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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10시 35분 등록
 

문명이야기

윌 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저자에 대해서


1885년 11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 애덤스에서 태어났다.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가톨릭 부설 학교에서, 그 다음에는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  뉴저지 주 사우스 오렌지에 소재한 세튼홀 칼리지에 자리를 잡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평온한 신학교에서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 학교에서 1898년 5월 10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다 카우프만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1914년부터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이 강의는 이후 13년간 주 2회씩 계속 이어졌다.

192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철학 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 듀런트 부부는 가끔씩의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시간을(매일 8시간에서 14시간)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에 바쳤다.

보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 1930년에는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직접 탐방하고 1932년에 다시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문명 이야기』시리즈의 제1권 『동양 문명』(1935)이다.

이후 몇 번인가의 유럽 방문을 거쳐 제2권 『그리스 문명』(1939)과 『카이사르와 그리스도』(1944)가 준비된다. 1948년, 터키와 이라크, 이란, 이집ㅌ, 유럽 등지에서 체류하며 제4권 『신앙의 시대』(1950)를 저술했다.

 1951년에는 제5권 『르네상스』(1953)를 출간했으며, 1954년부터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시작해 종교 개혁을 새롭게 조망한 제6권 『종교 개혁』(1957)을 발표했다.

이들 저작을 준비하는 데 있어 듀런트 여사의 역할은 매년 그 비중이 더욱 커져 갔으며, 제7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1961)에서는 그 기여도가 너무나 커 책 표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저자로 나란히 오르게 된다. 『루이 14세의 시대』(1963)와 『볼테르의 시대』(1965), 『루소와 혁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 제11권 『나폴레옹의 시대』의 출간을 끝으로 50년에 걸친 이 대작은 완결된다.

에이리얼 듀런트(Arial Durant)는 1981년 10월 25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윌 듀런트도 그로부터 13일 후 11월 7일에 96세를 일기로 그녀를 뒤따랐다.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문장들


서곡(1300~1377)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1.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는 볼로냐의 정신은 좋아했지만 법의 문자는 싫어했다.

“나는 부정직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행동할 것을 바라기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내 성향에 어긋났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 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50P)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뮬이라고 여겼다. (50P)


***어느 경우가 되었든 그녀는 그의 숭배를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멀리했으며, 그의 정열을 용감하게 거부했다.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이 한동안 진지했다는 사실은 뒷날 관능적 요소에 대한 그의 후회와 거절당한 사랑의 정화시키는 영향에 대한 그의 감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51P)


***아무리 차가운 바위라도 내 노래 안에서는

불이 타올라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으리! -페트라르카의 시- (52P)

***그는 문학의 세계절반을 움직였다. 그는 친구들과 교황들과 왕들에게 그리고 죽은 작가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향해 긴 편지를 써 보내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런 편지의 사본을 간직해 두었고, 노녀에는 후세에 출판할 것을 대비해서 이것을 고침으로써 자존심을 만족시켰다. 힘차지만 힘든 키케로 방식 라틴어로 된 이 편지들은 그으 펜이 만들어 낸 가장 생동하는 유품이다......호메로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살아있는 동료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이 영웅적인 로마 공화정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불평햇다.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 하나를 라일리우스라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그는 친구들에게 소중한 역사의 기록으로서 라틴이나 그리스 고전의 잃어버린 사본들을 찾아보고 고대의 비명들을 베끼고 고대의 동전을 모을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공공 도서관을 건설하고 역설했다.

여행할 때는 고전 텍스트들이 “아라비아나 중국 상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건보다도 더 값진 상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찾고 사들였다. (55P)


2. 나폴리와 보카치오

****페트라르카가 법을 싫어했듯이 그는 상업을 싫어했다. 빈곤과 시(詩)를 선택하면서 오비디우스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그러면서 그의 <변신 이야기>와 <유명한 여성들으 편지>를 즐기고, <사랑의 기술>을 대부분 마음으로 배워 익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비너스의 성스러운 불길이 어떻게 가장 차가운 가슴에서도 타오르도록 만드는가”를 보여 준다고 했다. (58P)


3. 계관시인

***붓보다 더 가볍고 동의하기 쉬운 부담도 없다. 다른 즐거움들은 우리를 매혹하는 동안에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펜은 즐거운 마음으로 붙잡고 만족한 심정으로 내려놓는다. 그것이 그 주인과 대가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수천 년 뒤에나 태어날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지상의 즐거움 중에서 문학(글)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으며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온화하고 믿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듯 적은 노력이나 갈망을 바친 것만으로 삶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주인과 그토록 함께하는 것은 달리 없다. (63P) -페트라르카의 어록


4. 리엔쪼의 혁명

***리엔쪼는 1343년에 서른 살의 젊은 공증인 자격으로 교황 클레멘스 6세를 만나러 아비뇽에 왔으며, 그곳에서 페트라르카를 만났다. 리엔쪼는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유적과 거전에 의해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67P)

****리엔쪼의 이 고귀한 꿈의 붕괴 과정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69P)


6. 조토

중세의 피렌쩨를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피렌쩨는 산업과 정치가 너무 고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쩨를 숭배하기란 수비다. 이 도시는 그 부(富)를 미의 창조에 바쳤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의 청년기에 그곳에서는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할 바 없는 상업상의 경쟁, 가문의 불화, 개인적인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주민은 계층 간의 전쟁으로 나뉘고, 계층 안에서도 다시 승리에서 잔혹하고 패배에서 복수욕에 불타는 분파로 갈렸다.(77P)

##이 책에서 중세라는 용어는 325년 콘스탄티누스대제에서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까지의 유럽 역사 및 문명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상당 부분을 포함한다.


