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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11시 08분 등록

조셉 캠밸에 대하여

 

1904 3 26 미국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출생,

1987 10 31 호놀룰루에서 사망(83)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

취득. 대학논문의 주제는 중세의 아더왕이야기를 다룬 것이었다.

1927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 특히 파리 대학과 뮌휀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 1929년 미국으로 돌아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남.

당시 대공황으로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5년 동안 칩거하며 독서와 습작에 몰두. 1934년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 38년간 새러 로렌스 대학에서 신화를 가르쳤다. 1938년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

 

저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49년 그의 대표작.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함. [신의 가면] 4부작 1959~1968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972   [신화의 이미지]1974 [세계신화지도] 25  1983~1989

 

캠벨은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성장.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탐독.

인디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 그 신화에 어릴 때 수녀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 비교신화학에 입문하게 된다. 부모님의 별장이 델라웨어 인디언들의 거주 지역 숲 속에 있었던 것이 이 방면에서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카톨릭 신앙과의 충돌은 훗날 학문적인 연구를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미국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신화의 힘’ 1988 이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사후에 방영된 프로임.

켐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

본 텍스트는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 집. 오늘날까지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음.

 

캠벨의 사후 그의 아내와 뜻있는 사람들이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음.

 

루카스 감독은 저자가 쓴천의 얼굴을 한 영웅을 읽고서 감동하여스타워즈를 구상했고 캠벨을 찾아가 도움말을 구했다. ‘스타워즈는 영웅의 탄생과 수난, 아버지와의 만남이란 동서양 신화의 공통분모에 SF 상상력과 특수효과를 입혀서 세계적으로 성공.

 

출처 : [신화의 힘] 조셉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윤기 옮김

      http://www.myfaith.co.kr/book-2/campbell.html   

      http://kin.naver.com/open100/print.nhn 

      http://www.movieweek.co.kr/article/article_print.html

Daum백과사전/위키백과/

 

개인적 평가

 

캠벨은 전문가와 잡학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공부를 해야 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지를. 본인 같은 잡학가가 훨씬 인간적이란 사실을 이야기한다. 또한 종합적인 사고가 가능하다고도 이야기한다.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을 본다. 요즘은 전공도 많이 세분화 되어 있다. 본인의 전공이 아니면 다른 분야는 잘 모른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는 신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지금도 텍스트를 다 읽고 리뷰를 적고 있지만 아마 몇 번은 더 읽어야 깊이를 조금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내게 종교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신화를 접할 수 있었고, 너그러운 부모님 덕에 본인의 관심사인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교신화학자라는 새로운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종교를 뛰어넘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화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 아직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불교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접했던 내용들도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도 내게는 생소한 부분이다. 그 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종교를 넘어서는, 저자가 연구해온 신화는 많은 사람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주제로 다가갔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나 현대의 우리나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에 한편 다행이고 한편 놀랍기도 하디.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서문 중. 내면적 체계의 벽에 달라붙어 있는 그 한 가닥을 생각하게 되었다. 

 

THE POWER OF MYTH

신화의 힘

 

빌 모이어스의 서문

 

조셉 캠벨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몇 주일 동안 나는, 어디에 가든지 줄곧 그 분을 생각했다.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딴 생각을 해.

원태연 시집제목이다. 2000.7.28 내게 온 시다. 일단 시집 제목이 마음에 와 꽂혔다.

 

안 그래도 보고 싶어 죽겠는데

전화벨만 울려도 눈물이 날것만 같은데……….비까지 오다니

 

언제 어디서나 머릿속과 마음속에 누군가를 품고 다닐 때가 있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그들에게 사이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각기 따로 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이 생긴 것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왜 하필이면 신화입니까?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캠벨/”그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이것이 나의 첫 대답입니다.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애써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대학의 캠퍼스 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나날의 내면적 삶이, 우리의 전통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26p

 

이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다. 연구원은 왜 하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그 동안 번잡하게 살아온 내 삶에 조금 깊이를 더할려고 한다. 물론 연구원2년하고 책 한 권 쓰는 것으로 내 삶이 얼마나 깊어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있는 것 보다는 1밀리미터라도 깊어지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로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6p

 

그는 책임감이 강한 좋은 아버지이긴 합니다만,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평생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27P

 

이 땅의 아버지란 역할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쉽지 않은 역할일까?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그것을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함은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이렇게 용감하게 평생/ 한 번도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삶이 아닐까 싶다.

