관념이 없으면 경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과성을 운운할 경우, 우리는 오성의 틀 안에 작용하고 있는 아프리오리한 개념의 망에 이미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443

윤리학이 항상 의지는 외적 영향에 지배된다고 단정했다면, 칸트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의지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행동의 일반 원리에 도달하기를 바라면서, (….) 반대로 우리가 칸트의 도덕률을 발견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p445

분명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올바른 원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윤리적으로 해야 할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도덕적 행동의 적극적 장애가 된다.

행위는 선한 의지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선한 이지만이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이와 같이 주위의 간섭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중요한 것이 기분이나 의향이라고 할 때, 그것을 의무라고 느끼기만 하면, 유쾌하게 철저한 혼란 속에 빠질 수 있다. p447

그의 시대에서 급진적이었던 것은 …… 기술된 평화와 국제 협력에 관한 견해이다. 대의 정치 체제와 세계 연방은 그가 제시한 주요 개념이다. p448

정치에 관한 피히테의 생각은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 통제를 수반하는 사회주의 경제에 oegks 마르크스 관념을 보여 준다.

자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것은 칸트의 이원론에 상반되는 의도를 갖는다. ‘자아는 몇 가지 점에서 칸트의 통각에 대응하는데, 칸트적인 의미에서 자율적이고 활동적이다. 경험적는 자아의 무의식적인 투사로, 이것이 이른바 비아이다. p450

거기서 칸트는 각 그룹의 제3의 것은 서로 대립하는 1 2를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헤겔의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이에 칸트적인 구별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그때 헤겔 철학은 언어 자체의 뜻에서 실천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역사적 설명의 원리에 관한 한, 상반하는 두 요구로부터 그 어떤 타협적인 해결에 이르는 변증법적 진행은 매우 유용한 데가 있다. p454

특이한 사건의 자세한 설명은 이와 같이 아프리오리에서 구할 일이 아니다.

자유준법과 같은 뜻이 될 수 없고, 이것은 문외한의 생각과 조금 엇갈려 있다. 동시에 헤겔의 자유 관념에는 귀중한 암시가 하나 있다. (……) 이런 뜻에서 자유는 환상을 갖는 것보다도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이며, 필연적인 작용을 파악하는 일이다. p

국민은 싸울 일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약체가 되어 퇴폐한다는 것이다.

국가끼리의 차이는 전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는 국가끼리의 사회 계약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국가는 상호 관계에서 자연 상태며, 거기에p는 힘만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칸트는 헤겔보다도 위대한 통찰력을 나타냈다. 현대는 전쟁이 결국 만물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P457

국가는 가장 지배적인 권력이다.

모든 활동은 국가의 복지에 직접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p458

헤겔의 정치 이론은 다른 중요한 점에서도 그의 형이상학과 모순된다. p459

서로 반대되는 두 진술이 있을 때, 둘 다 옳은 경우는 있을 수 없지만, 둘 다 잘못된 경우는 어저면 있을지도 모른다. p460

헤겔 철학의 귀중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 변증법에 관한 한, 헤겔이 상당한 통찰력으로 정신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만큼 정신 작용은 변증법적인 틀에 따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 헤겔 학설은 비코가 1세기 전에 말하기 시작한 역사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헤겔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기 생각을 주장할 때는 이따금씩 핵심을 잃는 경우가 있다.

헤겔은 자신의 이론을 공식화할 때 다른 뜻의 말을 이용한다. p463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사물이 다른 사물과 관련하여 변화한다고 보는 것은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p465

결국, 당신은 넬슨의 기둥이 버킹검 궁전보다 높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할 때, 그뜻을 알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되기 전에, 우주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마치 헤겔은 쪽그림을 모두 완전하게 끼어 맞출 때까지는 각 쪽그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경험론자는 각 부분마다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p466

관념론적인 관점은 손쉽게 불관용과 잔인함과 압제를 낳는다. 자유주의 원리는 관용과 배려와 타협을 촉진한다. p467

소극적 철학은 개념이나 보편, 본질 등과 관계가 있다. p468

키에르케고르는 하나의 상태를 안에서 파악하는 실존주의적사고 방식을 인정한다. p469

헤겔을 실존주의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 자체가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관념론적 관점과 대립한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실재론적 지식 이론을 전제로 한다. p471

누메나와 페노미나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체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범주를 넘어선 곳에 있다.