****시민들은 도시보다는 자기들이 속한 당파에 더 충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부심 강한 시민 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썼다. 부유한 개인이나 조합들은 도시를 포장하는 비용, 하수구건설, 물의 공급을 개선시키는 이, 공공 시장의 건설, 교회, 병원, 학교를 세우거나 고치는 일 등을 위해 돈을 내놓곤 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이나 현대 프랑스 사람의 감각만큼이나 날카로운 미적 감각으로 개인 재산이나 공공재산을 들여서 도시에 건축물, 조각, 그림 등을 만들었다. (77P)


***페트라르카가 14세기의 시문학을 지배했듯이 ‘죠토 디 본도네’는 14세기의 회화를 지배했다. (78P)

***죠토의 작품이 미술사의 한 경계표가 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눈길을 모든 각도에서 관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리듬 있는 구성이다.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의 품위이며 부드럽고 빛나는 색채와 탁월한 이야기 서술의 흐름, 깊은 감정조차도 표현이 절제된 것, 그리고 시끄러운 장면들을 감사고 있는 장엄한 고요함이다. 이따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사실적인 초상화는 과거의 미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동작에서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비잔틴 미술의 경직됨과 어둠을 누르고 죠토가 승리한 요소들이다. 그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뒤 피렌째 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감을 이어받았다. (81P)


***당시 이탈리아 건축은 북부 유럽에서 뾰족한 아치 형태의 고딕 요소를 받아들여 그것을 고전 양식 기둥과 결합시키고, 대로는 피렌째의 경우처럼 전체를 비잔틴 양식의 둥근 지붕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혼합은 조화가 되지 않고 브라만테가 지은 작은 교회들 몇만 빼고는 통일성과 우아함을 갖지 못한다. (83P)


***상인들의 황금은 예술로 바뀌고, 상인과 장인들의 시끄러운 가게들도 변하고, 산업적이고 반항적이고 격하기 쉽고 지적인 대중의 주택들도 변했다. 자아의 격렬함 속에서 르네상스가 태어났다. (84P)


7. 열흘이야기(데카메론)

***단테는 이탈리아 서사문학의 최초이자 최후의 진정한 음악을 피렌째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산문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고, 죠반니 빌라니는 가장 현대적인 중세 연대기를 썼다. (84P)

***보카치오는 금욕주의, 순결, 고해, 성 유물, 사제, 수도사, 수도원장, 수녀, 그리고 심지어 성인들의 시성식마저 비웃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이 위선자라고 여기고 그들에게 시주를 하는 ‘얼간이들’을 비웃는다. (92P)

****<열흘 이야기>는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기법보다 오히려 그 도덕성에 힘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성이 완전히 순결한 것이었다 해도 분명 보존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구성이 완벽하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능가한다.

이따금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능변이고 생생하고 예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의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 년동안 이탈리아에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아름다움, 유머, 선량함, 즐거움 들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93P)


9. 밀라노

***밀라노를 지배하는 집안은 비스콘티라는 이름이었다.

페트라르카가 그의 궁정에 도착해서 어떤 의무를 기대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죠반니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대가 여기 머무는 것 뿐이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통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니까.”

페트라르카는 파비아 혹은 밀라노에 있는 비스콘티 궁정에 8년간 머물렀다. 이 편안한 복종의 기간에 그는 이탈리아 ‘3행시’ 형식으로 <승리>라고 불리는 시를 썼다. 인간에 대해 욕망의 승리, 그리고 욕망에 대해 순결의 승리, 승리에 대해 죽음의 승리, 죽음에 대해 명성의 승리, 명성에 대해 시간의 승리, 시간에 대해 영원성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99P)


10. 베네찌아와 제노바

***베네찌아는 이탈리아에서 밀라노에 뒤이어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한 도시국가였다. 그리고 에외없이 가장 유능한 방식으로 통치되었다. 베네찌아 상인들은 예루살램에서 안트베르펜에 이르기가지 모든 도시의 시장을 공략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도나 이슬람교도나 가리지 않고 무역을 했으며, 교황의 파문이 자기들 머리 위로 이슬처럼 쏟아져 내려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100P)

***베네찌아 사람들은 젊은 날 보카치오가 나폴리에서 보내던 시절만큼이나 즐거운 것이었다. 베네찌아 사람들은 엄청난 축제를 벌여 휴일과 승리를 축하했다. 배와 군함에 자기들의 기쁨을 새기고 색칠하고 자신들은 오리엔트산 실크를 몸에 두르고 베네찌아산 유리 식기로 식탁을 밝게 장식하고 물 위에서 그리고 집에서 많은 음악을 연주했다. (101P)


11. 14세기 의 황혼

***그는 (보키치오)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 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105P)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스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 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일흔 살 생일인 1374년 7월 20일에 그는 책에 기댄 모습으로 분명ㅇ히 잠들었다가 죽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긴 겨울밤에 추위를 막아 줄 외투를 살 돈 50플로린을 보카치오에게 남겼다. 1375년 12월 21일에 보카치오도 죽었다. 향년 예순한 살이었다. (107P)


12. 조망

****교황파와 황제파는 이탈리아 전체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도시를 교황당과 황제당으로 갈라 놓았다. 이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도 이 낡은 표현법은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위해 이용되었으며, 미움의 용암이 삶의 모든 길로 넘쳐 흘렀다. 황제당원들이 모자의 한 편에 깃털을 꽂으면 교황당원들은 다른 편에 깃털을 꽂았다. 황제당원이 흰 장미를 달면 교황당원들은 붉은 장미를 달앗다. 크레마에서 밀라노의 황제당원들은 교회 제단에서 그리스도 조각상을 부수어 불태웠다. 이 조각상의 얼굴이 교황당원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당인 베르가모에서 몇몇 칼라브리아 사람들이 주막집 주인들에 의해 살해되엇다. 그들이 마늘을 먹는 방식으로 교황당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rods들의 소심한 허약함, 집단의 불안정, 지배층의 미망 등이 다른 것과 낯선 것에 대한 항구적인 두려움, 의심, 혐오, 저주 등을 만들어 냈다.