 

보헤미안 무리 중 하나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위대한 악마적 미학의 길을 모험하고, ‘인류를 경멸하며 냉엄하고도 긍지에 차 있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선망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든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27p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p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9p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29p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29p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p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p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세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p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왠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31p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왠 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동의는 된다. 돌아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렵지 않은 일을 그르쳐 놓은 것은 결혼이라는 의례를 치르는데 실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도 있고, 어정쩡하게 만들어진 틀 안에 나를 밀어 넣음으로써 책임회피를 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적정한 나이 적정한 상대 그 적정함은 관연 누구의 잣대란 말인가. 스스로가 정확한 자를 소지하지 있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1p

 

이만큼 살아옴에 기대 이제 알 것 같다. 가슴이 알려주는 제대로 된 상대를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인식은 잘못하면 사람을 헛갈리게 합니다. 그릇된 상대와 동일시하는 인식을 가능하게 할 터이니까요. 32p

 

그렇다면 결혼에서 필요한 기능은 중요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군요? 즉 아이들을 통해서 영속하게 되는 결혼 말씀입니다만/못 되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결혼의 기초적인 측면 같은 것입니다. 결혼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단계가 있어요.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자연의 충동을 쫓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아이들이 가정을 졸업하고 나면 부부만 남게 되는 단계가 옵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40~50대에 무수히 갈라서는 것을 볼 때마다 놀라고는 한답니다.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는 정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삶을 함께 산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32p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서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p

 

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둘이 서도 귀챦지 않으면서 관계 속에서 정체성를 찾을 수 있는 상대.

결혼에 적합한 제대로 된 상대. 과연 쉬운 일일까?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3p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34p

 

내가 어릴 때, 우리 어린이들은 반바지를 입었어요. 아시지요? 무릅까지 오는 바지 말입니다. 긴 바지를 입게 되는 순간은 굉장한 순간이었지요. 요즘 아이들은 그런 굉장한 순간을 경험할 수 없어요. 내가 보니까. 심지어는 다섯 살배기까지 긴 바지를 입고 뛰어다니던군요. 이런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닌 어른이다. 그러니까 유치한 장난은 그만 해야 한다. 이런 걸 깨닫는 순간이 올까요? 35p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문화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등을 말합니다)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한 방면에서 어엿한 전문가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 전문 학자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면 이런 경향이 있다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말이지요. 불교를 공부하자면 적어도 동양학을 논의하는 유럽의 몇 개 국어, 말하자면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이탈리아어는 알아야 합니다. 37P

 

뿐만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일본어, 티베트어, 여기에다 몇 개 국어를 더 보태야 합니다. 머리가 희어질 노릇이지요. 그런 전문가와 이로쿼이즈 인디언과 알곤퀀 인디언의 차이가 뭐냐고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 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38P

 

신화에 우리 삶에 유효한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한 분이 침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전까지는 신화 하면 학자들이나 우려먹는 것인 줄 알았지요. 침머의 말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느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어요. 38P

 

신화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옛 이야기들이 선생님께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던 때의 일 말씀입니다.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모티프와 유사함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힉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39P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 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39P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게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p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2p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개인이 전시戰時에 한 일을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전시에 그 개인은 개인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개인보다 훨씬 상위 개념인 어떤 무리, 바로 그 자신이 섬기기로 한 무리의 대리자로서 행동한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런 사람의 행동을 개인으로서의 행동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부적당한 것이지요. 42p

 

상식의 잣대, 전시의 특수상황, 개인적인 삶, 대리자의 역할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적당한 것으로 이해 받지는 못한다.  잣대라고 하는 것이 시대에 따라 용인되는 수준이 달라지는 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인되는 수준의 잣대는 있다. 우연한 기회에 또 다른 우연으로 새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이 본인에게 발생한다면 부적당하다고 항거하지 않겠는가. 의례로서 행해지던 것이 그 의미를 다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영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46P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 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47P

 

내게는 꽃과 풀과 대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꽃을 보고 그것의 맛은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한 것은 아니다. 친구가 꽃을 따서 맛을 보라고 한다. 연분홍 예쁜 꽃인데 꽃잎의 맛은 열무를 씹는 맛이었다. 식용 꽃이란다. 신기하다. 어떻게 꽃의 맛을 보고 알까. 지난번 여우숲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조금 더 이해를 했다. 약초공부를 하며 잎의 모양에 따라 효능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의식이 있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非意圖的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47P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8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8P