반대로 나의 의지는 실로 유일한 보편적인 의지이다.

게다가 그(쇼펜하우어)에게 지식이란 헤겔처럼 자유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근원이다.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합리론 체계의 낙관론 대신에, 행복이 깃들 수없는 아주 어두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성 또한 그에게는 악한 것이었다. 생식은 단순히 고통의 희생자를 새로 낳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말년을 침울하게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저서는 인정을 받고 재정 사정도 조금 좋아졌다. 그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갑자기 전보다도 명랑해졌다. p473

쇼펜하우어에 다르면, 고통에 찬 이런 상태의 해결은 불교의 신화에서 구해야 한다. 우리의 고통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의지의 작용이다.

전체를 통찰하고 그 고통을 공감한다면, 우리는 무로 도피하게 된다.

헤겔학파의 합리론에 맞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결국 세계와 세계의 분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라면.. 니체는 이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니체)는 그 뒤 10년 동안을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보내고, 대개 고독하게 살며 무명인 채로 학문 활동을 계속했다. 1889, 그는 미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생 시절에 걸린 만성적인 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p475

니체의 저서는, 특히 스파르타가 그린 이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니체가 비극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 얻은 것은 비극적 영웅이라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그는 비극 속에서 정감의 대행적인 정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본다. 쇼펜하우어가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데 반해, 니체는 낙천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당연히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견고한 의지를 선한 사람의 둘도 없는 특징으로 보는 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여러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지배자의 도덕, 선이 독립, 관용, 자기 의존 등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모든 덕목이다. 반대의 도덕은 비굴, 비애, 용기 없음 등으로 이들은 악한 것이다.

노예의 도덕성. 지배자의 도덕을 따르는 선이 되는 모든 사물을 비난하고, 이것을 악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흉악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대문호로 그의 저서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시적 산문에 가깝다. p477

니체가 무엇보다도 싫어한 것은 새로운 기술과 함께 성장한 새로운 형태의 대중의 출현이었다. 그에게 사회의 올바른 기능은, 귀족적 이상을 달성하는 위대한 소수인의 못자리 역할을 다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작은 물고기에 고통이 일어나도, 그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의 영웅 숭배론을 보자면 맹렬하게 여성을 멸시하는 태도를 볼 수 있고 여자를 재산처럼 다루는 동양의 풍습을 변호한다. 이 점은 니체 자신이 여성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남을 그다지 납득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소수자를 위해 다수자가 고통 받는 일에 전혀 무관심ㅎ하다는 의미이다. p478

제9장   공리주의 이후

관념론 철학과 그 비판자들은 물질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던 세상에서 발전했다. 이들 변화는 18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에 의해 일어났다.

중요한 발전 단계는 증기기관의 완성이었다.

과거 수세기 동안 , 귀족이 자기 용도로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는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때문에 공유지에서 이익을 얻어 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농촌 사람들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p481

그러다가 기계의 작용이 개선될 때마다, 산업 노동자는 자기들의 생계가 끊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저항했다. 이 걱정은 오늘날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인 솜씨가 정치적 지혜보다도 한두 발 앞서 가는 경향이 있었고, 여기서 불균형이 생긴 뒤 우리는 아직까지 이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그 후 분업의 원리는 산업 분야에 대규모로 적용되어 완전한 지지를 받는다.

전문화된 작업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일에 대한 인간의 흥미가 손상된다고 하면, 결국 고통 받는 것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p483

이 분야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은 리카도의 노동 가치설이며, 이것을 받아들인 인물이 마르크스이다.

모든 사회악에 대한 중요한 개선책 중 하나는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이 점에서 개혁자들은 그다지 옳았다고 할 수 없다.

