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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8일 07시 1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이야기 해보는 W. J 듀란트

 

역사를 쓰는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듀란트 (1885.11.51981.11.7)

 

윌듀란트.jpg

 사람들은 그를 소개하는 첫 번째 문구로 '문명 사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이는군요.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 <역사 속 영웅들>이라는 책의 서문을 통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철학으로 무장된 사학자 혹은 역사로 무장된 철학자 정도로 표현될 듯합니다.

 

스무살에 알에서 깨어나다

그는 미국 메사츄세스 노스 아담스에서 1885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년시절을 카톨릭 교구 부속학교와 성 베드로 학교(St. Peter's Academy and College)에서 보내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그의 부모들이 그가 독실한 종교인으로 사제의 길을 걷기를 희망한 바램의 시작이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타인의 손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는 10대 후반을 보내면서 도서관에서 다양한 철학자 및 무신론자들의 작품을 접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어렴풋이 그러나 확신으로 보게 됩니다. 그때까지 확신하고 있었던 종교에 대한 믿음에 회의를 품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이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갈 수 없음을 알고 사회주의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인생의 진로를 결정한 그의 성숙함이 부럽기만 합니다. 이것은 어느 책 한 두권의 힘이 아닐 것입니다. 어린 나이이지만 삶에 대해서 '회의(懷疑)'하고 그것에 대해 물고 늘어졌기에 스스로 자신의 인생 문을 열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스피노자와의 만남. 전환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리포터, 시간 강사 등 몇몇 직업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는 기간 중에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소명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일하는 대학의 신학교 비밀 조직을 통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를 통합하려는 연구 등을 통하여 인류의 삶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전개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위대한 사상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를 보고 자신의 철학자로서의 삶을 예견할 수 있었는데요.

그가 만난 이 운명의 순간을 <철학 이야기>의 한 부분을 통하여 확인하여 볼까요.

"스피노자는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부를 단번에 읽어 버리지 말고 조금씩 몇 번이고 나누어서 읽어라.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나면 간신히 그것을 알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다른 주석서를 읽고) 그 다음 다시 책을 읽어라.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책같이 느껴질 것이다. 두 번째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여러분들은 철학의 영원한 애호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피노자를 통하여 철학의 영원한 애호자가 되어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틀을 넘어서 더 큰 곳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를 다시 한번 사상적으로 전환하게 한 스피노자를 잠깐 살펴보도록 할까요.

스피노자(163211 25 - 1677 2 21 )는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근대 성서 비판의 토대를 놓은 유럽 17세기 철학의 합리주의자 세 거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헤겔은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혹은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대작 《에티카》를 통해서 실체를 유한과 무한으로 나누는 데카르트의 정신-육체 이원론적 일신론에 반대하였으며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한 철학자 입니다. 사회주의 철학의 기반과 어떻게 다른지 천천히 들여다 보는 것 또한 듀란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문명이야기

그 후 그는 자유 교육 실험학교인 페레르 근대학교(the Ferrer Modern School)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주의 교육을 실험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의 삶의 동반자인 에이리얼(Ariel)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 즉 에이리얼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인류에게 선물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40년이 넘는 집필기간을 통해 탄생하게 되는 '문명이야기' 입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 이야기인 ‘문명 이야기’는 1만년의 인류 문명사를 온전히 담은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류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1935, 출판된 첫 번째 책인 ‘Our Oriental Heritage’에서 시작해서 1975, 11번째 책인 ‘The Age of Napoleon’으로 시리즈가 마무리되는 약 50년의 세월 동안 그의 세계 곳곳을 다니는 여행과 배움을 통해서 인류 역사를 직접 확인하고 그것에 대한 기록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 중 제10, Rousseau and Revolution(1967)’은 그에게 퓰리처 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1977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문명 이야기’를 통해 ‘통합된 역사’를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단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가 아닌, 전문가의 관점이란 이름으로 각각의 부분으로 쪼개어진 역사가 아닌 그 당시 존재했던 그대로의 ‘전체적인 그림’으로서의 역사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인류에 대한 사랑, 역사와 철학에 대한 애정을 통해서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은 지금까지 접할 수 없었던 철학적 관점, 문화적 관점의 새로운 역사서, 영웅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같이 한 명의 대가를 통하여 인류의 흐름을 조망하는데 있어서 대단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고, 대가의 소명이 어떤 것인지, 그런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잠시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과 사랑
그에게 있어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기반입니다. 그는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을 길게 인용하며 ‘개혁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따뜻한 가장이요, 한 사람의 남편으로 평생을 아내 에이리얼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였다. 삶의 동반자, 이상적 동료,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역사가 불가피하게 가질 수 밖에 없는 어두운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저작에서 유머와 재치 그리고 낙관적 시선을 유지하게 해 주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일에 대한 열정과 가정의 행복이 함께한 행운의 사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영웅들'이라는 책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에 아내 에이리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저자 자신도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요. 1981 10 25일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13일 후인 11 7 96세의 나이로 아내를 따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평생 같이 산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까지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고 떠난 대학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문헌)

1. 철학이야기, 윌 듀란트 저, 임헌역 옮김, 동서문화사

2. 역사 속의 영웅들, 윌 듀란트 저, 안인희 옮김, 황금가지

3. 윌듀란트 재단 홈페이지. http://www.willdurant.com/

4.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들의 글

 

 

2.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이 책은 완전한 철학사가 아닙니다. ....지식이라는 것에 인간성을 주려고 기도한 것입니다.

 

나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이 할 일이며, 철학은 경험 그 자체의 양식 및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이라고 이해할 때가 올 것을 기대합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며 우리들에게 지식을 주시만,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력을 가져야 합니다.