 

텔레비전이 명사名士를 만들고 있는데 견주면 영화는 그런 거물을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텔레비젼이 만드는 명사는 입방아의 대상이 되는 것 이상의 모델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의 퍼스낼리티라고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이름의 특별한신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50P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이제부터 비행기가 그 역할을 맡는 겁니다. 53P

 

“기계가 인간성을 마모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계가 인간을 섬길 것이냐?”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 같은 질문 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54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p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 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p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61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 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p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뜁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62p

 

자연의 충동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복종해야 할 대상, 가꾸어야 할 대상이라고 되어 있지요. 62p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를 떠나 있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기만 하면 곧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70p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옳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1p 

 

신화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지리적으로 비슷하지 않고 생활양식도 다른 사람들이 살았던 지구 곳곳의 신화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인류의 이성이 깨어난 시기도 비슷하다는 것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신의 영역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인도人道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71p

 

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그럼 신화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74p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74p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학도 있고, 단혼 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선사 시대에 믿어지던 야훼의 책을 보세요. 페이지 페이지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뜩 실려 있지요. 75~76p

 

네 번째 기능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76p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면, 만유신론이라도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人神만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divinity)이라는 관념은 크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 받치는 힘입니다. 76P

 

하지만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77P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77~78P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쟎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78P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익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슴, 독수리….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78~79P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은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80P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wires)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 할른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도리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던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81P

 

2.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다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 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그렇다면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다음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미스터리 움 드네멘둠 에 파스키나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이다. 85P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9세기에 성립된 인도[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 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들,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86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89P

 

평상시 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주 가끔 꿈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혼자서 생각한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이러고 있구나. 사적인 신화,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게다. 오랜 시간 내게 쌓여온, 내 부모로부터 쌓여서 전해져 온 의식이겠지 싶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0P

 

[우파티샤드]에서 읽지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지었구나, 무슨 까닭이나 내가 낳았음이라..” 이로써 그는 그 지으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장조주이니라.” 이 책에서 이 표현은 상투어구가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을 알면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느님의 힘인 창조의 원리를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이런 뜻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94P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96P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도 그 재료는 조금 전까지도 살아 있던 것들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노라면 새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쪼는 것을 보게 되지요? 새는 무엇인가를 그렇게 끊임없이 잡아먹고 있어요.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세요. 소 역시 무엇을 먹고 있습니다. 뱀은 자양이 될 만한 육식을 하기 위해 늘 분주합니다. 뱀이 무엇을 잡아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원형질적인 삶의 모습에 원초적인 의미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동물을 놓고 시비할 것은 없지요.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5P

 

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인도에서는 가장 강한 독을 지닌 코브라조차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지요. 신화에 나오는사왕蛇王은 부처님 다음 자리를 차지해요. 뱀은 시간의 장, 죽음의 장 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97P

 

여자를 죄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다른 신화 체계에도 있습니까?/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가장 가까운 것이 아마 판도라의 상자와 관련된 판도라쯤 되겠습니다만, 이로써 생긴 것은 죄악이 아니라 말썽일 뿐이지요. 성서적 전승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자연은 썩은 것, 섹스도 썩은 것,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97~98P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것입니다. 시원한 석양의 바람을 쏘이다가 그곳에 들른 야훼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아요. 동산은 뱀의 본거지였으니까요.98P

 

왜 우리는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합니까?/달리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우리 시대의 현실의 본질이 그렇습니까?/현실체험의 본질이지요./남성 대 여성, 삶 대 죽음, 선 대 악…./’,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102P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 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 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 하는 것과 같습니다. 102P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3P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105P

 

일단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이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됩니다. 106P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6P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 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P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바탕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107P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傷痕)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107P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니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09P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09P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3P

 

내가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113p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4P

 

신화 중에는 믿을 만한 것도 있고, 약간 터무니 없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요?/각각 다른 의미에서 모두 믿을 만한 것입니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114P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121P

 

시인에게 온다는 시마詩魔라는 놈과 같은 말이지 싶다. 무의식에서 솟는 다는 말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어떤 경지인지 글로만 이해했다.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하느님이라는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127P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130P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서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리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인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p

 

모든 순간 선택을 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그러면 그 다음 길이 열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대로 길은 열린다. 내 앞에, 그리고 그 길로 간다. 가지 않아도 된다. 가지 않는 것도 길이다. 화창한 봄날에 꽃놀이 가지 않고 이렇게 하루 종일 엉덩이를 뭉개며 타이프를 하고 있는 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선택한 일이니 그냥 하는 거다. 할 일이면 즐겁게 하는 거다. 생각이 많은 사람, 몸보다 머리가 더 바쁜 사람, 그들은 인생이 좀더 피곤하지 싶다.