교육은 간접적으로 약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생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교육에 의해 때로는 자기 운명을 개선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 이와 같은 결과에 반드시 이르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p485

벤담의 철학은 18세기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두 가지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첫째는 히틀러에 의해서 유명해진 연합의 원리다.

둘째는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격언인데,벤담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은 자기에게 가능한 최대의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최대의 행복은 심리학과 결부된다. 여기에서 행복은 쾌락과 같은 뜻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p487

공리주의에서 중대한 결론이 두 가지 나온다. 첫째는 몇 가지 점에서, 만인에게는 한결 같이 행복에 대한 강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만인은 모두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는 현재의 희생 도덕은 지배 계급이 자기 손으로 가진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부과하고 있는 정교한 속임수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생을 기대하면서도 자기는 아무런 희생을 지불하지 않는다. p489

최대 행복의 원리와 이것과 병행하는 쾌락의 계산이란 암암리에 양을 위해 질을 무시하고 잇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바람직하다는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웡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p491

쾌락이란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한 경우와 같이 평범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비록 욕망이 충족되어 실제로 내가 쾌락을 얻는다 하더라도 바라는 것이 쾌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옳지 않다.

벤담과는 반대로 밀은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p493

다윈이 한 일은 자신이 자연을 꼼꼼하게 관찰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자상한 사실을 대량으로 공급한 일이었다. p495

노동자는 자기들의 운동의 옹호자로서 로버트 오언을 세웠는데,

당시 자행되고 있던 노동자의 비인간적 착취를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실천은 사업을 경영하여 이익을 올릴 수 있고, 초과 근무를 하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임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872, 오언 신봉자들은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불렸다.

오언의 지도를 받아 확대된 운동은 공동 조합제도를 낳고, 초기의 노동 조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을 성자의 발열에 들게 한 운동의 창시자였음에 반해, 그의 동향인이자 성자로서도 동년배인 암브로스는 단지 그 자신의 선조를 후세에 충실하게 지킨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97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있었던 것은 주로 엥겔스의 원조 덕분이었다. 마르크스는 가난했지만, 스스로 사회 개혁의 기반을 닦으면서 열심히 연구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세 가지 주요 영향력이 마르크스의 생각을 형성했다. 우선 그는 철학적 과격파와 관련이 잇다.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사회 이론을 추구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인 고용자에 의해서 노동자의 노동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봉급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며, 이 잉여 가치는 자본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빼앗아간다. 이런 식으로 노동은 착취된다. p498

마르크스의 사고방식의 두 번째 경향 즉 그는 헤겔의 학설에 도달한다.

헤겔이 볼 때 역사 진로는 절대자를 향해 노력하는 정신의 점차적 자기 실현이다. 마르크스는 정신 대신에 생산 양식에 생산 양식을 놓고, 절대자 대신에 계급이 없는 사회를 놓는다.

변증법적 투쟁이 취하는 형식은 계급 투쟁이다. 이 싸움은 사회주의하에서 계급이 없는 사회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p499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세 번째 주요 요소이다.

철학자는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참다운 과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관념적인 방식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와 결부되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이를 멸시한다. 그 자신의 실천적 유물론은 사회주의의 계급없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과학적 관심 전반이 어느 정도 이 사회의 지배 그룹의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p, 이것은 아마도 옳은 말일 것이다. p501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마지막 체계이다.

콩트는 평생 건강하지 못해서, 가끔 정신적 우울로 고통을 받아 자살 직전까지 갔다. 그는 가정 교사로 생계를 꾸리고 친구나 주위의 애호가들이 주는 선물을 생활에 보탰는데, 그들 중에는 J.s.밀도 있었다. 그러나 콩트는 자기를 천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결국 밀과의 우정도 식고 말았다. p505

콩트는 사회가 최초의 신학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그의 이른바 실증적 단계로 옮겨가며, 이 마지막 단계에서 역사 과정이 생겨나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는 견해를 채택하고 있다. p506

이 점에서 콩트의 사고방식에 일맥의 이상주의적 영향이 눈에 띈다. p507

퍼스는 그 자체의 논리를 펼치기 위한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퍼스의 저서는 양적으로 많고 또 단편적이다.