통일을 방해하는 이런 요소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다. (108P)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와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중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전 작품을 알았고 사랑했다. 그 작품들을 보존한 사람들은 수도사들이었다. (112P)

***이탈리아에서 모든 길은 르네상스로 통하고 있었다. (113P)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 바빌론 포로

***자금에 쫓긴 교황은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에게 성직을 팔았다. 그러나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청렴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경건함을 실천했다. 위대한 의사이며 교회의 비판자인 빌라노바의 아놀드를 이단자 박해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결국은 1314년에 목숨을 잃었다. (116P)


***언어의 대가인 페트라르카는 욕설의 어휘를 총동원해서 아비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앙심 없는 바빌론, 지상의 지옥, 악의 수채통, 세계의 하수구, 여기에는 믿음도 자비심도 종교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세계의 모든 오물과 허약함이 여기 한데 모여 있다.....늙은 남자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비너스의 품속으로 거꾸로 뛰어든다. 나이도 품위도 권력도 잊고 마치 자기들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치와 술 취하모가 음란함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수치 속으로 달려든다. .....사통, 상피붙기, 강간, 간음이 교황청 놀이의 음탕한 즐거움이다. (124P)


2. 로마로 가는 길

***피렌째는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교회 재산을 모두 몰수 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종교 재판소 건물을 무너뜨리고 교회의 재판소를 폐쇄하고 고집이 센 사제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일부는 목매달아 죽였다. 그리고 로마로 사절을 보내 혁명에 동참하여 이탈리아에서 교회의 세속적인 권한을 모두 끝내자고 촉구했다. (130P)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이런 잔혹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당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진짜 보물인 양 떼를 모두 되찾는 일입니다. 양 떼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정말로 간나해질 것이니까요.......당신은 선의와 사랑과 평화의 무기로 사람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의 무기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긜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도 온 세계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 지 제가 하느님께 물어보니 오로지 평화! 평화! 라는 답변을 받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위해 평화를!” (131P)


3. 그리스도교도의 생활 1300~1424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오늘날에도 방문객들이 찾아가 볼 수 있는 평범한 방에서 태어나 살고 죽었다. 지상의 하찮은 곳에서 그녀는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오는 일을 도왔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되살리는 일을 도왔다. 그 신앙심은 르네상스와 뒷날 국가통일운동 이후에까지도 살아남았다.

열다섯 살 나이에 그녀는 성 도미니크의 고행(苦行)교단에 합류했다. 이것은 수도사나 수녀가 아닌 ‘제 3의’ 집단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그대로 세속의 생활을 하면서 가능한 한 종교와 순결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는 생활이었다. 카타리나는 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거의 은둔처로 만들고 기도와 신비적 명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나는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을 위한 자은 구석을 따로 떼어 놓았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명랑함을 유지했다. 다른 소녀들 같으면 세속적인 사랑에서 얻으려고 하는 온갖 기쁨, 의심, 황홀경 등을 카타리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에서 구하고 찾아냈다. (134P)


페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가문의 떠오름 1378~ 1464

1. 무대장치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재탄생 이상의 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 악취를 풍기는 부르조아의 돈이 필요했다. 능숙한 경영과 싸구려 노동력이 만들어 낸 이윤, 동쪽으로의 모험적인 여행과 알프스 산을 넘는 험한 여행 끝에 물건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팔아서 남긴 이윤. 조심스러운 계산, 투자, 대출 등으로 만든 이윤, 이자와 배당금이 쌓여 만든 돈,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니 넉넉하게 남아돌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첼로나 티찌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빌려 부(富)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42P)

***돈은 문명의 뿌리다.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엇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142~143)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3P)

***로마에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1400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숭배의 장소라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포롬 광장에서는 아직도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43P)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탄생한 것과 아주 동일한 이유로 피렌째에서 맨 먼저 탄생했다. 조직화된 사어, 상업의 확장 그리고 은행가들의 활동 등을 통해 꽃의 도시 피렌째는 14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베네찌아를 제와하고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이 시대 베네찌아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쾌락과 부를 추구하기위해 사용하고 있었다면 피렌째 사람들은 아마도 소란스러운 얼치기 민주주의의 자극을 통해 사상과 재치와 모든 종류의 기술을 대단히 예리하게 발달시켰다. (144P)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정복당했을 때 많은(1453) 그리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피렌째를 제 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14년 존과 똑같은 환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고대 텍스트의 필사본들을 지니고 왔다. 이렇게 다양한 영향들이 합쳐지면서 르네상스는 피렌째에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피렌째는 이탈리아의 아테네가 되었다. (145P)


3. 조국의 아버지 코시모

***밀라노와 피렌째는 함께 손을 잡고 베네찌아와 나폴리에 대항했다. 이것이 권력의 균형을 가져와 어느 편도 전쟁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코시모가 시작하고 로렌쪼가 물려받아 계속한 이러한 세력 균형 정책은 이탈리아 반도에 1450년에서 1492년에 이르는 수 십 년간의 평화와 질서의 시기를 마련해 주었고, 바로 이 기간 동안 도시 국가들은 부유해져 초기 르네상스를 후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54P)

***코시모가 부와 권력에 못지않게 문학, 학문, 철학, 예술 등을 보살핀 일은 이탈리아와 인류에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취향이 있는 남자엿다.  (154P)


4. 인문주의자들

***메디치 통치 아래서 혹은 그들의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종교에서 철학으로, 천국에서 지상으로 관심을 돌린 일이며, 깜짝 놀라는 한 세대에게 세속적 사유와 예술의 풍부함을 보여 준 일이엇다.

인류에 대한 연구가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인간 신체의 모든 잠재된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고 그의 감각과 느낌의 온갖 즐거움과 고통을 지닌 또 그의 이성의 허약한 위엄을 지닌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풍성하고 완벽하게 나타나 있엇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였다. (156P)


***코시모는 플라톤 연구를 위해 피렌째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웠다. ........스콜라 철학은 서양 철학에서 400년간의 지배를 마치고 우위를 잃엇다. 철학적 설명을 위해 스콜라방식의 논의 대신에 대화편과 에세이들이 대체되었다. 기분을 명랑하게 하는 플라톤의 정신이 점차 일어나는 유럽정신이라는 몸에 원기를 북돋우는 효모처럼 작용했다.  (160P)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무관하게 문학, 철학, 예술의 절정에 도달했던 저 그리스 문화의 게시는, 바울로 신학의 믿음, 혹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리에 대해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 것으로 여겨졌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못한 성인으로 여겨졌다. (165~166P)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해 명상하기보다는 삶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68P)