 

그런 사고방식은 사악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겠습니까?/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3p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 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4p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쟎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4p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파니샤드]에서는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니요, 그렇다고 중성도 아닌, 즉 어떤 몸을 받든지 그 몸을 통하여 드러날 뿐”이라고 말하지요.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선악을 논하기 전에,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육준강대의에 선 사람들에게서 이 말을 듣기는 대단히 어렵지요.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6p:

 

정말로 구역질 나는 일이지요/이런 종류의 판단에는 두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어떤 행동의 장에서 우리의 판단, 또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관찰자로서의 판단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독이 있는 뱀은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삶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의 장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뱀이 사람을 물려고 하면 우리는 뱀을 때려죽이고 맙니다. 이 경우 우리가 부정한 것은 뱀이 아니고 그 상황입니다. [리그 베다]에 아주 좋은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나무란 생명의 나무, 우리 자신의 삶의 나무를 말합니다. “나무 위에 새 두 마리가 않아 있다. 아주 악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은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은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깁니다. 136p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139p

 

3.태초의 이야기꾼들

 

우리 육신의 신경은 우리의 기억을 운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경계통의 조직을 일정한 상태까지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입니다. 141p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1p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電球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씩 내려 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143p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의식이 다시 의식을 만나는 데 까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싶다.

 

매장의례埋藏 儀禮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이다….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루는 관련이라고 해도 좋은 것 같군요. 145P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敵國의 국민을 순식간에그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156P

 

조그만 오두막 안에서 며칠 동안 명상을 하면서 여자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기간이 있었다는 겁니다/오두막에서 무엇을 하는 거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 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소년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외부의 힘이 소년을 성인으로 입문시키고 개인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섬기게 하는 것이지요 164P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 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두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P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77P

 

사는 곳을 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우리는 나바호 인디언에게서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바호 인디언은 남쪽에 있는 산, 북쪽에 있는 산, 동쪽에 있는 산, 서쪽에 있는 산 그리고 중심에 있는 산을 모두 동일시합니다. 나바호족 호간(Hogan:)의 문은 늘 東向입니다. 모닥불 자리는 호간의 한 가운데에 있어요. 이게 바로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연기는 천정에 뚫린 환기구를 통하여 하늘로 오르는데, 이것은 香煙이 신의 콧구멍으로 똑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지요. 주거 환경이 빚어내는 풍경자체가 아이콘(聖畵)노릇을 하는 겁니다. 177P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아마? 聖林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자주 숲을 드나들었는데, 그때 나는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다음은 돌과 바위뿐입니다. 조그만 땅다람쥐와 커다란 올빼미가 사는 숲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로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늘 우리 안에 메아리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곧 자연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178P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P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0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神性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 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문화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P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189P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0P

 

다른 책을 보다가도 이런 방법으로 책을 봤다는 것을 보았다. 나도 가끔 이렇게 하곤 한다.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을 모조리 다 읽었던 경험은 없다. 몇 권 찾아서 읽다가 다른 작가로 옮겨가기 일쑤다. 연구원을 시작하면서 반가운 작가가 한 명 있었다. 텍스트로 정해진 책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건 분명 우연을 넘어서는 거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는데..기대했던 것 보다 좋아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 울림을 느끼고 가야 했다. 레이스 중 이라 해도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얼마나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정해진 책을 보는 것도 아마 빠듯하겠지. 그래도 시작해 보련다. 그분이 쓴 책을 보는 것부터. 아마 그 다음단계는 언제쯤 가능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모든 수렵 문화에서 샤먼적인 측면을 확인합니다/ 왜 특별히 수렵문화를 지칭하십니까?