그가 이와 같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마음이 비틀어지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그에게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p509

진술은 그 어떤 미래의 행동 가능성과 모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려고 하는 기질이 형성이 인정해야 한다. 진술의 뜻은 이들의 실제적인 결과에 있다고 한다. p511

그는 실용주의적인 방법에 의해서 과학 이론이 마침내 자연에 관한 문제의 해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보다는, 오히려 미래의 행동에 대한 도구라는 견해에 도달한다. p515

모든 유권자의 부류 자체는 보통 선거의 이익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부류에서 자신의 항이 아닌 부류를 생각할 때 이 역설이 생긴다.

역설에 관한 문제는 여러 가지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역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제는 철학자에게 문장이 어떻게 해서 구성되고,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조사할 필요성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p524

제10장          현대 철학

19세기 후반의 특징은 현대의 지적 풍조에 영향을 끼친 새로운 발전이다. p527

인생이 복잡해지면, 그 지배 수단도 점점 복잡해진다.

지적 연구는 전문화되고 그 구분이 한층 좁아졌기 때문에, 현대에는 언어의 혼란이 생겼다.

오늘날 통용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가지 유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뿐이다. 이것 또한 다른 종류의 하나의 특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문화의 요구와 압력에 의해서 젊은 사람들은 넓은 관심과 이해를 신장시킬 여유를 갖기 전에 좁은 길로 인도 된다. p528

è  이것도 좁은 길을 찾는 방법 따위는 가르쳐주지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채, 그냥 골목길로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삶의 방식과 이에 수반되는 실험실이나 실험은, 예술가가 요구하는 자유와 진취 정신을 질식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p529

과학의 영향을 오늘날 한층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현재 이용할 수 있는 파괴 수단이 가공할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는 근대 과학의 힘과 지배의 근원을 파괴하는 목적으로 사용했을 경우에 그것들이 무차별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점에 있다. p532

과학 이론에 대한 이런 접근은 탐구활동의 철학적 의미에 관심을 품고 있는 과학자 전체의 특징이다. p533

과학적 진술과 과학적 절차의 중요성은 이들의 수학적 의식 때문에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널리 퍼져 있는 이 태도는 피타고라스학파와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피타고라스 학설 신봉자의 수에 대한 신비주의를 이상하게도 상기시킨다. p535

철학면에서 이들 일반적 경향은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운동을 낳았다.

그 여러가지 이야기하는 방법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여하튼 이것은 철학이 항상 해 온 일이다.

사고는 항상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왜곡한다.

브래들리가 사고를 공격한 주된 원인은 사고가 필연적으로 관게를 수반하고, 관계는 그가 제시하려고 한 것처럼 우리를 모순 속으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p537

크로체도 실재란 정신적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크로체는 이들 변화를 점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 최초의 단계로 되돌아갈 때는 정신이 이 과정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어느 정도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적인 오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오류와 진리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며, 그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류가 말하는 소리에는 두 가지 색이 있다. 하나는 거짓을 주장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것은 이것을 부정한다. 이것이 예스의 충돌로, 모순이라고 불린다.

프래그머티스트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무엇보다도 행동을 강조한다.

합리론적 사고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정밀함을 구하는 노력이다. p

베르그송은 전통적 진화 이론을 그 합리론적인 편중 때문에 거부한다. 이 편중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을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p541

인간의 지능은 본능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말았다.

최고 형태의 본능은 직관이며, 직관은 세계와 직접 일치하고 있는 어떤 정신 활동이다.