***인문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더욱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르쳤다. 건강한 인간 육체에 대한 정직한 경탄이 교육받은 계층에 널리 퍼졌다. 르네상스 문학에서 삶을 다시 인정하게 된 일과 저승에 대한 중세 방식사유에 저항하게 된 일은 미술에도 세속적인 경향을 부여했다. 이탈리아의 아프로디테를 성모의 자리에 앉히고, 이탈리아의 아폴로를 성인 세바스찬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렌쪼 마니피코와 그 이후 시대의 화가들은 이교의 모티프들을 그리스도교 예술에 도입했다. (169P)


***건축적인 열광에서 브루넬레코스는 코시모를 위해 크고도 하려한 저택을 설계했기 때문에 이 온건한 독재자는 사람들의 질투를 두려워하여 그 건축을 거절햇다. 대신에 그는 미켈로쪼 디 바르톨로메오에게 자신과 가족을 위한 그리고 사무실로 쓸 집을 지어달라고 주문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메디치 궁전, 혹은 리카르디 궁전이다. 장식이 dqjt는 두툼한 돌벽은 피렌째 정치에 열정을 더해 주었던 사회적 무질서, 가문의 불화, 폭력 헉은 잔란에 대한 일상적인 두려움을 알려준다. (172P)


7. 회화

1. 마사쵸

***그리스와 로마의조각에 표현된 아르마움이나 이상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미술에서 여전히 형태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회화는 조각보다 더 큰 열의와 섬세함은 아닐지라도 훨신 더 손쉽게 그 일을 해낼 수 가 있었다.

조각은 오랫동안 몸을 탐구해야만 했다. 고딕 조각가들은 이따금 영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각은 영혼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문야는 아니었다. 르네상스미술은 신체와 영혼, 얼굴과 표정을 다 잡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경건함, 애정, 정열, 고통, 회의, 관능, 자부심, 힘의 온갖 영역과 감정을 그것의 표현을 찾아 내려고 했다. 오직 끈질긴 천재만이 대리석, 청동, 점토 등으로 이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186P)

***프라 안젤리코와 더불어 회화는 미적인 표현이자 즐거움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수행이 되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먼저 기도를 올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었다. 사나운 삶에서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그는 모든 것을 신의 보상과 사랑의 찬가라고 여겼다. (190P)

***도메니코는 오늘날에는 사라진 이 작품에서 물감을 오일과 섞음으로써 피렌째 최초의 실험 하나를 했다. 그는 하나의 걸작을 남겼다. <여인의 초상>은 틀어올린 머리, 동경p 가득 찬 눈길, 눈에 거슬리는 코, 부플어 오른 젖가슴을 하고 있다. 바사리에 따르면 도메니코는 새 기술을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 또한 산타마리아 누오바에서 벽화를 그렷다. (196P)


8. 그 외의 예술

코시모 시대 피렌째 예술의 생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앞에서 서둘러 발펴본 주요한 천재들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예술의 옆 골목이나 두시골목으로도 들어가 수많은 가게들을 방문하고 도공들이 점토를 주무르고 거기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에도 가 보고, 유리 만드는 사람들이 유리를 불거나 잘라서 깨지기 쉬운 사랑스러움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도 보고 금세공사들이 값비싼 금속이나 돌을 가지고 보석과 메달, 도장, 주화들 또는 의복이나 사람, 집이나 교회의 수많은 장식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도 보아야 한다.

일에 열중한 기능공들이 쇠나 구리 청동을 두들기거나 돋을새김을 해서 무기나 꽃병, 그릇과 도구들을 만드는 소리도 들어보아야 한다. 장롱 만드는 사람들이 디자인하고 목재를 다듬고 상감하고 표면을 만드는 것도 보아야 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굴뚝을 다듬어 만들거나 가죽을 연마하고 상아를 깎고 조각품의 피부를 유혹적으로 만들거나 집을 장식하기 위해 섬세한 결을 만들어 낸다. 또 수도원으로 가서 끈기 잇는 수도사들이 사본에 그림을 그려 넣는 모습, 평온한 수녀들의 이야기가 있는 벽걸이에 수를 놓는 모습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하고 그런 일에 명예와 실체를 제공할 만큼 지헤롭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주는 주민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   (197P)


***피치노는 이렇게 말햇다.

  “나는 플라톤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러나 코시모에게 입은 덕도 그에 못지않다. 그는 플라톤이 내게 개념을 주었던 그 미덕들을 나를 위해 현실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 가려졌던 플라톤이 인류 정신의 주요한 흐름 속으로 되돌아왔다. (201P)


4장 황금시대

***사육제 기간이면 피렌째 사람들은 유쾌한 혹은 무서운 가면을 쓰고 풍자적인혹은 에로틱한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트리온피(승리의 행진)를 조직했다. 신화적 혹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상징하는 말이 이끄는 수레의 행렬로, 수레에는 그림을 그리고 화환으로 장식했다. 로렌쪼는 이런 관습을 즐기기는 했으나 무질서로 흐르려는 그 경향을 싫어했다. (213P)


4. 문학:폴리찌아노의 시대


***메디치와 다른 피렌째 명문 집안들이 너그러운 후원을 해 준다는 명성에 이글려 학자들은 피렌째로 몰려들었고, 이 도시를 문ㄴ학 수업의 중심지로 ks들었다. 이런 경쟁의 지적인 유산을 발전시키고 물려주기 위해 로렌쪼는 오래된 피사대학과 피렌째에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복구하고 확장했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공식적인 대학이 아니라 플라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부정기적으로 로렌쪼의 시내 궁전이나 카레지에 있는 피치노의 별장에 모여 함께 식사하고 플라톤의 대화편 하나의 전체 혹은 일부를 낭송하고 그 철학을 토론했다. 플라톤의 생일이자 기일로 여겨지는 11월 7일이면 아카데미는 거의 종교적인 엄숙함으로 그날을 기념했다. (218P)


***피코 델라 미란돌라 는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식으로 인간의 제한 없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들려준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221P)


****피코 델라 미란돌라 는 젊은 르네상스의 높은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잇다는......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까지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삶으 씨앗을 주셨다. (221P)


5. 건축과 조각: 베로키오의 시대

****로렌쪼는 미술을 후원하는 메디치 전통을 열렬히 계승했다....열심과 장래의 희망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는 그 재능의 유지를 위해 장학금을 주고 또 특별한 솜씨에 대해서는 상을 주었다. (230P)


5장 사보나롤라의 피렌째 공화국 1492~1534

1. 예언자

****지롤라모는 볼로냐 대학에서 중요한 미덕을 실천하는 학생이 없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락 말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철학과 좋은 기술을 공부하면 몽상가로 여겨진다. 정숙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면 바보로 간주되고 신앙심이 있으면 위선자로 여겨진다. 하느님을 믿으면 매우 우둔한 존재로 여겨진다.”그는 대학을 떠나 어머니와 고독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람을 꺼리고 지옥과 인간의 죄악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254P0


2. 정치가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치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서 유지되는 것이다. 피렌째 공동체에서 강력한 요소가 본능의 배출구로서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술집과 사창가와 도박장을 갈망했다. (264P)


3. 순교자

***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에게 “너는 어떤 정신으로 이 순교를 당하느냐?”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햇다.