사냥꾼들은 개인적이거든요. 농사꾼은 그렇지 않지만 사냥꾼은 개별적으로 행동합니다. 벌판에서 자연 조건과 악전고투하면서 자연의(언제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 평생을 해도 사냥에서 같은 상황을 두 번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상황이 때마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사냥꾼들은 특별한 재주와 능력을 요하는 個人技도 익혀야 합니다.191P

 

언젠가 남자들이 유독 공놀이(골프)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 수렵문화에 익숙한 DNA때문이라고 했다. 사냥꾼의 기질이 남아 있어서란다. 공놀이도 평생을 해도 같은 상황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지리학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 관념의 모양을 빚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막의 신은 초원의 신이 아닙니다.

단수로서의 雨林의 신도 아니지요. 우림에는 복수로서의 신들이 있었어요. 사막으로 나오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납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은 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유일신 개념이 생길 리 없지요. 192p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 땅에 들여온다고 한들 그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193p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사회 신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기네를 보호해주는 사회에만 헌신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父系的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인류의 농경화로 고대 사회의 재배와 수확에서 맡게 되는 여성의 몫이 커짐에 따라 여신 숭배 종교가 대두되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런 변화가 생겨나면서부터,,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여성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어요. 수렵 사회에서는 남성이 그랬지요? 그랬지요. 그런데 이게 여성에게로 넘어옵니다.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된 거지요.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좀더 고급한 문화 체계에서 쟁기가 발명되는 것은 훗날의 일입니다. 쟁기가 만들어지면서 남성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지요. 이렇게 되자, 쟁기가 대지를 가는, 말하자면 남녀의 성적 결합 시뮬레이션도 신화 이미지가 됩니다. 194p

 

농경 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194p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열대 밀림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관념은 썩은 데서 생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장관을 이루는 적송숲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 숲에는 수십 년 전에 잘린 적송의 어마어마하게 큰 그루터기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썩어가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오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그 그루터기에서 나온 겁니다. 나무의 경우, 사지를 자르면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도마뱀종류가 아닌 한, 동물의 사지는 한번 잘리면 다시 자라나오지 않지요. 따라서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195p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아들이에요.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아닙니까?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신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201p

 

농경 문화권에서 어떤 것이 제물로 희생될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되미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엥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203p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이것은 같은 이미지 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그룹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204P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204P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무슨 뜻인가요?/ 놀라운 것은 말이지요. 죽음의 신이자 생성의 신이기도 한 이런 신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간다는 것이에요. 특히 인도네시아의 해골 사냥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해골 사냥은 신성한 행위, 신성한 살인입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 몫의 살인을 해야 합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음 세대가 오게 하려면 앞 세대는 모두 죽어야 한다…이것이 이 의례의 의미입니다. 아이를 끼치거나 낳으면 곧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아이는 새 생명입니. 앞 세대는 이 새 생명의 보호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09P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213P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217P

 

민주주의가 뭡니까? 다수의 의견은 정치는 물론 사고에서도 효과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221P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221P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에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221P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2P

 

SNS에다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자…이렇게 적었다. 천복에 관한 글을 읽다가 배껴 놓은 것이다. 친구가 메시지가 왔다. 그곳이 어디냐고 같이 가자고…내가 말했다. 그곳은 같이 가는 곳이 아니라 각자 찾아가는 곳이라고.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태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3p

 

자기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방법. 굴대를 잡고 있어야 한다.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3p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4p

 

시인들은 시 쓰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 자기 삶의 방법을 천복에 맞추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다른 일에 관심을 쏟지요.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꺼여들거나 군대에 입대하여 흥미도 관심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천복을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225p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p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스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스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가지 있어요.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존재’ ‘취트라는 말은의식’ ‘아난다라는 말은천복혹은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재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재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것 같군요. 226p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것이다. 227p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 229p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냅니다. 박사 학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35년쯤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p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찬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33p

 

과학은 머지 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벼랑이라고 하시면? 벼랑이지요. 벼랑 이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벼랑 아래에 있는 것은 인간에게서 탐구 가능한 범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은 이 양자가 만나는 곳이지요. 삶의 바탕….이게 도대체 무엇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심지어는 원자가 입자粒子인지 파동波動인지, 아니면 이 둘을 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 244p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누구에게든 마음을 쏟고 있을 틈이 없어요. 곧 바뀌어버리니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名士를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245P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253P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P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는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273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분석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87P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305P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 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신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333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339P

 