지능은 세계를 분해 또는 분석하는 것으로, 무시간적이며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지능이란 이론적인 것이다. 지능에는 공간은 있지만, 시간은 없다. 그러나 삶은 시간으로 흘러가는 실천적인 일이며, 여기에 직관이 개입한다. 지능이 이루는 공간적 해부도 어던 이점은 물론 있지만, 그것은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활동에 대한 진술이 의미를 가지려면 과거와 현재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p543

받아들이기 위한 근거를 운운한다는 것은 이미 이성적인 것의 영역 내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이론은 경험의 논리적인 특징보다도 오히려 심리적인 특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ㅇ르 것이다. p544

꿈을 꾸고 있다는 것과 눈을 떠 의식이 있다는 것에 대한 구별은 전자가 일종의 자유와 공상을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의 자유는 결국 실질적이기보다는 표면적이다.

꿈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평소 생활에서 억압된 희망이나 욕망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은 직접 경험에 근거를 갖는 각양각색의 요소와, 그날의 희망 뿐만 아니라, 깆나간 어렸을 적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희망을 자유롭게 섞어서 재건한다는 것만을 지적하면 충분하다. 해석이라는 과제는 꿈의 진정한 뜻을 푸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망각 작용. 우리는 쉽게 잊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회상을 주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p547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객관적 논리관에 서면, 순수하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불만이다.

화이트헤드도 실제로 모든 명제가 결국, 보편적 체계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이론이 전세계를 받아들이는 한, 그것은 형이상학과 비슷한 목적을 추구한다. p551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지위라는 이점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도 지식과 기술을 통해서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p553

사람은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와 몸의 안녕을 얻는다.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치와 선입견의 틀 전체가 파괴된 것은 1914년부터 1918년에 걸치는 대전에 의해서였다. p555

내셔널리즘의 감정은 빈 회의 이래 표면 아래로 잠겨 있었지만, 이제 새로운 국민 국가의 형태로 표현되어 각국이 이웃 나라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중유럽 제국의 패배가 그 반동으로서 이제까지 없었을 정도로 격렬하게, 타협의 여지가 없는 내셔널리즘의 부활을 초래했다.

국가의 활동이 이전에는 개인의 것이었던 행동의 자유를 심하게 빼앗게 되었다.

중세에 비하면, 현대 사회는 훨씬 안정성이 없다. p557

둘째 불가피한 변동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중화하기 위해 그 균형 세력을 제공하는 문제가 생긴다.

셋째 독립적으로 이룬 안정감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국가가 공공 사업을 제공함으로써 이것을 메우고 있다.

오늘날까지 서양 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술과 그 기술을 낳은 과학적, 철학적 전통 때문이다. p559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재미있게 사는 것이다. 앞날의 목적은 공상적인 것이다.

칼 야스퍼스는 처음에 심리학, 특히 정신병리학 문제에 관심을 둔 것을 계기로 철학으로 전환했다. 그의 철학 연구의 중심에 서는 것인 인간이다. p560

자아는 자신을 넘으려고 노력하면서 제3의 존재, 즉 이전의 두 별종을 동시에 포함하는 초월적인 자체 존재에 적응시킨다. p561

해석과 해석의 대상 사이에 차이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게 철학은 초월적인 종류의 존재, 또는 자체 존재에 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란 개인이 초월하려고 할 때의 노력이다.

우리는 자유가 어떤 기분으로 나타난 것을 인정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실존주의 운동은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잇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장 폴 사르트르. 소설이라는 문학적 매체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고찰하는 수단으로서 나무랄 데 없다.

세계는 과학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p563

이들 사상가는 우리가 충분히 폭넓은 견해를 갖게 된다면, 보이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고 한다.

실존주의는 합리론적 필연관을 비판할 때 중요한 점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존재는 전반적인 논리적 원리에서 가져올 수 없다. 이것은 전통적 경험론자라면 누구나 흔쾌히 시인할 것 같은 비판이다.

각종 심리 상태의 기술에는 재미있고 귀중한 관찰이 많이 있다.

심리적 관찰을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 재료를 하나의 존재론으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사르트르의 논문 <존재와 무>의 목적이다.

실존주의자는 우리의 비판을 요점에서 벗어났다고 거부할 것이다.