“주님은 나를 위해 많은 고통을 바으셨다.”

그리고 자기가 걸고 있던 십자가상에 키스를 하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당당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갔다. (278P)

***사보나룰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 의 노력에 들어 있다.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280P)


5. 혁명시대의 미술

***살비 수도원 식당에서 사르토는 <최후의 만찬>으로 레오나르도에게 도전했다. 동일한 순간, 동이한 주제를 선택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선택했다. 레오나르도보다 더욱 대담하게 사르토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완성햇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라고 생각할 만한 영적인 깊이와 이해하는 부드러움을 갖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사도들은 놀라울 정도로 개인적 특성들을 지니고 행동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색채는 풍부하고 부드럽고 풍만하다. (287P)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1. 배경

***운송은 주로 노새나 짐마차로 아니면 강이나 운하나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유층은 말을 타거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여행했다. 속도는 온건한 편이었는데도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295P)


7. 미술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엇다. 10명 이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수도와 자기들의 추억을 장식할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을 차지하력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에서 그들은 민주주으 제도에서라면 배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아르다움을 위해 투입했다. 도한 예술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천재의 결실이 그토록 많이 투입된 경우는 없었다. (324P)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

1. 발전과정 1452~1482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없이 절반쯤 귀족적인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호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사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331P)


2. 밀라노 시절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도착한 직후  로도비코는 이 식당의 가장 긴 벽면에 최후의 만탄 장면을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3년동안(1495~14980 에측할 수 없이 느린 작업 속도 때문에 공작과 수도사들이 안달이 나 있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작업을 이었다 끊었다하면서 계속했다. 이에 대해 수도원장에게 레오나르도는 설명했다.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339P)


3. 피렌체 시절

***밑그림에 들어있는 성모마리아의 얼굴을 부드럽고 밝게 만들어 주는 온화한 자랑에 찬 미소는 레오나르도가 만들어 낸 기적 중의 하나이다.이것과 나란힌 넣ㄱ 보면 모나리자의 미소는 세속적이고 시니컬하다. (345P)

***1503~1506의 기간동안 레오나르도는 이따금 <모나리자>작업을 하곤 했다. 그것은 1512년 시의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죠콘도의 세 번째 아내 엘리자베타의 초상화였다. 1499년에 매장된 프란체스코의 아이가 엘리자베타의 아이였던 모양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3년동안 rsu를 작업장으로 여러 번이나 나오게 했다. 그는 이 초상화에 자신이 지닌 모든 비밀과 뉘앙스를 다 쏟아부어서 그녀를 부드럽게 빛과 어둠 속에 세우고 나무와 물, 산과 하늘이 있는 상상적인 원경으로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다. 벨벳과 새틴으로 만든 의상을 주름지게 만들었는데,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걸작이다. 입술을 형성하ㅗ 움직이는 섬세한 근욱들을 정열적인 세심함으로 탐구하고 악사들을 불러 그녀를 위해 연주하게 해서 떠나간 자식을 기억하는 어머니의 괴로운 부드러움d을 그녀의 모습에 일개운 것, 이런 것들이 그가 그림을 철학과 합친 이 그림에 부여한 정신에 대한 암시가 될 것이다. (350P)

***유화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많은 처녀들은 모나리자를 상대적으로 평범한 아름다움으로 만들었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녀에게 행운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 미소이다. 눈 속에 방금 나타난 생기와 입술의 양끝이 유쾌하게 살짝 올라간 모습.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미소 짓고 잇는 것인가? (350P)-

☆☆☆ 모나리자의 미소에 관한 저자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4. 밀라노와 로마시절

***그의 작품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의 멍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저녁 산책 시간에 혹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누워서 다음 날 작업할 장이나 페이지나 구절을 만들어보고 또 맛갈스러운 형용사나 매혹적인 구절을 정신의 혀 위에 글려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351P)


5. 인간 레오나르도


***그의 호기심, 도착증, 민감성, 그리고 완전 역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냈다.즉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356P0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엇다.

“오, 화가여,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물들에 의해 주의를 돌리고 사물을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이들 별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

물론 화가는 해부학, 원근법, 명암의 배치 따위를 탐구해야 한다. 윤곽선을 예리하게 강조하면 그림은 나무토막ㅊ럼 보인다. “언제나 인물이 그 afl를 가슴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라.” 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우아함의 한 가지 비밀이 이것이다.

  “인물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동작을 만들어라.”(358P)

***레오나르도는 은필, 목탄, 레드 초크, 펜과 잉크 등 을 사용해서 거의 모든 단계의 육체적 영적 삶을 그려 내고 있다. (358P)

****아마도 인간보다도 자연이 더 그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자연은 중립이고 악을 나븐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편견 없는 눈길에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많은 풍경화를 그렸고,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보티첼리를 나무랐다. 그는 펜으로 정성스럽게 꽃들의 덩굴을 따라갔다. 나무, 강, 바위, 산, 구름, 호수 따위의 배경을 줌으로써 마법과 깊이를 첨가하지 않은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는 예술 작품에서 건축물 형태를 거의 배제했다. 그로서 자연이 등장해서 그림에 개인이나 그룹을 화해시키는 사물의 총체성 안으로 빨아들일 여지를 더욱 많이 남겨두었다. (360P)