 

머리글 / 철학의 효용에 대하여

 

우리는 브라우닝과 같이 '인생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나의 즐거움이다'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13)

 

우리는 인생이란 우리의 본질과 경험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빛과 불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 <즐거운 지혜>) (13)

 

우리는 지나가는 것들의 가치와 전망을 포착하여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끌어 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13)

그렇다. 무심코 지나 가는 생의 의미들을 붙잡고 싶다. 그러한 의미들을 통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는 우연들이 모여서 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들이 엮여서 나라는 삶으로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소로는 말했습니다. "철학자란, 단순히 정묘한 사상을 가진 자도 아니고, 또한 어떤 학파를 창립한 자를 두고 하는 말도 아니며, 지혜의 지시에 따라 간소, 독립, 아량 및 신뢰의 생활을 하기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14)

 

진리가 우리를 부유하게 못할지라도 그 대신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14)

 

모든 과학은 철학으로 시작하여 기술로 끝나고, 가설에서 일어나 업적으로 흘러 듭니다. 철학은 형이상학처럼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의 혹은 정밀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의 가설적 해석입니다. 철학은 진리의 공략전에 있어서 최전방 참호입니다. (15)

 

철학자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실의 경험과 일반에 대한 관계를 알아내어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 합니다. 철학자는 사물을 결합시켜 종합적 해석을 합니다. (15)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구성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모든 목적을 비판하고 조정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15)

 

우리는 그것을 철학의 시들어빠진 추상성과 형식성 속에서가 아니라, 천재들의 생생한 표현 속에서 찾을 것입니다. (16)

이 책의 서술에 대한 단서

 

우리의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실재의 배음을 느끼는 힘이 없었습니다. 천재는 배음, 즉 천상의 음악을 듣습니다. '철학은 최고의 음악'이라는 피타고라스의 말을 천재는 알고 있습니다. (17)

김용규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소리, 신의 소리와 비슷한 것인가. 진리의 소리를 듣는 것.

 

"도리를 생각해서 철학 교사들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것 없이 오직 철학에만 몰두하라. 그리고 아주 충실하게 검토해 보라. 그 결과, 만일 철학이 나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을 버리게 하라. 그러나 만일 철학이 내가 확신하는 것과 같다면, 철학을 따르고 섬기며 기운차게 살아가라"

늙은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말 (17)

 

플라톤

 

아테네는 해군을 상선대로 전환하여 고대 세계에서 최대 상업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다시 농업의 퇴영과 침체에 빠졌으나 아테네는 번성하는 시장 및 상업 항구가 되어, 많은 인종과 모든 제사, 풍속의 집합지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 여러 인종들과의 접촉 및 경쟁은 비고와 분석과 사상을 낳았다. (19)

 

그들은 또한 서서히 과학을 발달시켰다. 교역이 복잡해짐에 따라 수학이 발달하고, 항해가 늘어남에 따라 천문학이 발달했다. (19)

 

처음에 철학은 자연학이었다. 그것은 물질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 무엇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사물의 가장 궁극적인 성분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20)

 

그는(소크라테스) 지혜가 있다고 주장한 일이 없고 다만 지혜를 사랑하며 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였지 직업은은 아니었던 것이다. (23)

 

마음이 자기 자신을 검토하기 전에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죄라는 것은 모두 오류와 불완전한 통찰과 어리석은 행동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25)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지만 또한 혁명파의 지적 지도자였다. 그는 미움 받는 귀족주의적 철학의 장본인이며 청년들을 토론에 도취시켜 해친 당사자였다. (26)

 

이 사건은 플라톤에게 단순한 귀족적 혈통과 성장만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민주정체에 대한 모멸과 민중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30)

 

공산주의 와 사회주의, 여성 해방론, 산아 제한과 우생학, 도덕과 귀족주의에 대한 니체적인 문제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유교육론, 베르그송의 '생의 비약'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재료를 아끼지 않은 주인에 의해 베풀어진, 선발된 손님을 위한 향연이다. '플라톤은 철학이요, 철학은 플라톤이다. 라고 에머슨은 말하면서 올리마르가 '도서관은 불살라도 좋다. 그 가치는 코란에 있다'고 코란에 대한 한 말을 <국가론>에 헌사하고 있다. (32)

플라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서양의 정신사조가 없구나.

 

대체로 정의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정신의 명석함이나 기량을 시험하기에 이것처럼 엄격한 것은 없다. (33)

 

플라톤은 변덕스럽고 속기 쉬운 민중들에게 관리의 선택을 맡기는 어리석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7)

그는 중우정치를 염려했던 것이다.

 

무능과 부적을 공무에서 몰아내고 공동의 복리를 위해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준비할 방법을 강구할 것, 이것이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37)

 

플라톤은 인간의 행동이란 세가지 중요한 원천, 즉 욕망, 감정, 지식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한다. (38)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현재의 왕과 군주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철학을 하여 지혜와 정치적 지도력이 한 사람에게 겸비될 때까지 ...국가와 인류는 결코 재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사상이라는 아치의 키스톤이다. (39)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는 용기를 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도 준다. 신앙을 가지고 싸우는 자는 이중으로 무장되어 있는 셈이다. (42)

 

철학이라는 이 고귀한 기쁨은 주로 두 가지를 뜻한다. 명석한 사고, 즉 형이상학과 현명한 통치, 바로 정치학이다. 그러므로 선발된 젊은이들은 우선 명석한 사고를 배워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이데아에 대한 학설을 연구하게 된다.

 

한 사물의 이데아란 그것이 속해 있는 유()의 일반관명이나 작용하는 법칙 혹은 여러 법칙이다. 또는 그 사물과 그 유의 발전이 지향하는 완전한 목과 이상이다. (43)

 

심원한 이데아론, 즉 혼란한 감각 속에서 의미 있는 형식과 인과관계와 잠재적 가능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기술 (45)

이데아와 현실을 이어주는 설명

 

슬프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교육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이론적인 교육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이 남아 있다. 이들 철학 박사들은 철학의 언덕에서 사람과 사물의 세계라는 ‘동굴’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 정의나 추상은 이 구체적인 세계에 의해 검토되지 않은 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45)

영웅의 귀환이다. 이것에 성공하지 못하면 깨달음의 가치가 상쇄되고 만다.

 

철학이란 플라톤에 의하면 활동력 있는 교양, 바쁜 실생활과 가까운 지혜를 의미하며 서재에 갇힌 비실제적인 형이상학은 아니다. (48)

 

아내의 공유는 난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생식 관계에서 엄격한 우생학적 관리가 행해지는 것이다. (50)

 

정의에 대해서 플라톤은 말한다. '정의란 자기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 정의란 유효하게 일하는 협동이다. (52)

 

그래서 플라톤은 트라시마코스와 칼리클레스에게 또한 앞으로 영구히 출현할 모든 니체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정의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조화된 힘이다. 즉 여러 가지 욕망과 허다한 인간이 이상과 조직의 본질인 질서를 얻는 것이다. 정의는 강자의 권리가 아니라 전체의 유효한 조화이다. (53)

 

그리스도는 약자에게 친절한 것이 도덕이라 했고, 니체는 강자의 용감함이라고 했으며, 플라톤은 전체의 유효한 조화라고 했다. 완벽한 윤리학을 찾아내려면, 아마도 이 세가지 학설을 결합시켜야 할 것이다. (53)

 