그러니 이 반론은 반론 자체를 반대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기준이든 이성 분야의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한 것일 뿐이다. p565

마르셀도 특히 인간 조건에 관한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경험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적 철학에서 마르섹이 강조하는 것은 해부하고 분석하는 보통의 반성을 넘는 필요성이다.

마르셀이 관여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심신의 관계이다. 이것은 일정한 현실적 배경 속에서 개인이 겪는 인간의 궁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p566

실증주의 운동의 내부에는 한결같이 형이상학에 대한 멸시와 과학에 대한 경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실증주의 입장의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철학적 사고를 횡설수설이라며 거부한다는 점이다. p569

실증주의 운동은 다른 종류의 많은 유파를 낳았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유파는 영국 철학을 과거 수십년 동안 지배해 온 언어분석학파이다. 그것은 논리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통적인 철학적 혼란은 언어의 조잡한 사용법의 결과라는 원리에 서 있다. 모든 의문은 올바르게 공식화하면, 명확한 대답이 나온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철학이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이와 같이 어떤 종류의 언어적 요법으로 간주된다.

시작이란 때맞추어 무언가 일어나는 것을 말로 표시하는 시점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적의문으로 돌아서 볼 때, 여기에서 우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이것과 전혀 다르게 사용하게 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p57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가 말하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이 동어반복이란 자기 모순과 같은 명제를 말한다. 

완전한 언어는 모든 것을 극도로 정확하게 말하게 된다.

각종 언어의 유희를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용을 통해 그것을 사용할 때의 말뜻을 터득한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말의 문법을 불완전하게 파악한 결과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단 규칙이 이해되면 이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언어적 요법은 우리의 이 욕구를 해결해 준다. p573

 

:::맺는 말:::

자식의 습득 외에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자기 것이 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한 숙고를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p575

사람의 행동이 그가 살고 있는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사람의 행동이 사회 제도이ㅡ 그 어떤 개혁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의해야 할 중요한 점은 당위를 내포하는 전제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p579

내가 말하고 있는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확실히 구별된 지식이다.

결국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p580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       다양한 사진과 그림들 : 각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삽화들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봤던 다양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사람뿐만 아니라 시대를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동전이나, 건축물, 회화 등 다양한 삽화를 볼 수 있었다.

-       시대의 흐름과 그 시간에 따라 영향을 주고 받은 철학적 사상과 철학가들을 순차적으로 적어 나가고 있다. 이는 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물론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       인물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 : 중요한 철학자들을 설명할 때 러셀은 대부분 그의 집안환경과 성격 등으로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약간의 배경지식이 생김으로써, 그가 학문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2)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

-       여성 인물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음이 참 아쉽다. 철학가들 중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사가 그녀들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가끔 유명 철학자와 공저했다는 사람이 한명 있긴 했으나, 그것도 두어줄의 설명으로 끝이 나 버렸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그 시기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을 여성들이 분명히 있었을텐데, 그녀들의 이야기도 함께였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       이 책을 쓰면서 러셀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오히려 나같이 철학에 문외한이고 거의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철학과 그것들간이 관계에 대하여 해석을 하는 방식으로 썼더라면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지금과 같이 철학사의 변화를 큰 흐름으로 정하고, 소제목들로 세부 내용들을 조금 나누었을 것 같다. 소제목은 각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의 이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혹은 그 시대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6장 근대철학의 융성 / 1) 시대적 상황 시대 배경, 이 학문에 이르게 된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 등에 대해 / 2) 주요 학문의 배경-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재발견 등 / 3) 종교적 상황 철학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의 영향력에 따라 많은 부분에 변화가 생겨나던 시기였다. / 4) 철학가들 피렌처, 마키아밸리, 보르지아, 에라스무스 등 당대 철학자들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5) 근대 철학의 특징 으로 마무리하면서, 뒤에 나올 철학을 미리 언급함으로서, 둘간의 연결성을 알려 주면 독자 입장에서 이해 하기가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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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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