6. 발명가 레오나르도

***그는 일생의 절반가량을 인간의 비행에 대하여 생각했다. 톨스토이처럼 그는 새들의 많은 점에서 인간보다 우수하다고 여겨 부러워했다. 새들의 날개와 꼬리의 작동법을 탐구하고 그들이 떠오를 때 활주, 회전, 내려앉을 때의 역학을 상세히 연구했다. (361P)


7. 과학자 레오나르도

***미술가의 일에서 과학자의 일이 만들어져 나왔다. 그림은 레오나르도에게 해부학, 비율과 원근법, 빛의 구성과 반사, 무감과 오일의 화학 등을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탐색들에서 그는 좀더 친밀한 식물과 동물의 구조와 기증의 탐색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로부터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자연법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이르렀다. (363P)

***"어떤 생각을 논함에 있어 권위를 인용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작업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의) 기억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자기 시대 사상가들 중 가장 덜 신비적이었다. 연금술과 점성술을 거부했고 한동안은 ”모든 점성술사들이 거세되기를“기대했다. (364P)


***사유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수학에 열광적으로 몰두했다. 기하학적 형태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습작 페이지에 그런 형태들을 그려놓기도 했다. (364P)


***그러나 시각과 빛이 소리보다 훨씬 더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눈에 대해 경탄했다.

  “이렇게 작은 공간이 우주 전체의 영상을 담을 수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366P)


***그는 사람과 동물의 팔다리를 나란히 배치헤서 탐구함으로써 현대 비교해부학을 거의 처음으로 시작햇다. 갈레누스의 낡은 권위를 참구함으로써 현대 비교해부학을 거의 처음으로 시작했다.....그는“30구 이상의 인체를 절개”했다고 주장했는데, 태아, 심장, 폐, 골격, 근육, 내장, 눈, 두개골, 두뇌, 그리고 여성의 핵심적인 기관을 그린 무수한 드로잉들은 이런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최초로 자궁을 과학적으로 묘사한 사람이며, 또한 태아를 포함한 세 개의 막을 서술했다. (367P)


8. 프랑스 시절 1516~1519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삶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레오나르도의 시체는 앙부아즈에 있는 성 플로렌틴 교회 안뜰에 묻혓다. 멜찌는 레오나르도의 형제들에게 이 죽음의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엿다.

“내가 이 죽음에서 받은 고통을 다 표현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충분하지요. 이런 사람을 잃은 것은 모두가 슬퍼할 일입니다. 이런 사람을 또 만들어내는 일이 자연의 능력 안에는 들어있지 않으니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영혼을 영원히 보호해 주시기를!” (371P)


8장 토스타나와 움브리아

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80년 무렵 피에르는 예순넷의 나이로 눈병을 앓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15세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화가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으 인물들은 거칠고 얼굴도 거칠다. 많은 사람들은 플랑드르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조용한 품위이며, 근엄한 얼굴과 당당한 태도, 그리고 억누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극적인 행동력이다. 그들을 변호시키는 것은 도안의 조하로운 흐름이고 무엇보다도 피에로의 손길이 타협을 모르는 정직함으로 이상화나 감상을 물리치고 눈이보고 정신이 파악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380P)


2. 시뇨렐리

***시뇨렐리는 피에로에게서 가차없는 정확성으로 나체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작업장, 병원, 교수대 아래, 공동묘지 등 찾아내 f수 있는 한 어디서나 벌거벗은 인체를 찾아다녔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힘을 탐구했다. (381P)

****미켈란챌로의 <최후의 심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르네상스는 이렇듯 많은 인체의 광란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아름답거나 붕괴된 신체, 짐승 같거나 천상의 것 같은 얼굴, 악마의 찌푸림,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의 외침 등이 불꽃에 의해 이리저리 퍼져있다. 어떤 죄인은 이빨을 부러뜨리고 곤봉으로 대퇴골을 부러뜨리는 고문을 받고 있다....그는 <적 그리스도>의 한 귀퉁이에 구원받은 자의 평온함으로 이 난장판을 바라보는 자신의모습을 그려 놓았다. (383P)


****시뇨렐리는 코르토나로 돌아와서 산타마르게리타 성당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렸다. 이 무렵 그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비극이 찾아왔다. 바사리는 이렇게 전한다. 시체가 그에게 운반되어 왔을 때, “그는 옷을 벗기게 하고 특이한 꿋꿋함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몸을 스케치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작품 안에 자연이 자기에게 주었다가 잔인한 운명이 도로 빼앗아 간 것을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383P)


5. 페루지노

***망토와 칼(음모)로 이루어진 이런 통치 아래서 문학과 미술은 놀랄 정도로 번성했다. 성모를 경배하는 정열적인 마음을 지니고도 추기경들을 업신여기고 가까운 친척을 죽이는 사람이면서도 독창적인 글을 좋아하거나 미술에 빠져들었다. 발리오니 가문의 절정을 서술하고 있는 마타라쪼의 <페루지아 연대기>는 르네상스 시대 가장 생생한 작품의 하나이다.(395P)


***누구나 페루지노 회화의 결점들을 안다. 과장된 감상, 슬픔에 젖은 인위적인 신앙심, 언제나 똑같은 갸름한 얼굴과 리본모양의 머리, 그리고 겸손하게 앞으로 수인 머리, 심지어는 단호한 카토와 대담한 레어니다스까지도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대가는 독창적이기보다는 생산성이 높았다. 그의 그림들에는 행동과 생동감이 부족하다. (401~402P)


9장 만토바

1. 비토리노 다 펠트레

***만토바는 행운의 지역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내내 오로지 한 가문이 통치했으므로 시끄러운 혁명과 궁정의 살인, 쿠데타 따위를 겪지 않았다.(403P)

***비토리노는 그곳을 절반은 수도원과 같은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와 제자들은 단순하게 살고 분별있게 먹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 다는 고전의 이상에 따라  생활했다. 비토리노는 학자이면서 훌륭한 선수였다.