무엇보다도 그는 도덕의 큰 요람인 가족을 파괴함으로써 국가의 심리적 기초가 될 협동적인 공사주의적 습관의 주요한 원천도 사라진다는 것을 잊고 있다. (56)

 

모성본능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아이가 나기 전까지, 아니 성장하는 도중도 강한지는 않다. 보통 어머니는 갓난아이를 기쁨보다 체념으로써 받아들인다. 갓난아이에 대한 애정은 발전이지 갑작스런 기적이 아니므로 아이가 자람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성적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지 못한다. (57)

 

플라톤에게 특히 결여되어있는 것은 유전과 변화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적 감각이다. 그는 이세계가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 되기를 지나치게 원했다. (58)

 

라 로슈푸코는어떻게 늙어야 하는가를 아는 자는 적다고 말했지만, 플라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솔론처럼 배우고 소크라테스처럼 가르치는 것이었다. 열의 있는 젊은이를 지도하고, 지적 동지애를 찾아내는 일이다. 학생들은 그를, 그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했다. 그는 그들의 철학자이고 지도자인 동시에 그들의 친구였던 것이다. (61)

우리 사부님 같구나. 사부님은 이런 생의 의를 알고 계시는 것이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후세의 많은 철학자가 신성한 분위기에서 양육된 것과 달리, 그는 약 냄새 속에서 잘났다. 그는 과학적 경향을 발달시킬 기회와 가극이 많았으며, 과학의 창시자가 될 준비를 처음부터 갖추고 있었다. (63)

 

필리포스는 이를 평하여, 이것은 국민이 아니라, 개인의 혼합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혼란에 질서를 세우고, 전 그리스를 통일된 강국으로서, 세계의 정치적 중심지로 부흥시키려고 생각했다. (65)

 

스승과 제자가 각기 정치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에서 질서를 정복한 일이 - 즉 두 위대한 마케도니아 인이 혼돈된 두 세계를 각각 통일한 것은 - 하나의 고귀하고 웅장한 계획의 양면이었다고 믿어도 좋다. (66)

 

아카데메이아는 특히 수학과 사변 철학 및 정치철학에 주력하였으나, 리케이온은 오히려 생물학 및 기타의 자연과학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67)

 

이 정도의 과학적 경향을 가진 사람에게 시가 결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시인이며 철학자였던 플라톤의 문장에서 넘치고 있는 문학적 광채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철학이 신화나 비유의 묘사로 구체화된 그리고 애매한 위대한 예술이 아니고, 전문적인고 추상적인 압축된 과학이다. (69)

 

논리학은 하나의 과학이다. 논리학만큼 지리한 것도 없으며, 그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이 새로운 과학이 갖는 암시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문답식으로 정의를 강요한 일이나 플라톤이 모든 개념을 끊임없이 순화시킨 데 있었다. (71)

 

진지한 의론에서는 중요한 모든 용어를 엄밀히 음미하고, 정의를 내려 두어야 한다. 그것은 논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논리학의 진수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사람의 정신을 가차없이 시험하지만, 그러한 작업이 끝난 뒤부터는 편하다. (71)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보편'이라는 무서운 문제를 둘러싸고 싸운 큰 전쟁터가 나온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된 긴 전쟁이었다. 그것은 최초의 전투였으므로 그 뒤 중세 유럽 전 지역에 실재론자와 유명론자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72)

 

개개의 인간 개개의 나무 개개의 동물은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나, 전체의 인간 또는 보편적인 인간을 기껏해야 사상 속에 존재하는데 불과하다. 그것은 정신적인 관념이지 객관적인 존재, 또는 실재는 아니다. (72)

 

시저보다도 오리려 로마를 사랑한 브루투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나는 플라톤을 사랑한다. 그러나 진리를 더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73)

 

오로지 비슷한 자들만이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며...(73)

 

삼단논법이란 세 개의 명제로 이루어지는데 제3명제(결론)는 다른 두 개의 명제(대전제 및 소전제)의 명백한 진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73)

 

난점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증명해야 할 점을 자명한 것으로 복 있는데 있다. (74)

 

올바른 추리의 지침서는 예의범절의 안내서처럼 사람의 마음을 높여 준다. 그것을 쓰는 것은 좋으나 그것은 우리를 고무시켜 고귀하게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용감한 철학자라도 논리학의 교과서를 향하여 세레나데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74)

 

소크라테스는 인류에게 철학을 주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에게 과학을 주었다. 물론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철학은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과학은 있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과 과학은 측량할 수 없는 진보를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74~75)

 

자연 속에는 공허나 진공은 있을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진공 속에서 모든 물체는 등속운동으로 낙하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므로 '가정되어 있는 이 공허는 아무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77)

 

시시포스처럼 문명은 몇 번이고 그 정상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그 언덕을 처름부터 다시 올라가는 수고를 되풀이한다. (78)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의 섭리는 자연적 원인의 작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81)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의 목적은 선을 위한 선이 아니라 행복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 그 자체를 위하여 행복을 구하는 것이지 그 이외의 무엇을 기대하여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예, 쾌락, 지력을 구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85)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더욱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행복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그랬다. 행복은 감탄이라고 일상에서 감탄하는 일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가 여행을 다니고, 예술을 감상하고, 책을 읽는 것 등 모든 우리의 활동은 감탄을 기대하고 하는 행위라고 했다. 삶의 구석 구석에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것이 나의 지상 목표인 것이다.

 

우정은 불행한 자보다는 행복한 자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행복은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불어나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의보다 중요하다. (87)

 

외적인 재산이나 관계는 행복에 있어서 필요하긴 하지만 행복의 본질은 역시 우리의 내부, 즉 원숙한 지식과 맑은 정신에 있다. 확실히 감각적 쾌락은 바른 길이 아니다. (88)

행복도 지속가능해야 한다. 일시적인 목표의 달성이나, 물질적인 것은 우리의 삶에 지속적이며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주는 것이 제한적이다. 즉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은 스스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행복과는 지속 가능한 점에서 다른 것 같다.

 

그는 인생의 재난을 위엄과 품위로써 견뎌내고, 환경에 선처하는 모습은 지략 있는 장군이 한정된 병력으로 전쟁을 인솔하는 것처럼 한다. 덕이 없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최악의 적으로서 고독을 두려워하나, 그는 자기 자신의 제일 좋은 친구로서 은둔을 즐긴다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인이다. (89)

 

그리스 정신은 훈련을 거치지 않고 행동이 지나치는 것을 제한하여 사고를 견실히 하는 전통이 결여되어 있었다. (99)

 

우리는 모두 인간 가능성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99)

 

과도를 피하라는 델포이 신탁의 명령을 너무 완벽히 지키고, 오직 극단을 배격하려던 나머지 마침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무질서를 두려워하여 노예제도의 두려움을 잊어버렸고, 확신이 없는 변화에 겁을 먹은 나머지 거의 죽음과 같은 일종의 무변화를 좋아하고 있다. (100)

변화와 확신은 동행할 수 있는 단어인가. 변화는 불확실성을 열매의 씨앗처럼 품고 있다. 변화는 불확실성을 모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의 자궁은 불확실성에 있다.