그 전에는, 사랑이란 우리에게 성적 욕망을 야기하는 꼬마 신 에로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아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이 이해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던 겁니다. 사랑에 빠지는 건 개인적인 경험인데, 에로스가 끼어든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쟎아요?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아모르의 존재를 몰랐나봐요. 하지만 음유시인들이 알기로 아모르는 개인적이었어요.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은비개인적인 사랑이었고요.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異性異性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341P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질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5P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최악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 행위가 음유시인들에게는 절대로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경험인 거지요.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P

 

용기가 없으면 생각도 못한답니다. 349P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함께(com-)’하는 것이 곧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고통’, 혹은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 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겁니다. 353P

 

음유시인들의 가슴 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예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예요. 이 양자는 판이한 겁니다. 그들은 관류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그 것은 삶을 경험의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자고 하는 것이었어요. 355P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55P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상처였지요.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356P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1P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364P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래도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P

 

잃어버린 반쪽을 만나 하나가 되는 것. 내가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한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반쪽과 하나가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결혼에 관한 정의인지 좀더 살펴봐야겠다. 캠벨이 이야기하는 결혼의 의미라면 나는 혼자이다.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왜요?/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시키지는 않지요. 중세의 연애 이야기를 보면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 자기에게 성실한 여성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건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 369P

 

사랑과 도덕성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하지요

도전하다니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370P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사탄에게 이사랑하던 것은 신이었어요. 그러니 사탄에게 지옥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을 테지요. 그의 귓전에는 “지옥으로나 가거라!”라고 하던 신의 음성이 쟁쟁합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상징 같은 것이었겠지요. 371P

 

나는 언젠가 있는 대로 다 벌리고 아무거나 다 삼키는 입 속에 심장이 하나 들어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를 집어 삼키게 될 사랑을 그린 것이지요. 부모가 조금 줄여서 베풀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사랑이고요. 373P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여 있다는 것이군요.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73P

 

8.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런 체험을 자연의 힘을 신인동형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으로 인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376P

 

유명한 분석 심리학자인 융 박사는 종교의 상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의 상징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일이 곧 우리의자아를 분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온 세상이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원형의 건축 구조와 우리 정신 기능의 구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388P

 

종교 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 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왜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396P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399P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에덴이라고요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가,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P

 

내가 저자라면

 

캠벨은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카톨릭 가정에서 성장한 잇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부모의 유전자를 받았는지, 비단 부모뿐이 아니라 그 선대의 선대까지, 태어난 지리적인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유전인자는 생물학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저자가 타고난 많은 정보들이 그의 사유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화의 유사점도 놀라웠고, 또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라는 것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인 동양인 이런 표현을 쓴다. 서구인의 생각구조를 가지고 있고 카톨릭이라는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다. 동양인의 생각구조와는 다른 무엇이 많아 보인다. 아마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불교인이 저술을 한다면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메타포라고 부르는 이미지를 풀어내는 방법도 그렇고 마지막에 언급된 에덴, 종말, 이런 단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넘어서는 우주관에 기초한 접근을 해보고 싶다.

 

책의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에 대하여

 

신화의 힘은 저자가 생전에 대담형식으로 준비된 것을 책으로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의 은해

7.       사랑과 결혼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이렇게 엮어져 있다. 신화를 읽어내는 전체적인 코드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다. 다양한 신화를 접하면서 다양한 각도의 생각을 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좀더 구체화 한다면 시대별 사람중심의 목차를 가져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태어남 이전/태어남/자람/성숙/결혼 또는 사랑/영웅의 여정/사라짐.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생로병사는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욕망의 형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건 언제 이세상에 왔건 사람인 이상 똑 같다는 이야기다. 신화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이 달라진 것이 없이 때문일 것이다.

 

감동적이었던 장절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익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슴, 독수리….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은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wires)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 할른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도리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던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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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9:45:06 *.154.223.199

길수형님^^ 형님의 북리뷰에서는 하늘색과 그린색이 있습니다. 그린이 다른 사람들이 밑줄을 긋고, 짙게 하고, 글자를 키우는 효과를 주는 색이네요. 산에 자주 가고, 약초공부를 하신다니 인디언의 편지를 가장 감동적인 구절로 꼽으셨군요. 형님 나이와 경험을 가질 때 쯤 되면 가슴으로 제대로 된 상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너무나 일찍 결혼하는 게 아닙니까?^^  자분자분 정갈한 북리뷰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 같습니다. 왜 연구원을 하냐고? 내 삶을 일밀리미터라도 깊어지게 하기 위해 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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