학생들이 본능을 다스리고 건강한 성격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규칙적인 기도를 요구하고 강한 종교적 감정이 그들에게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신성모독, 음란함, 상스러운 언어 등을 엄격하게 금하고 분노한 말싸움에 빠져드는 것을 벌하고 거짓말을 가장 중요한 죄악으로 여겼다. (404P)


2. 안드레아 만테냐

***불멸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411P)


3. 세계제일의 여성

***시인 니콜로 다 코레죠는 ‘이사벨라 데스테(에스테 가문의 이사벨라)’를 ‘라 프리마 돈나 델 몬도(세계 제일의 여성)라고 불렀다.

그녀는 교육받은 르네상스 여성을 역사상 걸작의 하나로 만들어주는 교양과 매력을 대붑분 지녔다. 그녀는 지식인이 되지 않고도 혹은 매혹적인 여성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도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력, 활기, 진짜를 알아보는 예리함, 취향의 완벽함 등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말을 타고도 밤새도록 춤을 출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이든 여왕이 될 줄을 알았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전략과 감각을 가지고 만토바를 다스렸다.  (411P)


10장 페라라

1. 에스테 가문

***16세기의 처음 25년동안에 가장 활발한 르네상스 중심지는 페라라, 베네찌아, 로마였다. 오늘날 페라라를 돌아다니는 학새이라면 그 강력한 카스텔로(성)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 작은 도시가 한때는 강력한 오아조의 중심지엿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다. 이 왕조의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그곳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당대가 가자 ddnleo한 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419P)


3. 학문

***나의 불길이 이 싸늘한 얼음을 따뜻하게 한다면,

눈물로 이 먼지를 살아있는 육체로 바꾸어

네게 새로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대담하고 열렬하게

우리 소중한 인연을 끊어 버린 사람을 향해 외칠 것을,

“오 잔인한 괴물아! 사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라”고. (433P)


***오락과 아름다운 여성들이 많은 이 궁정 사회에서 프랑스 기사 소설이 일용하는 양식이었다. 단테 시대에 페라라에서 프로방스 움유시인들이 그들의 노래를 낭송했고, 부담없는 공상적인 기사 이야기의 분위기를 남겼다. 이곳과 북구 이탈리아 전역에서 샤를 마누 이야기, 그의 기사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과의 전쟁 등은 거의 프랑스에서 만큼이나 친숙한 것이었다. 프랑스 음유시인들은 이 이야기를 부풀려 “싸움을 노래한 시”로 만들엇다. (433P)


4. 아리오스토

***분노하고 불친절하고 거친 사람들이

바닷가 야수에게 바친

아름다운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자연이 처음으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형태를 빚을 때처럼

알몸으로 가장 작은 베일 한 조각도

그 살결의 하얀 백합과 붉은 장미들을  가리지 않았으니,

한여름 더위도 한겨울 추위도 망가뜨리지 못한

아름답게 빛나는 팔다리에 어린 저 광채를 ,

 

그에게는 그녀가 설화석고나 대리석으로

조각가가 기술을 다해 만든 조각상을

바위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였으리.

그가 만일 그녀 뺨의 장미와 하얀 꽃 사이로

흘러내린 맑은 눈물이

사과처럼 단단한 젖가슴을

적시는 것을 봇 보았다면 그리고 산들바람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을 못 보았다면,


아리오스토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쓴다. 그느 자신의 시구의 마법을 통해 우리를 비현실적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요정들과 마법의 무기들과 여러 가지 마법으로 신롭게 만든다. 또 구름 속을 나는 날개 달린 말들, 나무로 변하는 사람들, 거만한 말에 녹아 버리는 요새들로 채운다. (441P)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2. 베네찌아의 경제와 정책

***1495년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이곳에 도착한 필립 드 코미네는 이 도시를 가리켜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승리에 가득 찬 도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적대국인 밀라노에서 온 피에트로 가솔라는 “그 아름다움과 당당함과 부를 묘사할 길이 없다”고 여겼다.  117개의 섬, 150개의 운하,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대운하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450P)


4. 베네찌아의 생활

***15세기의 마지막 몇 십 년, 그리고 16세기의 처음 몇 십 년은 베네찌아 셍활에서 자앙 화려한 고아채의 시기였다. 터키와는 평화를 이룩하고 아프리카 지역과 대서양의 입구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위축을 격기 전이라 세게 무역을 토애 얻은 이익이 베네찌아 섬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459~460P)


***상류층은 노예들을 두었어도 게으름뱅이는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년이 되면 사업, 재정, 외교, 통치, 전쟁 등에서 활동했다. 우리가 가진 베네찌아 사람들의 초상화는 강하게 개성을 의식하고 있고, 자기들의 처소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지만 진지한 의무감을 지닌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 중 소수만이 비단과 모피를 걸쳤다. 어쩌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460P)


***토가는 남자에게는 품위를 여자에게는 신비감을 주었다. (461P)


5. 베네찌아의 미술

****1)건축과 조각: 감각적인 색채가 베네찌아 미술의 핵심이다. 베네찌아의 많은 교회와 집, 그리고 상업적인 건물들은 정면부에 모자이크나 벽화들을 보여준다. 성 마르코 성당의 정면부는 아무렇게나 붙인 장식과 금으로 빛난다. (465P)


****2) 벨리니 사람들: 베네찌아 예술의 영광은 성 마르코 성당과 총독 궁전 다음으로는 그 회화에 있다. 많은 힘들이 합쳐져 화가들을 후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교회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고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 했다. (469P)

***15세기 중엽까지 베네찌아 회화는 천천히 발전했다. 베네찌아 사람들이 여기에 자기들이 사랑하기 시작한 색채와 삶을 담을 nt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아침햇살을 받은 꽃처럼 베네찌아 회화는 유례없는 광채를 내기 시작햇다. 색채를 향한 베네찌아 방식의 직감은 어쩌면 동쪽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상인들은 상품뿐만  아니라 동바으이 사유도 함께 수입해 들였고, 빛나는 타일과 도금된 둥근 지붕의 rldjrr도 함게 가져왔다. 그리고 베네찌아 시장이나 교회나 가정에 동방의 비단, 공단, 벨벳, 능라, 금이나 은을 짜넣은 천 등을 보여주었다. 베네찌아는 스스로 동방의 국가인지 서방의 국가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베네찌아와 그곳의 화가들이 동양에서 그 색채를 배울 수가 없었다면 그들은 베네찌아의 하늘에서 그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빛과 안개의 무한한 다양성, 종탑과 궁전들을 스치는 혹은 바닷물에 반사된 석양의 광채에서 말이다. (470P)