 

현명하게도 그는 다시 아테네에게 철학에 대해 죄를 범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이 도시를 떠났다. (102)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대비되기는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둔 선택에 있어서 현세에서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리라. 죽음을 피해서 이뤄야 하는 더 큰 사명이 있다면 사마천처럼 목숨을 부지하여 의미를 찾는 것이 더 귀한 삶일테니...

 

 

프란시스 베이컨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했을 때, 아테네의 정신은 소크라테스와 함께 죽었으며 단지 그들의 자랑거리인 제자 플라톤에게만 살아남았다. (106)

 

제논은 그의 아파테이아의 철학을 결정론 위에 세웠으나, 후대의 스토아 학파 크리스포스는 결정론과 동양의 숙명론은 구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107)

아파테이아. A 파토스로스로 초연. 격정이 없는 상태.

 

쇼펜하우어가 개인의 의지로 우주와 의지와 싸우는 일은 무익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스토아 학파는 철학적 무관심은 생존 경쟁에서 불공평하게 패배 당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인생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태도라고 주장했다. (107)

 

평화의 비결은 우리가 성취하는 일과 우리의 욕망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욕망을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이라 하였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라고, 로마의 스토아 학파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108)

 

아파테이아는 불가능하지만 쾌락은 - 반드시 감각적 쾌락은 아니지만 - 생활과 행위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정당한 목적이라는 확신이었다. ‘자연은 모든 생물이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도 나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 스토아 학파까지도 체념 속에 미묘한 쾌락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쾌락을 피할 것이아니라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다. (108)

 

일반적인 뜻의 쾌락이 아니라 아타락시아, 마음의 평온과 침착, 휴식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제논의 아파테이아와 아주 비슷한 데가 있다. (108)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자기 부정의 윤리와 거의 공산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해동포의 정치이상, 그리고 전세계 최후의 불의 심판이라는 종말론은 사상의 흐름 위를 떠내려 온 스토아 설의 편린은 아니었을까. (111)

 

값비싼 양피지 때문에 학문의 성직자의 독점물이 되었지만...오래 전부터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을 고대하던 인쇄술은 불을 붙인 폭발물처럼 갑자기 발달하여 혁명적인 계몽 사조의 영향을 도처에 보급시켰다. (113)

 

(베이컨)은 내가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리고 공공의 복리를 배려하는 것이 바다나 공기처럼 만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공권의 성질을 가진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가장 인류를 이롭게 하며, 어떤 일이 내 천성에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보니 인간의 생활을 문명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발명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115)

스케일이 다르다. 인류의 발전과 공공의 복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교육이 만들어서 되는 것도, 훈련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닐테다. 무엇이 그런 것은 소명으로 느끼게 하는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는 부분의 말이 마음을 무찌른다.

나도 나의 천성에 부합하는 무엇을 찾고 있지만 나를 떠나지 못한다. 김용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자기를 떠나서 시대에 부합하는 소리를, 신의 소리를 들으라 했지만 나는 아직도 내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렇게 갇혀 있다.

 

학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나태이다. 학문을 너무 많이 장식으로 쓰는 것은 허식이다. 학문의 척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학자 기질이다. ....교활한 사람은 학문을 욕한다. 단순한 사람들은 학문을 감탄한다. 총명한 사람은 학문을 이용한다. 학문은 학문의 용도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학문 이외의 지혜, 즉 관찰에 의해서 얻어진 학문 이상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118)

학문을 하기 전에 학문의 본질을 생각하고 왜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 자발적 학습의 전제요건이구나.

 

진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리를 손에 넣음으로써 가치 있는 결과를 낳아 인간의 생활에 무한히 많은 이기를 부여할 수는 없을까. (119)

 

'혀로 맛보아야 할 책도 있으며 꿀꺽 삼켜야 할 책도 있으나,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은 적다' (119)

저자는 그런 책이 베이컨의 <에세이>라고 한다. 언제 한번 꼭 읽어보아야겠다.

책을 잘 고르는 것은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인생을 헛되게 쓰지 않는 것이겠구나. 흥미를 떠나서 좋은 책을 고르는 지혜 혹은 방법을 생각해보자.

 

(스토아 철학)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철학이다. 왜냐하면 본능이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성은 가끔 은폐되고 압도될 수 있지만, 소멸되는 일은 드물다. 강압은 그 보복으로 본성을 한층 광포하게 한다. (121)

욕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내 스스로에게 일어난 욕구가 스스로 적절히 해소되지 않으면 그것은 내부에서 다른 얼굴의 비뚤어진 욕구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다른 얼굴로 변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적절히 해소시켜야 한다.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친구를 구하는 자는 자기 마음의 식인종이다." (123)

그렇다면 친구를 올바르게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 마음을 터 놓고 위안을 주고 받으면 좋은 우정이 아닌가?

베이컨에게 있어 친구는 주로 세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130)

위의 글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베이컨의 친구에 대한 생각은 이곳에서 단서를 얻었다.

 

노련함은 그 연령의 범위 내에서 그들을 지도하지만, 새로운 일에서는 그들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123)

 

이론보다는 실천을, 사변적 논리보다도 특수한 구체적 결과를 노리는 점 등이 다른 모든 철학과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힘이지, 단순한 논증이나 장식은 아니다. (127)

베이컨 철학의 정수이다.

 

결국 과학보다는 철학이 베이컨의 애인인 것이다. 철학만이 소란과 비탄에 찬 생활에까지 오성의 고귀한 평화를 줄 수 있다. 학식은 죽음과 비운의 두려움을 정복하고 진정시켜 준다. (131)

 

철학의 최고의 효과는 산업적 환경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욕을 버리고 정신을 탐구하는 일이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 행복을 먼저 탐구하게 하는 바, 그 밖의 것은 행복으로 보충되거나 아예 결핍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작은 한 조각의 지혜도 영원한 기쁨이다. (131)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성을 바로잡는 일이다. 우리는 편견과 선입관을 씻어 버리고, 이즘과 추상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

 - 종족의 우성으로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오류의 추리이다.

 - 동굴의 우상은 개인 특유의 오류다.

 - 시장의 우상은 '인간 상호의 교섭 및 교제에서' 생기는 우상이다.

 - 극장의 우상은 비현실적이고 극적인 형식으로 자신이 만든 세계를 묘사하는 무대에 불과한 것이다.  (136)

다른 곳에서 조금 더 찾아본 우상이론은 다음과 같다.

종족(種族)의 우상: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만 자연이나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 오는 편견

동굴(洞窟)의 우상: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판단하려는 개인적 편견

시장(市場)의 우상: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 없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편견

극장(劇場)의 우상: 자신의 소신 없이 권위나 전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맹신에서 생기는 편견

 

스피노자

 

그 후에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연 및 신과 동일시한다. (174)

범신론적 사상가. 데카르트의 정신-육체라는 이원적론 일신론에 반대함.

 

데카르트가 물질과 물체 속에서만 본 기계작용을,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 속에서도 본다. 그것은 결정론의 세계이며, 계획의 세계는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목적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이므로, 모든 과정에는 그 같은 목적이 있다고 상상한다. (174)

스피노자의 사조의 기본을 이루는 결정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 논리적 필연이다'라는 사조이다. 범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라고 보아도 되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스피노자에 대해서 범신론적 우주론 속에서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주 고결하게 사는 법을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 정신적 태도의 고양을 주장하고 있다라고 스피노자를 평했다.

 

모두 우리가 사물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고 전체로서의 자연의 질서와 연관에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우리 자신 이성의 명령에 따라 정돈될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175)

우주적 결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 중 악의 결정론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전체로서의 우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 오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물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므로 서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177)

데카르트는 이원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유한과 무한을 구별하고,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였는데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체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세 가지 견해 (180)

1. 부처 및 예수의 윤리학

2. 마키아벨리 및 니체의 윤리학

3.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미움은 미움으로 갚는 것보다 사랑함으로써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간단하다. 왜냐하면 미움은 보복 당한다는 감정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 스피노자는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믿고 있는 것 같으나 - 사랑은 사랑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는 관계상 미움과 사랑과의 감정적 갈등에 고민한다. 그 결과 미움은 무너져 힘을 잃는다.

가능한 것인가.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이 아닌 바람직한 혹은 타고난 깨끗한 마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는 이성 없는 격정이 맹목이듯, 격정 없는 이성은 죽은 것임을 알고 있다. (183)

정반합의 상승처럼, 중용의 지혜처럼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균형이다. 균형은 지혜에서 나온다. 이성과 격정의 조화처럼 조화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에티카>의 마지막 정리는 다음과 같다. '최고의 복은 덕의 대가가 아니라 덕 그 자체다.' (188)

 

볼테르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읽기 전에 볼테르를 먼저 찾아본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 놓겠다." 볼테르가 평생 견지한 '관용(똘레랑스)'에 대한 견해를 잘 담고 있는 문장이라고 한다. 그를 알기 전에 이미지를 가져본다.

 

분명히 그는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활동했으며, 많은 사업을 이룩했다. ‘일을 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게으른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은 선하다라고 그는 말했다. 볼테르는 시간에 매우 인색했다고 그의 비서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생을 견디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일의 필요를 느낀다. 일은 오래할수록 대단한 즐거움이 되어 인생의 이상과 희망이 된다.’ ‘만일 자살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나 일을 찾아라’ (200)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를, 독일은 종교개혁을, 프랑스는 볼테르를 가졌다. (201)

 

그는철학을 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는 유명한 금언을 존중했던 것이다. (204)

 

라 메트리는 손가락을 덴 아이와 같이 깜짝 놀라 떨어뜨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사상을 주워서, 대담하게도 전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며 사람도 그 예외는 아니라고 발표했다. (229)

 

사람에 따라서는, 한 권의 작은 책을 써도 장황한 자가 있다. 볼테르는 1백 권의 책을 써도 언제나 간결하다.’ (231)

 

그는 단순한 문인이기를 그만두고 행동파 사람이 되었으며, 전투를 위해 철학을 버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을 변화시켜 무정한 다이나마이트로 만들었다. (234)

 

그가 자신을나는 나의 생각을 꽤 명석하게 표현한다. 나는 깊지 못하기 때문에 투명하게 보이는 시냇물 같은 것이다.’ 라고 평한 것은 지나친 겸손이다. (235)

 

그는 고대의 모든 민족이 거의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속단하여 신화는 모두 사제가 발명했다고 한다. ‘최초의 성직자는 최초의 어리석은 자를 만난 최초의 사기꾼이었다.’ (236)

 

과거는 문으로 쫓아내면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문제는 어떠한 변화에 의하여 우리들이 그 속에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불행과 부정을 감소시킬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일이다.. (243)

저자는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어디 뿌리 없는 나무가 있겠는가.

 

루소는 온통 열과 공상으로 가득 차 있고, 고귀하지만 현실성이 빈약한 몽상가이며, 파스칼과 같이 마음은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부르주아의 우상이었다. (244)

 

 

칸트와 독일 관념론

 

(로크는)태어났을 때는 마음은 백지, 즉 타블라 라사이고 감각적 경험이 그 위에 잡다한 방법으로 글씨를 쓴다. 그리고 마침내 감각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관념을 낳는다. 이것은 결국 다만 물질적 사물만이 우리의 감각에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되어 아무래도 유물론적 철학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서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254)

로크는 이 세상 물질이 두 가지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양, 무게, 수량과 같이 일차성질의 것 즉, 핵심적인 성질로 변하지 않는 것이고, 이차성질은 색깔 맛, 소리 등 그것을 인지하는 주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물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나지 않을까. 소리는 듣는 주체의 고막이 없다면 들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소리는 듣는 주체가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로크의 인식론인 듯하다.

 

루소(1712~78)는 프랑스에서 계몽주의의 유물론 및 무신론과 싸운 단 한 명의 투사였다. (257)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하여 루소를 생각하면 주류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낸 용기 있는 투사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루소는 낭만주의가 나은 아들이다. 낭만주의는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뜨거운 가슴을 안고 뛰어가는 것이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러셀은 그의 책 <서양철학사>에서 루소는 후일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자를 나았고, 로크는 루스벨트와 처칠을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자녀 5명을 고아원으로 보냈다. 볼테르와 죽기살기로 싸웠습니다. 서로를 비하합니다. 그는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았다.