6. 베네찌아의 학문

***추기경 도메니코 그라마니는 8000권을 소장했다가 그것을 시(市)에 기부했다. 베싸리온 추기경은 값비싼 필사본들을 그렇게 했다. 이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그리고 페트라르카가 물려준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정부는 두 번이나 공공 도서관 설립을 명령했다. (496P)

***베네찌아 인쇄업ㅈ들은 그 시대, 어쩌면 모든 시대에 가장 아름답게 인쇄된 책들을 생상햇다. 이런 책들은 이탈리아 최초는 아니었다. 스바인하임과 판나르츠가 아펜니노 산맥의 수비아코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이탈리아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다.(1464년) (496P)

**알두스는 성 아고스티노 성당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 그리스 학자들을 모아서 먹이고 재우고, 그들에게 고전 텍스트를 편집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그들과 그리스어로 이야기하고 헌사와 서문을 그리스어로 썼다. 그의 집에서 새로운 활자가 주조되고 잉크도 만들어지고 책이 인쇄되고 제본되었다. 그의 첫 출판물은 콘스탄틴 라스카리스가 슨 그리스와 라틴어 문법이었다. (498P)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 1534

***1520년에 코레죠는 파르마에서 어려운 주문을 받앗다. 새로 지은 베네딕트 수도원인 성 죠반니 에반젤리스타 수도원의 둥근 천장과 강단 위쪽가 측면 제단을 벽화로 그려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4년동안이나 이 일에 매달렸다. (516P)

****코레죠가 육체를 그리는 감각을 가진 감각주의자라고만 결론지을 수는 없다. 이들 신화들에서 그는 인간의 표면만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성모 그림들에게서 그느 더욱 깊은 아름다움도 올바르게 처리했다. 그의 붓이 올림포스를 노닐고 있을 때, 그 자신은 에의바른 시민으로 살았다. (518P)


2. 볼로냐

***이탈리아 무역로의 주요 교차로에 위치한 볼로냐는 인문주의가 스콜라 철학을 쫒아내면서 피렌쩨에 지적인 주도권을 넘기기는 했어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번성했다. 볼로냐 대학은 이제는 이탈리아의 수많은 대학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교황들과 황제들에게 법학을 강의할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그래도 의학만은 여전히 최고였다. (522P)


***14세기 볼로냐에서 회화는 필사본 장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것이 점차 벽화로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경직된 비잔틴 양식을 따랐다. 페라라 출신의 두 화가가 볼로냐 화가들은 이런 비잔틴 양식의 죽은 엄숙함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525P)


3. 에밀리아 가도를 따라서

***볼로냐 동쪽에 작은 마을들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잇다. 이들은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광채를 위해, 마을 크기에 어울리는 광채를 덧붙여 주었다. (529P)


***카스티릴오네가 생각했던 문화와 상호 존중의 이상적 세계는 잔인한 모라 유린으로 붕괴되었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가난했고, 지금도 간나한 이탈리아에서 부유함은 자주 큰 파멸의 원인이 된다. 가난한 이탈리아는 이방 민족의 이빨 속에 든 먹이이며 노획물이다. 그러고 나쁜 정부의 먹이이며, 이 땅에 있는 많은 부자들의 먹이이다.”(543P)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1. 너그러운 알폰소

****마르케 주와 교황국들의 남동쪽 이탈리아 본토가 바로 나폴리 왕국이었다. 아드리아 해 쪽으로는 페스카라, 바리, 오트란토 항구를 포함했다. (545P)

***알폰소는 새로운 왕조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아라곤과 시칠리아 통치권을 동생 요한 2세에게 넘겨주었다.

알폰소는 가난한 사람에게 매기는 세금을 줄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왕이라고 여겼다. (547P)


***알폰소는 인문주의라는 열병에 걸려서 고정 학자들을 어찌나 후하게 후원해 주었던지 그들은 그를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디르 f가든 고전 작품일부를 지니고 갓다. 집에서나 전쟁터에서 식사때면 고전작품을 낭독하게 했다. 그리고 고전 낭독을 듣고 싶어하는 학생들도 받아들였다. 이른바 리비우스의 유해가 파도바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는 바카델리를 베네찌아로 보내서 리비우스의 뼈 하나를 사 오게 했다. (547P)


***로마 아닌 이탈리아에 대한 이 짧은 관찰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여전히 이 정열적인 반도의 풍성하고 다양한 삶을 공정하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풍속과 품행, 학문과 철학에 대한 관찰은 르네상스 교황들에 관한 몇 개의 장을 지나 뒤로 미루기로 하자.(557P)


***그들은 벌거벗은 것은 죄악이라 여기고 의상으로 훌륭하게 감쌌다. 비록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기들의 여름을 정원으로 서늘하게 만든 것 또한 대단히 현명한 방식이었다.

그들은 집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지붕과 마루에 채색 타일을 붙이고 또 쇠를 레이스 모양과 당초무늬로 만들고 구리 그릇들이 부드러운 빛을 내도록 하고, 청동이나 상아로 만든 조각상들로 남자와 여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기억하게 하고, 천 년이나 지속될 목재조각을 새기고 상감을 넣고 광택이 있는 도자기들로 식탁과 선반과 벽난로 주변을 환하게 꾸미고 유리 제품의 기적과도 같은 장식품으로 시간을 향해 그 깨지기 쉬운 도전장을 내밀고, 또 행복한 펜의 노예들이 세밀화를 그녀 넣은 보물 같은 고전 작품을 가죽으로 제본해서 황금으로 화인하고 은 죔쇠로 고정했다. (557~558)


내가 저자라면

윌 듀런트에게 먼저 존경을 보낸다.

이렇게 방대한 내용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정리한 그의 능력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정도로

탁월하다. 

연구차원에서는 우수한 책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문장에 너무 멋을 부린 나머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한 작가에 대해 소제목을 붙이고 쓴다고 했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어 독자들은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책을 엮을 때 방대한 내용에 욕심을 내어 이해하기 어렵도록 하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큰 제목의 분류를 인물로 하든지, 지역 별로 하든지 통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윌 듀런트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분류하고 배치했겠지만,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혼란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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