 

칸트는 <에밀>을 읽었을 때, 이 책을 통독하기 위하여 그의 일과로 삼았던 보리수 그늘 밑의 산택을 잊었다. 무신론의 암흑 속에서 빠져나갈 자신의 길을 찾으며, 이들 초감각적인 면에 관해서는 감정이 이론 이성보다 앞선다고 대담하게 단언하는 사람을 발견한 것은 칸트 생애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결국 무신앙에 대한 궁극적 회답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종교의 모든 조소자와 의혹자는 추방되었다. 이들 논의의 실마리를 총괄하고 버클리 및 흄의 이념을 루소의 감정과 결합시켜 종교를 이성에서 보호하는 동시에 과학을 회의론에서 수호한다는 것이 임마누엘 칸트의 사명이었다.

칸트 철학의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나는 이미 내가 걸어가려는 길을 택했다. 나는 이 길로 갈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내가 이 길로 걷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빈곤과 무명을 견디며 15년 동안 최대의 저작을 구상하고, 쓰고, 그리고 고쳐 쓰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을 끝마친 때는 1781년으로, 그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처럼 느리게 성숙한 사람은 없었고, 또 이처럼 철학의 세계를 기습하여 전복시킨 책도 없었다. (262)

황야의 늑대와 같은 견딤이 있었구나. 15년 동안 동굴 같은 세월을 보냈구나. 그의 나이 57세가 되도록 그는 준비하고 공부하였구나.

 

순수이성이란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감각적 경험에서 독립한 인식, 다시 말해서 정신의 내적 본성 및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63)

순수이성 + 이성비판의 합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세계는 그 질서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에서 세계를 질서 있게 하는 사고에 의해 있는 것이다. 사고는 결국 과학과 철학이 되어가는 경험 분류의 제 1단계인 것이다. (269)

 

베토벤은 인생의 두 가지 경이에 대해서 서술한 칸트의 말 중 "내 머리 위에는 별이 총총 빛나는 하늘, 내 가슴에는 도덕법칙'이라는 저 유명한 말을 감탄하면서 인용하였다. (286)

러셀은 칸트의 윤리학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한다. 칸트는 도덕의 필요조건을 제시하였지만 충분조건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쇼펜하우어

 

1848, 이상과 노력에 대한 환멸을 맛본 유럽은 1815년의 절망을 표현한 이 철학자를 거의 환호의 아우성으로 맞아들였다. 과학의 신학에 대한 공격, 빈곤과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적 탄핵, 생존경쟁의 생물학적 강조 이런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도와서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마침내 높아졌다. (304)

1848년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 혁명 발생,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등이 시대적 배경이다. 1815년의 절망은 워털루 전투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는 해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거대한 흐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 읽고 학습할 것을 메모함.

 

 

부의 획득에 바쳐지는 인생은 만일 우리가 부를 기쁨으로 바꾸는 법을 터득하고 있지 못하다면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교양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기술이다. (323)

철학적 사조를 떠나 삶을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 하나이다. 부라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시대를 보아, 역사를 보아 자명하다. 왜 부를 원하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부라는 것이 나의 삶의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개념적으로 정의해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나의 삶에 대한 정의가 수반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은 의지를 순화시킨다. 그러나 철학이란 경험과 사고로 해석해야 하며 단순한 독서나 수동적 공부로 알아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사상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사상을 제한하고 억압할 것임에 틀림없다. 대부분 학자의 독서벽은 자기의 머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일종의 진공의 흡입력이며, 두뇌의 공허는 그만 남의 사상을 빨아들여 버린다. ... 어떤 논제에 대하여 스스로 사색하기 전에 남의 것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독서한다는 것은 남이 자기를 대신하여 생각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단순히 남의 정신적 과정을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 ... 그런 이유로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소비하는 사람은... .서서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 자기의 경험은 일종의 본문이고, 성찰과 지식은 그 주석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험이 적고 성찰과 지식이 많은 것은 각 페이지의 본문은 두어 줄 뿐인데, 주석은 마흔 줄이나 되는 책과 같은 것이다.(324)

나를 돌아보게 하는 구절이다. 책을 통한 학습은 살기 위해서 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나는 책을 읽기 위해서 사는 삶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전말이 도치되면 안 된다. 내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책을 통해서 생활과 실천을 도울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책에 목적을 두는 것은 철학자나 학자의 길이다. 나는 생활인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 책을 보고 있음을 잊지 말자.

 

첫째 권고는 책보다 생활이 먼저이고, 둘째 권고는 주석보다 본문이 먼저라는 것이다. 해설자와 비평가의 것보다는 창작자의 것을 읽어야 한다. ‘철학사상은 오직 그 사상을 만든 사람에게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철학의 불멸의 스승을 그 스승들의 저서라는 조용한 성소에서 찾아야 한다.’ 천재의 한 권의 책은 천 권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324)

김용규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한다. 세상에는 괜찮은 책이 많지 않다라는.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가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명성도 허무맹랑한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의 거처로서 남의 머리는 참으로 한심한 장소이다.' (325) ★★★★★★★★★

최고의 한 문장이다. 남이 내린 행복에 대한 정의는 나에게 불용하다. 나는 내 스스로 행복, 사랑, 자유, 돈 등에 대한 가치를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부합되게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체험하고 자신에게 실험하고 그래서 알아가는 인생이 의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서 있는 지금의 자리가 너무나 고맙고 절실하다.

 

끝없는 의욕의 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인생을 지적으로 바라보며 동서 고금의 위인의 업적과 진해지는 일이다. (325)

통째로 쇼펜하우어의 인생의 지혜, 철학을 통째로 내 안으로 녹이고 싶다.

 

우리는 여자와 관계가 없을수록 좋다. 여자는 '필요학' 조차도 못 된다. (332)

여성 비하의 부문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한 인식이 충돌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현자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여성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비뚤어진 인식체계를 가지게 되었을까.

찾아본 바로는 현 시대에서는 부적합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전체적인 철학사조에는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하다.

쇼펜하우어가 여성을 혐오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사회에 의해 발달된 여성의 의존성향 때문이다. 의존은 쇼펜하우어에겐 해선 안되는 행위였다. 주의주의자였던 그에게 의존이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의 박약을 의미하고, 주체로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존이라는 것을 주의주의 사상만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체로서의 삶을 역설하는 쇼펜하우어에게 의존성향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성들은 공공연하게 의존성향의 행동들을 행하고 있었고, 쇼펜하우어은 의존성향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이용하는 여성들에 대해 혐오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다른 여러 가지 욕망을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않겠지만 만족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행복에 대하여 옛 지혜는 가르친다.

'행복은 소유와 포만이 아니라 성취에 있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을 구하는 것 보다 자기의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구하려고 애쓴다. (335)

후회에는 해보고 나서 하는 후회와 해보지 않아서 하는 후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해보지 않고서 하는 종류의 후회는 오래간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비뚤어진 다른 욕망을 낳는다는 부분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깊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한 것을 시도하고 실행해 보는 것. 그것의 합이 결국은 인생이 될 것이다.

 

 

스펜서의 불가지론

 

‘나쁜 일 속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353)

 

전쟁이 추방되고 극복될 때까지 문명은 파국에 낀 불안한 막간의 만담인 것이다. ‘고도한 사회상태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전쟁의 소멸에 달려있다.(365)

 

“사회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노동의 통제는 강제에서 벗어난다. 여기에 우리는 협동노동과 모순되지 않는 강제가 최소한도까지 축소된 형태를 발견하게 되며, 각 성원의 대다수에 의해 세워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규칙에 따를 뿐이다. (367)

진정한 ‘인권’이란 대체로 생활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및 만인과 평등한 조건 아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이다. (372)

 

만일 누구나 모든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도 타인의 이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중하게 사양하는 도가니 속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372)

 

이타적 행위는 사회적 효용의 덕택으로 자연도태에 의하여 본능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본능활동과 같이 강요되는 일 없이 유쾌한 감정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의 자연적 진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완전한 국가로 접근시킨다. (373)

 

 

프리드리히 니체

 

'꼬마 목사', '교회 안의 예수'. 그는 혼자서 성격을 읽거나 남에게 차분하게 들려주어 눈물을 글썽이게 한 것이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의 속에는 강한 인내의 정신과 높은 자존심이 잠재하고 있었다. (385)

이런 것은 어떤 것인가? 타고나는 것인가. 자라는 환경과 무관하게 내부에 자리잡게 되는 기질과 같은 것은 DNA안에 유전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인가.

 

1865년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것이말로 '세계, 인생, 자기의 마음을 놀랄 만큼 훌륭하게 비추러 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책을 하숙으로 가지고 돌아가서 한 자 한 자 파고들 듯이 읽었다.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직접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  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이 사람의 신념을 느꼈고, 눈앞에서 그 사람을 보는 듯이 생각되었다. 한 줄 한 줄이 모두 포기, 부정,체념을 부르짖고 있었다. (386)

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책 한 권을 읽을 때 이런 마음으로 읽어야 하리라. 윌 듀란트도 앞서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혀로 맛보아야 할 책도 있으며 꿀꺽 삼켜야 할 책도 있으나,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은 적다'

 

매우 고귀한 그리스 예술은 이 두 개의 이상, 즉 디오니소스의 끊임없는 남성적인 힘과 아폴론의 조용한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결합이었다. (388)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는 독일의 혼에 어떤 분별없는 자만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만큼 정신적 성장에 해로운 것은 없다. (390)

내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집단, 혹은 개인이 어설픈 승리에 도취되게 되면 이 승리를 대상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드는 것이다. 승리를 나에게 약이 되게 하는 것은 평소에 준비하는 자에게 또 다른 승리, 더 큰 승리를 만끽하게 하는 것이다.

 

나약하고 절망적인 낭만주의자 리하르트 바그너는 갑자기 십자가 앞에 쓰러져 버렸다. (392)

니체가 좋아하는 바그너에게서 떠나게 된 바그너에 대한 그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다.

 

팔린 것은 40부였고, 7부는 기증본. 수령증을 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았다. 니체처럼 이렇게 고독한 사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396)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절대적인 우상이 아니었을까. 내적 상처를 극복한 어떤 절대적인 힘을 그는 가지고 싶었을지 모른다. 요즘 TV에서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를 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모한 집착. 그리고 본질과 허상이 나중에는 헛갈리는 정신착란의 상태. 나의 생각이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밖으로 방출되지 않는 본능은 모두 안으로 향한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며, 이와 함께 영혼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생장되기 시작한다." (402)

해소되지 않는 욕구는 다른 얼굴의 욕구로 변화 변이된다는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대해서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무작정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욕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욕구의 본질에 대해서 잘 살피고 안내하여야 한다.

 

약자는 불협자이며, 데카당스다.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것, 이것만이 최고의 일인 것이다. '평범한 군중의 일원이 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지 말아야 한다.' (406)

나에게 이 말은 맞는 말이다. 나 또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듣는 이에 따라 이것은 허튼 소리일 수도 있고, 그저 스트레스성 자기계발의 문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감정들 사이에서 취사선택을 하는 지혜. 그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수백만의 유럽인들이 보나파르트의 목적을 위하여 만세를 외치면서 기꺼이 전사한 것은 얼마나 장관이었나! (407)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에 갇힌 니체를 보는 듯하다.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드는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초만원인 교회에서 긴 예배가 끝난 뒤, 넓은 곳에 나와 신선한 바람을 쐬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416)

....나의 첫 책이 세상에 나와서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삶에서 청량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책. 그런 노래와 같은 글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예수를 가리킨, 다음 말은 자신에게 더욱 맞는 말이었다. '그는 너무도 빨리 죽었다. 만일 그가 좀더 원숙한 연령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그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하기에 충분한 고귀한 인간이었다. (421)

 

앙리 베르그송

 

지식이 너무 많으면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고, 나이가 젊은 신봉자는 대개 배신자가 되기 쉽다. 젊었을 때의 죄인이 늙어서 성자가 되듯이 말이다. (428)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갉아먹고 살이 쪄서 나아가는 연속적 진전이다.’ 그것은 ‘과거는 그 전체가 현재 속에 연장되어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거 어느 작은 부분만을 가지고 사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체를 가지고······욕망하고 뜻하고 행동한다.’ 시간이 쌓여 있는 이상,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발짝마다 새로운 축적이 생기므로 ‘한 순간도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아직 예견하지 못한 어떤 것이다.(429)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스스로를 무한하게 형성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모든 사상(事象)은 시간과 지속, 생성과 변화일 것이다. (430)

 

삶은 목표, 유전적 성질 및 기억이 풍부해짐에 따라 자유스러운 선택의 영역이 넓어져, 여러 반응방법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의식이 생긴다. 의식이란 반응의 예행연습이다. ‘의식은 생물의 선택 능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식은 행동을 둘러싼 가능력(可能力)으로 범위를 비쳐 준다. 의식은 하고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격을 막는다.(430)

 

선택은 창조적 활동이며 창조적 활동은 힘들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며, ‘편안히 자족하는’ 동물들의 선택이 없는 기계적인 생활을 힘없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당신 밑의 개가 공자님과 같은 태평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그것이 철학적 평정, 즉 깊은 연못의 조용한 수면은 아니다. 그것은 본능적 확신이며 선택할 필요도 없으며 선택할 수도 없는 동물의 평온이다. (431)

 

우리들이 1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은 반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과 똑같이 쉬운 일이며, 사고의 일순간은 전 세계를 일주할 수도 있다. (433)

 

생명이란 창조적인 힘,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고집함으로써 기관을 형성해 나아가는 힘이다. (442)

 

베네데토 크로체

역사를 적는 철학가는 우주의 계획을 뒤쫓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관계를 발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또 역사를 적는 철학자는 현대에 의의가 있고, 현대를 계발하는 과거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자연의 묵시(黙示)로 하여 인간의 거울로서 서술한다면, 역사는 마침내 나폴레옹이 이름 붙였듯이 ‘유일한 진리의 철학 및 심리학’이 될 것이다. (449)

 

예술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대상을 확실하게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않고 느낌으로써 표현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449)

예술의 불가사의는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닌 사상을 잉태하는 데 있다. 외적 표현 따위는 기계적인 기교 문제, 손재주 문제에 불과하다. (449)

 

버트란드 러셀

 

자유는 가장 좋은 선이며, 자유 없이 인격은 있을 수 없다. 생활과 지식은 오늘날 매우 복잡해졌으므로 다만 자유 토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오류와 편견 사이에서 진리인 그 포괄적인 관점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교사들까지도-제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여도 상관없다. 이렇게 정반대의 견해로부터 소신의 이성적 상대성은 생기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쉽사리 무기(武器)에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와 전쟁은 주로 교정된 사상이나 독단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시원한 바람처럼 ‘현대’정신의 노이로제와 미신을 날려버릴 것이다. (458)

 

조지 산타야나

‘사람들이 다른 사고방식을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만일 자기가 할 수 있으면-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조망이 더욱 선명하게 전개되도록 마음의 창문을 잘 닦아야 한다.(466)

생각의 주관. 세상의 중심에 무엇을 둘 것인가.

 

우리가 사람인 것은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필경 꽃과 그 종자, 아이와 그 웃음은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기계보다 그 이상으로 우주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아마도 자연을 죽음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생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470)

 

‘지혜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묻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한쪽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세상을 적대시하지 말고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 아름다움도 고통도 순식간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순간의 고통을 슬피 탄식하는 것.(478)

 

윌리엄 제임스

‘결론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도대체 누가 끄집어냈는가. 말할 수 있는 예언도 없으며, 들려줄 조언도 없다. (490)

 

존 듀이

어떤 의미에서 학교는 정신적 성장의 수단을 제공할 뿐이고, 나머지 일은 경험의 흡수와 해석에 달렸다. 참다운 교육은 우리가 학교를 졸업한 위에 시작되는 것이니, 우리가 죽기 전에 교육을 그만둘 이유는 전혀 없다. (492)

 

변화와 성장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없으며, 사고가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은 없다. (494)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말해보는 <철학이야기>

윌 듀란트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철학에는 즐거움이 있으므로 형이상학의 신기루까지도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이하학적 생존의 '조잡한 필요'에 의해 사상의 언덕에서 경제적 투쟁과 획득의 시장으로 질질 끌려 내려갈 때까지, 모든 학생들이 느끼는 매혹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플라톤이 말한 대로 철학이 이른바 '귀중한 기쁨'이었던 멋진 청춘의 나날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때의 깨달을 듯 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육욕이나 이 세상의 사소한 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찬란하게 느껴졌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지혜에 대한 젊은 날의 사랑의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나이 40대 초반인 1926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세계 1차 세계대전을 눈으로 보고, 무수한 죽음을 목격했던 역사가이자 철학자는 아마도 삶의 지혜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 같은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라는 개인적인 짐작을 해봅니다.

그래서인지 <철학이야기>는 혜안이 깊은 인생 선배가 과거의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참다운 인생에 대한 가치들을 내 앞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전에 읽었던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서양 철학의 사조를 한 발짝씩 걸으면서 꼼꼼한 발걸음으로 논증과 논리를 통하여 살펴본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성큼한 걸음으로 고대에서 근대까지 아홉 명의 철학자의 삶과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통하여 사상의 의미와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자의 혜안을 통하여 각 철학적 사조들이 지닌 한계를 단순한 비평이 아닌 따뜻한 인간적 시선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흡입되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듯합니다.

저자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이 책 아닌 인류 역사의 흐름과 철학의 흐름을 예리하게 찌르며 핵심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자라면

먼저 구성적인 측면에서 간단한 느낌들만 정리하기로 한다. 주요 챕터의 뒷부분에 배치함으로써 읽는 중에 자꾸 앞, 뒤를 왕복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책 중에서 김용규 선생님의 <>의 부분이 나에게는 가장 적합한 것 같다.

 

그리고 철학적 사조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철학자의 요약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괄적인 것이 그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책을 읽는 어려움이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

(스피노자)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인 바뤼흐 스피노자(163211 25 - 1677 2 21) 18세기 계몽주의와 근대 성서 비판의 토대를 놓은 유럽 17세기 철학의 합리주의자 세 거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자로 손꼽혀 헤겔은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혹은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대작 《에티카》에서 실체를 유한과 무한으로 나누는 데카르트의 정신-육체 이원론적 일신론에 반대하였으며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니체)

19세기의 독일 철학자이며 음악가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 10 15 ~ 1900 8 25)는 특유의 문체로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고 그의 영향력은 특히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실질적으로 남아있다. 그는 기독교와 이상주의의 도덕을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 '데카당스'라고 배격하고, '초인' '영원 회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을 수립하였고, 특히 《즐거운 지식》에서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적 도덕주의를 뒤집었으며, 민주주의, 자유주의, 힘의 논리 등의 마키아벨리즘, 권위주의, 반유대주의 등에 강력히 비판, 반대하였다.

 

이런 개요를 앞에 둠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었던 철학자에 대한 기존 지식과 정보를 상기하게 되고, 전체적인 주요 틀을 머리에 넣음으로써 그 후에 설명될 세부적 요소들의 이해에 대한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로서 철학에 대해서 써본다는 생각은 일전에 <서양의 지혜> 북리뷰를 통해서 기술한 것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에 복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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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16:39:28 *.124.233.1
저도 북리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제가 처해 있는 여건으로 볼 때,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북리뷰를 읽는다고 가정해 보면
내용이 좀 더 슬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라면 '저자에 대하여'에 많은 흥미를 가질 것 같구요,
'내가 저자라면'은 키워드 탐색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시간과 자원의 포트폴리오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처럼 시간에 쫓기는 사람에겐 말이죠.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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